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196. 접촉(6)
마린 블루스 호.
이 배는 얼마 안 가 거대한 풍랑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은 누구 하나 앞으로 불어 닥칠 태풍을, 심지어 그 조짐조차 예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범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자 1명, 남자 3명으로 이루어진 일행.
그들에게 이름은 없다. 아니, 있지만 아무도 진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이란 위장 수단에 불과하다. 수시로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그들은 행색과 신분을 시시때때로 바꾸며 살아간다.
굳이 칭한다면 편의상 여자를 A, 나머지 남자 셋을 B, C, D로 부르기로 하자.
그들이 있는 장소는 크루즈선 1층에 마련된, 개방형 공연무대와 인접한 레스토랑이었다. 무대 위는 아직 한산했다. 뭘 하든 지금 하기엔 너무 일렀다.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시켰지만, 누구 하나 손대는 사람은 없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그들 중 여자 쪽, A가 한 남자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지?”
언뜻 수수한 얼굴이지만, 조금만 눈을 치켜뜨니 매서운 인상이 된다.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힐난을 받은 남자, B는 짐짓 난처하다는 투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멀미로 고생하는 친구한테 멀미약하고 명함 하나 준 게 그리 큰일 나는 일입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을 일이었어. 노출의 최소화가 우리의 기본 행동 방침 아니었나? 그 웃기지도 않는 전국 양배추 운송 협회 같은 이름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 아니었어? 아니면 내가 모르는 새 명령권자가 바뀌어서 새로운 행동 방침을 받아 오기라도 한 건가?”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게다가 이 정도 접촉이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B. 그러나 A는 여전히 서릿발 같은 표정과 음색이었다.
“접촉 대상도 이상했어. 멀미로 고생하는 게 그 아이 혼자만은 아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뇨? 그거야말로 무슨 말씀입니까?”
A는 예감했다.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추궁하는 수밖에.
“모른 척하지 마. 내가 모를 것 같았어? 그 애, 천성 가의 차남이잖아. 권이중 둘째 아들 권이세. 다른 사람 다 놔두고 그 애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야?”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는 반경 1.5미터 이상으로 새어나갈 일이 없었다. 드넓은 휴게실에 오가는 소음도 소음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화 시작 전 둘러친 특수한 ‘필터’ 덕분이다.
그들 네 사람의 성문을 감지하여, 그로부터 발생한 음원에 상쇄 간섭을 일으키는 특수 장비의 힘. 범위를 너무 줄였다간 서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다.
같은 일행에 속한 두 사람, C와 D는 선뜻 개입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나마 동조의 침묵이 아닌, 안절부절못하는 침묵이라는 점이 여자의 위안이었다.
그녀가 승낙하지 않은 임의 행동을 나머지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면, 이 작전은 처음부터 글러 먹었다. 팀원들이 명령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다는 뜻이니.
얼마 안 가, 같잖은 기 싸움을 벌이려던 B가 순순히 포기했다.
“그건 보험이었습니다.”
“보험?”
“아시지 않습니까. 권 회장이 그토록 감추려 했지만, 그래도 우리 눈을 속이기엔 역부족이었죠.”
그러면서 히죽 웃는 B. 잘못을 인정하는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 애가 괴현상의 생존자라는 건 나도 알아. 두 번째에 걸쳐서 살아 나왔다지. 그게 뭐?”
말하면서 혀에 감도는 쓴맛. 그녀는 무심코 자신이 겪은 괴현상을 떠올렸다.
그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이후, 단 하루도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를 잊어본 적도, 역시.
“하하, 알 거 다 아시는 분께서 왜 그러십니까?”
A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B는 그저 유들유들했다. 이어지는 설명이 B의 여유를 뒷받침했다.
“현 상황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제가 굳이 설명해야겠습니까? 괴현상의 발생 요건이 그야말로 그림에 짜 맞춘 것처럼 충족된 이 환경이?”
B는 손을 들어 활짝 펼쳤다. 펼쳐진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잠재적인 위험들을 나열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폐쇄된 환경, 그 ‘괴현상’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최소한 세 명이나 있고, 그중에는 저희가 파악하기로 벌써 두 번이나 괴현상에 연루된 인물이 둘이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배경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도 불안하긴 마찬가지고요.”
이유를 꼽다 보니, 남은 손가락은 엄지 하나뿐이었다. B는 치켜세운 엄지를 그대로 바닥으로 뒤집었다. 그 옛날, 사형수의 사형을 언도하는 관용 없는 재판관처럼.
B는 빙긋 웃었다. 엄지로 아래를 쿡쿡 찍으며.
“보스. 이 배, 생각하는 것만큼 안전하지 않아요. 거친 바다에 띄운 종이배나 다름없다고요.”
행동의 근거는 그럭저럭 수긍할 만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마련한 보험이라는 게 뭐야?”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멀미약 먹이는 김에 지효성 극독 앰풀도 같이 먹인 것뿐이에요.”
순간, 그녀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한 순간, 그녀의 손이 올라갔다.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치는 소음.
이 소리에 돌아보는 사람은 없다. 호기심 어린 시선, 찰나에 내려앉는 적막, 주위에서 작게 수군대는 목소리, 그 어느 것도.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지막이 궁시렁대는 목소리.
둘의 대화를 조마조마하게 듣던 C가, 급하게 ‘필터’의 설정을 바꾼 덕이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소음은 반경 1.5미터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C와 나란히 불쌍한 얼굴을 하던 조직원 D는 서로에게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제정신이야?”
“보스, 진정을―”
“제정신이냐고 물었잖아, 이 미친놈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괴현상에 대비한답시고 아무 상관없는 민간인한테 독을 먹였다고?!”
B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는 그 자체로 모순이 있었지만, 당사자는 모르는 듯했다. 신경 쓸 겨를이 없거나.
테이블에 올라간 손이 바르르 떨렸다. A는 두세 차례의 깊은 호흡으로 격정을 가라앉혔다. 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내면에 넘실거리는 분노는, 때때로 눈 속에서 번득여 임계점 직전에서 간신히 멈춰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리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미숙한 행동을 자각했다. 작전 현장에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건, 명령권자로서의 자격 미달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냉정을 되찾는 훈련 역시 질리도록 받았다. 생사가 걸린 문제였으니까.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A는 얼어붙은 듯 차갑게 말했다.
“설명해. 그 염병할 보험이 어떤 식인지.”
B는 설명했다.
“제가 아까 지효성 극독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당장 작용하는 게 아닙니다. 특정 신호를 발신하면, 그때부터 그 아이의 뱃속에 들어간 깜짝 상자가 열리는 거죠. 이 정도면 나중에 괴현상이 터지더라도, 충분한 교섭 수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차할 때 아군으로 영입하거나, 상황이 대차게 꼬여 적으로 돌아서면, 그 즉시 방아쇠를 당기는 식으로.”
실로 편집증 환자의 사고방식. 그러나 조직에서 일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정신병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수한 요원일수록, 인간성이란 단어를 낯설게 여긴다.
A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벌어진 일. 그렇다면 수습할 방법이나 찾는 게 나을 듯했다.
“해독제는.”
“딱히 없어요. 시간이 약이라면 약일까.”
“…트리거가 발동되지 않으면, 알아서 자연 분해되는 종류라고?”
“그렇다니까요, 보스. 제가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짓을 하겠습니까?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저지른 일이라고요. 우리한테 아무 일도 없으면, 그 애한테도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나중에 속만 좀 더부룩하고 말겠지요.”
B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선이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지킬 건 지킨단 말이죠.”
“내놔.”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었다.
가지런히 펼친 손바닥을 B는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가증스럽게도.
“뭘요?”
“시치미 떼지 마. 리모컨 내놓으라고.”
극독 앰풀을 원격 신호로 발동시키는 장치를 말함이다.
B는 마지못한 태도로 품 안에서 그것을 꺼냈다. 신용 카드만 한 크기의 가느다란 기계였다.
장치를 낚아채듯 가져간 A는, 그 너머로 B의 눈을 노려보았다.
“스페어는?”
“없습니다.”
“확실해?”
“저를 그렇게 못 믿으시겠습니까? 정말 없다니까요.”
항복하듯 두 손을 들며 너스레를 떠는 B.
그녀는 민간인에게 다짜고짜 독을 처먹이는 새끼를 퍽이나 믿을 수 있겠냐고 묻진 않았다. 말없이 리모컨을 자신의 주머니로 가져갈 따름.
그러고 나니 삭막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작게 혀를 차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를 들었다.
“일단 먹어. 다 먹고 나서 마저 얘기하지.”
살살 눈치를 보던 일행들이 그제야 음식에 눈길을 주었다.
그 뒤로는 조용히 먹고 마시는 데 집중했다. 반쯤은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입맛 떨어진 사람답게, 그녀의 포크는 끝보다 움직이는 품이 더 날카로웠다.
그녀와 대조적으로, 나머지 일행들은 처음부터 왕성한 식욕을 보여주었다. 처음 내왔을 때보다 온기가 식은 음식들을 해치운 다음에도 주문은 대여섯 차례나 이어졌다. 인체 구조가 일반인과 다른 이들이니만큼, 열량 소모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의 조금씩 흘끔거리는 시선. 엄청난 속도로 쌓여가는 접시를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이곳이 무한 뷔페 집이라도 정중한 사과와 함께 축객령을 내릴 듯한 식사량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A는 눈짓으로 지시했다.
필터의 설정을 재조정하라고. 감춰야 할 대화도 일단락된 마당에, 아무 소리 없이 푸드 파이팅을 벌이는 대식가 4인방은 지나치게 이상해 보인다.
식사 중에도 주의력이 흐트러지지 않은 C가 은밀한 동작으로 지시에 따랐다.
그러는 와중에, 정신없이 파스타 두 접시를 흡입하던 조직원 D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구뤈데요, 보스.”
두 볼이 미어지도록 미트볼을 먹느라 뭉개지는 발음.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왜.”
“저쪽 한번 보세요.”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한 사람만 앉은 테이블이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을 합친 것만큼―어쩌면 그보다 더― 기이한 인간이었다. 아마 그래서 4인용 테이블을 홀로 독차지한 걸까.
처음 눈에 띄는 것은 테이블 구석에 올라온 은색 탑이었다. 자세히 보니, 숟가락과 젓가락과 포크와 나이프가 모종의 설계에 따라 얽히고설킨 구조물이었다.
어찌나 정교한 손놀림으로 균형을 짜 맞췄는지, 높이가 60센티미터를 넘어가는데도 도통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특이한 음식이 올라가 있었는데, 얼핏 봐선 무슨 요리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인에 버금가는 시력으로도.
‘아니, 요리가 맞긴 한가?’
A가 보기에는 그저 음식으로 장난친 것 같았다. 그나마 해산물을 베이스로 했다는 것만 가까스로 알아볼 뿐.
저 기이한 인간은 양손잡이인 듯했다. 한 손으로 음식을 먹고 다른 손으로 꾸준히 탑을 높이는 꼴이 재주도 좋다.
심지어 보지도 않고 하는 일이었다. 마치 그 모든 구성이 머릿속에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러나 C는 희희낙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배에 탄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기대했는걸요. 그 전설의 문어 복숭아 조림! 아무나 만들지 못하고, 또 아무 데서나 팔지도 않는 별미 중의 별미라구요.”
“…….”
처음부터 용건은 사람이 아닌 요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별미고 자시고, 외양이 영 아니었다.
혐오 식품과 괴식의 중간 어림에 있는 듯한 생김새. 그녀는 어지간히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저런 것을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리도 저거 먹어볼까요?”
“…난 생각 없으니까, 먹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으하핫, 저 훌륭한 맛을 못 볼 보스가 안타깝습니다.”
문어 복숭아 조림인지 뭔지 하는 음식까지 먹어치우고, 폭풍 같은 열량 보충 시간이 끝나 갔다.
직원이 후식을 내올 즈음, C가 필터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슬슬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질 무렵이었다.
보이지 않는 장막이 네 사람의 목소리를 차단하자, C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말했다.
“그런데 보스. 이번 작전의 오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