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194화 (194/264)

194화

194. 접촉(4)

약속했던 점심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오에 들어선 태양이 하늘 중천으로 굼뜨게 옮겨갔다.

이세가 하연과 만나기로 한 곳은 크루즈 선 4층에 자리 잡은 카페였다. 사방이 유리창인지라 오션뷰가 탁월하다. 기성 프랜차이즈가 아닌 독자적인 이름을 가진 카페였지만, 서비스하는 메뉴는 그리 다른 것이 없었다. 시중에서 내놓는 커피야 다 거기서 거기인 법이지만.

처음엔 레스토랑에서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뱃멀미의 잔향은 입맛을 깡그리 날려 보냈다. 간단한 요깃거리로 식사를 때우는 게 나으리라는 것이 이세의 판단이었다. 입맛과 별개로, 열량 보충이 필요했기에.

물론 집사는 이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간섭을 하진 않았다.

그리하여 이세는 먼저 도착해 음악을 곁들여 애독서를 천천히 음미했다. 기나긴 여행길, 시간을 나태하게 보내는 건 성격에 맞지 않다.

애독서는 유일하게 챙긴 종이책이었다. 휴대성을 고려하면 태블릿에 넣어둔 수백 권의 전자책이 낫지만, 종이로 만들어진 책은 종이만의 매력이 있다.

책을 읽을 때는, 글줄만 보는 것이 아니다. 종이에 손가락이 닿는 매끄러운 감촉. 사락사락 책을 넘기는 소리는 차분한 안정감이 있다. 이세는 책이 안기는 모든 자극에 몰두했다.

창밖에선 황금빛 정오의 태양이 바다를 물들이고, 카페에선 클래식과 재즈를 적당히 칵테일 한 듯한 연주가 울려 퍼진다. 의외로 둘의 조합이 절묘하게 잘 맞다.

이세가 느긋하게 독서에 매진하는 그때, 집사가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아무래도 류영태 선장의 태도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특히 패닉 룸에 관한 화제를 꺼냈을 때, 그 점이 두드러졌죠.”

“그렇긴 했지.”

이세의 순순한 긍정. 집사의 미간이 좀 더 좁아졌다. 표정에 담기는 것은 책망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체하느냐?’ 라는 의미의 책망.

그러나 책에 시선을 늘어뜨린 이세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할 뿐.

“하지만 이상한 정도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다짜고짜 여기저기 파헤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조사하러 온 것도 아니고, 공식적인 신분은 크루즈 여행객에 불과한데.”

“하지만―”

“됐어. 배에서 뭔 지랄을 하든 그건 선주회사와 선장이 감당할 몫이지. 나랑 엮일 일만 아니면 상관없어. 놈들도 내가 이 배에 올라탄 이상, 괜한 병신 짓거리로 소란을 일으키진 않겠지. 우리 꼰대 눈 밖에 나기 싫어서라도 알아서 처신하지 않겠어?”

일견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집사는 이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세가 불현듯 고개를 들자 덩달아 그쪽에 주의가 쏠렸다.

그들의 눈에 하연이 입구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약속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앞둔 시점.

첫 만남에도 그러더니, 하연의 시간관념은 정해진 기한만 맞추면 된다는 식인 듯했다.

하연은 조금 상기된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살짝 손을 들어 흔드는 이세를 발견했다.

호다닥 달려와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하연.

“와, 언제부터 있었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저도 도착한 지 10분쯤밖에 안 됐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여러 번 읽은 책인데도, 기다리는 동안 겨우 마흔 페이지 가량을 읽었다. 이세는 책에 책갈피를 끼워 옆에 앉은 집사에게 넘겨주었다. 표지를 본 하연은 큰 눈을 깜박거리며 관심을 드러냈다.

“우와, 원서를 읽으시네요? 제목이 뭐예요? 무슨 책이죠?”

한 번에 와다닥 질문을 쏟아내는 하연. 이세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포개며 차분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입니다. 국내 번역판도 있지만, 번역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번역이 잘된 판본은 워낙 희귀해서 구하기 까다롭고. 그래서 그냥 원서를 읽는 게 나았습니다.”

“아, 저도 그거 들어봤어요! 어,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뭔가, 되게 어려워 보이는 책이라서…….”

뒷말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였다. 조금 더 붉어진 얼굴. 이세는 무난하게 말을 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책의 유명세가 꼭 재미와 접근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니까. 저자가 대중성을 확보하려 노력한 티가 나지만, 그래도 부담 없이 읽히지만은 않더군요.”

두 사람이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본래 카운터로 가서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카페 직원은 귀한 손님을 접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세는 피자와 탄산음료를, 하연은 샐러드와 자몽에이드를 주문했다. 집사는 진한 커피 한 잔만을 시켰는데, 이는 경호 공백 최소화를 위함이었다. 집사의 식사는 나중에 객실로 돌아간 다음에야 해결될 것이다.

식사라기보다 간식이라고 해야 어울릴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공백기의 테이블엔 컵 석 잔과 물병이 올라왔다. 하연이 손을 뻗었지만, 집사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하연의 손을 물렸다.

“어, 제가 해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이니, 두 분은 대화 나누시지요.”

집사는 손수 컵에 물을 따르고 이세와 하연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고급 다기 세트를 다루는 듯 섬세한 손길. 그 손길을 하연은 민망함 반, 놀라움 반의 얼굴로 보았다.

이세는 물을 한 모금 홀짝이고는, 사소한 잡담으로 상대와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착수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가볍게 드시는 편입니까?”

“아뇨. 하루 일정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싶어서.”

“모자라다 싶으면 언제든 더 시키십시오. 어차피 공금으로 나가는 거니까.”

“아, 감사합니다. 모자라면 그럴게요.”

직원의 근무 만족도는 복지 수준과 근로 환경이 좌우한다. 능력에 맞는 대우는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것이고. 이세의 부친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하연의 경우, 이미 비슷한 나이의 사회 초년생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급여가 보장되었다. 그러니 다른 쪽의 배려를 신경 써야 한다.

‘뭘 하든,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는 게 시작이지.’

얼마간 대화를 이어가자, 하연은 자신이 봤다는 신기한 볼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거 봤어요?”

“어떤 거 말입니까?”

“그 종이비행기 날리던 애요.”

애? 이세는 연령을 특정 짓는 말에 순간 안색을 바꿀 뻔했다.

밥알에 낀 모래알처럼 거슬리는 고민. 그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기에.

하지만 이세는 고민을 밀어두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저도 가던 길에 한 번 봤습니다. 그냥 마술 치곤 꽤 신기했죠.”

“그렇죠? 엄청엄청 신기했죠? 제가 가르쳐달라고 하니까 순순히 가르쳐주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 생각엔, 일부러 잘못된 방법을 알려준 것 같아요. 막상 따라 해보니까 하나도 안 되는 거 있죠? 분명 다른 트릭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어요. 가르쳐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하연은 잠시 물 컵을 입에 가져갔다. 말을 길게 하니 목이 마르긴 할 것이다. 컵에 담긴 물을 거의 비워낸 하연은 장황한 설명을 이어갔다.

“마술도 신기한데, 애는 그 이상이었어요. 친구나 부모님도 없이 혼자 여행 왔다는 거예요. 무슨 사연인가 궁금하긴 한데, 직접 묻기는 왠지 실례일 것 같아서 꺼려지고.”

“그렇군요.”

이세는 대강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말이 많은 사람은 좋아하는 편이다. 적절히 추임새만 넣어주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듣다 보면, 상대를 파악하는 일도 한결 쉬워진다.

전반적인 말투와 자주 쓰는 어휘, 그로써 은연중에 드러나는 가치 판단.

이 모든 것들은 교육 수준, 가치관, 성장 환경을 유추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단서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가며 알아내는 것보다 편한 방식. 그 번잡한 노고를 생각하면, 좋아하지 않으려야 좋아할 수밖에.

“얘기를 듣다 보니 가출이라도 한 건가 걱정되기도 하고요. 혹시 밀항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었겠죠?”

“글쎄요. 가출을 했다 쳐도 이런 배에 올라타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미성년자라면 밀항 쪽도 쉽지 않을 겁니다.”

“아, 그것도 그렇네요?”

이세가 하연의 말소리를 라디오 듣듯 하고 있을 때, 음식이 도착했다. 대화가 잠시 끊어지고, 쟁반 위에 놓인 컵과 접시들이 차례차례 테이블 위로 옮겨졌다.

하연은 함께 나온 포크와 젓가락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젓가락을 선택했다. 반면 이세는 나이프와 포크 따윈 거들떠도 보지 않고 일회용 종이 장갑에 손을 넣었다.

원체 상류층의 식사 예절을 귀찮게만 여겨왔던지라, 여기서도 품위를 따져가며 밥 먹고 싶진 않았다.

앞에 놓인 접시 위에 모락모락 김 올라오는 피자가 올라가 있다. 이미 여섯 등분으로 칼질이 끝나 먹기 수월했다. 이세는 그중 한 조각을 손에 들고, 덥석 입으로 가져갔다.

그대로 한 입 크게 베어 문 순간, 이세의 얼굴에 깊은 의혹이 배어들었다.

“……?”

생전 처음 먹어보는, 기묘한 맛이 났다. 이세는 손에 든 피자 조각과 접시 위에 남은 다섯 조각을 미심쩍은 눈길로 보았다.

‘분명 피자처럼 생겼는데, 일반적인 피자 맛이 아닌데?’

그러나 영수증을 보면, 피자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음식을 시킨 건 또 아니었다. 이세의 혼란이 더욱 커졌다.

피자를 닮았지만 피자 맛이 나지 않는 음식.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이세의 표정을 본 집사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는, 무척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 이거 피자 맞아?”

“제 눈엔, 예. 피자가 맞는 거 같습니다.”

집사의 확답은 그 자체로 신뢰성이 보장되어 있다.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에선 차라리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을 말하진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럼에도 이세는 끝끝내 의심을 지워내지 못했지만, 마지못해 다음 한 입을 우물거렸다. 마분지를 씹는 듯한 식감에 맛도 영 아니었지만, 먹다 보니 도로 뱉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집사는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길로 보았다. 명가의 고귀한 핏줄이 어쩌다가 냉동 피자 따위로 끼니를 때우게 되었을까.

갑자기 풋, 웃는 소리가 났다. 시선을 든 이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면에 앉은 하연이 필사적으로 웃음보를 참는 듯 몸을 배배 꼬고 있어서였다.

이세는 내키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아뇨, 죄송해요. 그게, 피자를 그렇게 맛없게 먹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별게 다 재미있다. 이세는 공연히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노려보다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어 한숨을 쉬었다.

그 뒤의 식사는 깨작깨작 이어졌다. 이세는 우거지상을 쓰고 피자를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절반을 남겼고, 하연은 음식의 맛보다는 분위기를 음미하는 듯 천천히 먹었다. 애초에 커피 한 잔만 시킨 집사는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처럼 평온한 얼굴로 잔 비우는 속도를 조절했다.

세 사람의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이세는 직원이 다 먹은 접시를 치우길 기다려 가장 중요한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냅킨으로 입을 쓱쓱 닦던 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본론이요?”

본론이라는 게 있기나 했느냐는 투다. 이세는 몇 번째인지 모를 어이없음을 느꼈다.

‘그럼 진짜 밥만 먹으려고 당신을 불렀을까?’

함께하는 식사는 상하급자의 원활한 소통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창구로 기능한다. 이 역시 권이중이 으레 강조하는 말. 그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이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정작 권이중 휘하의 임원진은 밥 먹으면서까지 일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세는 거기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차세대 꼰대로 자라나고 있는 이세는, 차분한 어조로 하연의 본 업무를 상기시켜주었다.

“하연 씨가 저와 동행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 경력과 수중에 있는 자원이 제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에 대해. 그리고 비상 상황 발생 시의 행동 방침도 따로 정해둘 필요가 있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하연 씨는…….”

이세는 뒷말을 삼켰다.

과연 이번에도 그 명성에 걸맞은 충격을 안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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