190화
190. 여행(5)
과거, 데드 체이스가 재앙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 시기.
그 기이한 콘셉트로 유명한 괴인 다섯 명이 있었다.
하나는 은신왕 클로킹. 그의 은신술은 너무나 완벽하여, 투표가 선언되기 전까진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라봤다는 풍문이 돌 정도의 네임드 유저였다.
다른 하나는 부자왕 리치킹. 그에게는 없는 자원이 없으며, 만약 그에게 없는 것이 있다면 아직 출시되지 않은 것뿐이라는 낭설이 돌곤 했다.
그다음으론 걷기왕 워킹. 그는 플레이 내내 절대로 뛰지 않는 기이한 보법을 선보이는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보에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경외하여 감히 그를 건드리지도 못했다.
또 다른 괴인으론 미행왕 스토킹. 이 악명 높은 생존자는 언제나 신원이 보장된 한 명을 목표 삼아 게임이 끝날 때까지 따라다니는 플레이 방식으로 체인질링 유저들의 공분을 자아내곤 했다.
그리고 다섯 괴인의 마지막이 바로, 충격왕 쇼킹. 그의 캐릭터 치장 방식은 너무나 괴상하여, 간혹 어떤 생존자들은 그를 새로 등장한 체인질링의 일종이 아닌가 착각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 다섯 괴인의 신비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소는 어느 누군가 나서서 아이디 맞춤을 제안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제각각 다른 시기에 게임에 입문했고, 서로에 대해 접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아이디를 정했으며, 그에 어울리는 기이한 플레이 방식을 집착했다.
이들을 추종하고 찬양하는 유저들은 갖가지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새로운 아종을 만들어 내었다.
언제나 새로운 만남을 추구하는 만남왕 부킹, 시도 때도 없이 한철 지난 유머를 주워섬기는 농담왕 조킹, 그 외에도 의류왕 마네킹, 파괴왕 브레이킹, 로봇왕 위잉치킹과 일루왕 너이새킹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최초의 원류가 된 다섯만큼 유명세를 얻진 못했다. 실력 면에서나, 기이함으로나 비할 데가 아니었기에.
언젠가 이 다섯 괴인이 모두 모이는 날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초유의 격변이 일어나리라는 미신 같은 가설마저 떠돌았다. 결국 게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성사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하지만…….
이세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괴인 넷을, 제각기 다른 게임에서 개별적인 만남을 가진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만남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충격왕 쇼킹이었으니.
그때의 기억을 상기한 이세는 등줄기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이면 와도 이런 인간이 와서…….’
“왜 그래요?”
하연은 양손으로 머리를 싸맨 이세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더니, 곧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목에 건 파우치를 뒤적거려 타원 형태의 새하얀 알약을 꺼내 들었다.
“아, 편두통이시구나. 저도 가끔 그래요. 이거 먹으면 좀 나아질걸요?”
해맑은 얼굴을 하며 건네는 두통약. 그늘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보며, 이세는 손사래 쳤다.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른 문제가 있어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거듭 사양하는 이세를 본 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보기엔 분명 문제가 있는 품새였지만, 당사자가 저렇게 한사코 부정하는 걸 보면, 계속 권유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듯했다.
멋쩍게 두통약을 파우치에 넣은 하연은 이번엔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세 씨는 어떤 아이디를 쓰셨는데요? 회장님께 들어보니까, 이세 씨도 데드 체이스 경험자라고 들었는데. 혹시 막 페이스리스나 글리치, 끼토공듀처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이었던 거 아니에요?”
이세는 짧게 침묵한 끝에, 적당한 말을 돌려주었다.
“아마 말해도 모를 겁니다. 누가 알아볼 만큼 유명세를 타진 않았던지라.”
“아, 그래요? 하긴. 그렇게 랭킹이 높은 사람이었으면 회장님이 저 같은 사람을 고용하지도 않았겠네요. 물론 랭킹이 높다고 진짜 괴현상에서 특출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본기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연은 순순히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속으로는 일말의 의구심이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뒤에서 묵묵히 그들을 따라오던 집사가 타이밍을 맞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시지요. 객실에 짐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한 바퀴 쭉 둘러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 네.”
명목상의 상급자인 집사를 대하기 어려운지, 하연은 조금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참 시의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팸플릿에 선박 내부 구조가 나와 있다지만, 일반적인 고객들이 갈 만한 위치만 표시된 거지. 직원들만 이용하는 통로나 장소 같은 건 직접 발품을 팔면서 알아봐야 해. 남들이 모르는 샛길이나 장소를 알아두면, 만약의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거야.’
이러한 조심성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괴현상의 마수를 두 번이나 거친 인간은 항상 가슴 한편에 두려움을 품고 살아야 한다. 보험을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불의의 재난은 언제나 가혹하기 마련.
그들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크루즈선에 올라,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VIP 전용 객실이 포진한 로열 스위트 존은 3층이었다.
15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비치는 메인 홀이 나왔다.
메인 홀 다음은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였고, 복도를 사이에 둔 그들의 객실은 서로 마주 보는 방향인 1인실과 2인실이었다.
객실 문에는 가슴 높이에 바구니 하나가 달려 있었고, 그 안에 검은색 카드 키가 담겨 있었다. 객실 번호와 배의 이름이 고급스러운 필체로 양각된 형태. 바구니 위에는 하선 시 카드 키를 보관함에 넣어두고 하선해 달라는 내용의 알림판이 붙어 있었다.
당연히 하연이 1인실이었고, 이세와 집사는 2인실이었다.
서로의 객실로 갈라서기 전, 이세는 이렇게 말했다.
“짐 정리할 게 있으면 하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거나 쉬고 계십시오.”
“어, 네.”
“지금이 10시 53분이니까… 점심때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 비었군요. 12시에 만나서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고 보면 출항 시간이 11시인 것은 꽤 교묘한 상술인 것 같기도 했다. 시중에서의 그것보다 은근히 비싼 음식값과 모처럼 여행을 나와 입과 지갑이 헤 벌어진 여행자의 조합. 흔치 않은 장소에서의 식사는 바가지를 써도 적당히 좋은 추억이었다고 미화시켜 줄 요소이기도 하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은, 그것도 제법 괜찮은 영업 전략이라고 납득할 뿐이지만.
“아, 시간 되면 제가 연락, 음. 드릴게요.”
미묘한 공백을 넣어 말하는 하연.
이세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가, 곧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아마 이 여자에겐 할아버지 연락처밖에 없어서 그런 거겠지.’
엄격한 노신사의 모습을 한 그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울 터. 이세는 그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다.
언젠가 목숨을 맡길지도 모를 사람. 이미 계약 관계로 묶여있다곤 하나, 작은 호감을 쌓아두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연락처가 없으시죠. 제 번호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연은 속내를 들킨 사람 특유의, 약간 붉어진 얼굴로 이세의 번호를 저장했다. 바로 간단한 문자 메시지를 보낸 덕에 이세 역시 하연의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그때 가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하죠.”
“네, 네!”
하연의 정체가 적잖은 충격이었던지라, 이세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에 확인할 것도 수두룩하다.
확인 작업을 끝내고 머릿속을 가다듬은 다음에는, 곧장 논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공유해야 할 것, 의논해야 할 것이 산더미와 같으니까.
이따가 보죠. 이세는 그렇게 말하고 집사와 객실로 들어갔다.
* * *
집사는 객실 내부의 각종 감시 장비 유무를 검사하고, 짐 안의 내용물 중 누락된 것이나 추가된 것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외부 시설을 이용할 때 당연히 이루어지는 조치였다. 천성 그룹의 핏줄에 적대적인 관심을 가질 인간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절차.
하연의 객실과 짐에도, 방 주인이 자리를 비울 때를 노려 같은 조치가 취해질 예정이다. 물론 이미 수차례에 걸친 신원 검사를 실시하고, 합류하기 전까지 몇 번이나 당사자는 모를 동선 세탁이 행해지긴 했다.
하연의 최초 합류 지점인 국제여객 터미널에 개별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도록 강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모든 조치에도 집사는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벌써 죽을 위기를 셀 수 없이 넘긴 어린 주인이다.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살아있을 자격이 없다.
집사가 편집증적인 보안 검사를 하는 동안, 이세는 푹신한 침대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눈에 피로를 주지 않으면서도 어둠을 몰아내는 부드러운 조명이 비쳤지만, 기분 전환에 썩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이런 어이없는 도피를 하는 마당에 뭔들 마음에 들겠냐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괴현상을 피하겠다고 외국으로 도피한다는 황당한 발상과,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꼴이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어느새 그 도피행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이세는 맥없는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꽃다발처럼 묶인 커튼 두 쌍이 좌우측 가장자리로 치워져, 창문의 풍경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침을 한참 넘기고서도 분주한 하루가 이어지는 항구의 모습. 스위트룸은 모두 이렇게 창밖으로 너른 바다가 보이는 오션 뷰가 특징이었다.
날씨도 쾌청하고 탁 트인 풍광이 마음을 들뜨게 하기 충분하건만, 이세는 그런 것을 보고도 이렇다 할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분도 기분이지만, 매 여행마다 특등석에 앉아 보던 경치가 경치이다 보니, 이제 와서 이런 것에 특별한 감상이 들 리가 있나.
이세는 의례상 집사에게 물었다.
“뭐 나오는 거 있어?”
“아직까진 없습니다.”
흥, 이세는 작게 코웃음 쳤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성 그룹의 가장 높은 별이 신신당부한 부탁이다. 크루즈선의 전반적인 관리 감독을 맡은 벤스타 기업이 허튼짓이나 책잡힐 건덕지를 만들진 않았을 터. 뭐라도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무료함과 알 수 없는 짜증에 접어든 이세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48인치 벽걸이 TV에서 뉴스 채널을 찾아보니, 근 2주 전에 재발한 괴현상의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아직도 저걸 소재로 아웅다웅하는 걸 보니, 요즘 뉴스거리가 어지간히도 없나 싶었다.
모자이크 처리된 어느 여학생과 진행한 인터뷰. 인터뷰 대상은 XX 고등학교의 생존자, 한 모 학생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배경이 병원인 것을 보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느 한구석은 멀쩡하지 않은 듯했다.
여학생은 음성 변조된 목소리로도 울음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제 친구가… 그렇게 됐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는 무척 진지하게 엄선된 질문을 날렸다.
―많이 힘든 건 알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혹시 그 친구분이 일산선 지하철과 XX 대형 종합 병원에서 살아나온 그 학생이 맞습니까?
―…네, 흐윽. 맞아요.
―친구분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은 이번에 처음 들으셨다구요.
‘이 X신 같은 인터뷰도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필요한 건가?’
과거에, 이세의 부친은 이런 세태를 무감정하게 논평한 적 있다. 언론의 타락은 압도적인 자본 잠식과 유착, 지배에 용이한 현상이니, 되레 권장할 일이라고. 그러나 이세는 부친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수용하고 싶지 않았다.
진저리가 난 이세는 리모컨 버튼을 꾹 눌러 채널을 바꿨다. 드라마, 다큐멘터리, 교육, 영화, 예능. 더 나아가 인터넷 방송 플랫폼과도 연계되고 해외 방송사의 것까지 제한적으로 송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리모컨을 던져 TV 화면을 박살 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일 즈음, 집사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왜.”
“보안 검사와 짐 정리가 다 끝났습니다. 머리나 식힐 겸, 한번 산책이나 돌고 오시렵니까?”
반길 만한 제안이었다.
열 오른 머리를 식히는 건 둘째 치고, 주변 환경을 숙지해 두는 일은 점심식사 전 끝내 놓을 주요 사안 중 하나다. 객실 내 보안 검사 때문에 미뤄졌으나, 순서가 돌아오는 대로 끝내야 할 과업이기도 했다.
강박적인 짜증에 잠겨 가던 이세는 집사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