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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210화 (210/264)

210화

210. 탐색의 서반(2)

[1팀. 권이세 : 5표. 김경태 : 0표. 설하연 : 0표. 우주인 : 0표. 진세라 : 0표.]

[2팀. 김민후 : 0표. 나진기 : 0표. 류영태 : 5표. 신하민 : 0표. 한지영 : 0표.]

[투표 결과, 동수. 퇴출자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

개표 결과를 듣고 나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양 진영 모두, 서로의 얼굴에서 비슷한 속내를 감지할 수 있었다.

미세하게 굳어지는 입매. 희미하게 꿈틀거린 눈썹. 무심결에 실룩이고 만 볼살 등.

이 순간,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의 실로 연결된 듯했다. 강렬한 불신이 10명의 뇌리에, 일제히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침묵을 헤집지 않았다. 긴장의 수위는 투표전이 진행되던 이전보다 마감된 지금이 되레 더 높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고요한 가운데서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아니, 차라리 지뢰 지대 한복판에 좌초된 것에 비견될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숨 막히도록 내려앉은 정적.

섣불리 내디딘 걸음이 그대로 대참사로 이어질 것을 예감하는 양,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초토화될 것을 두려워하듯.

이윽고.

이세의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소리 없이 낙하했다.

똑.

작은 소리가 이 공간에 걸려 있는 마법을 깨뜨렸다.

후우, 나지막이 흘리는 날숨. 소리가 봉쇄된 이곳에서 최초로 울려 퍼진 소리였다.

그를 기점으로 다양한 소리가 우후죽순처럼 터져 나와 침묵을 난도질했다. 누군가 덩달아 내쉬는 한숨. 끄응, 어딘가 불만스러운 신음. 벅벅, 간지럽지도 않은 뒤통수를 긁적이는 손. 쯧, 아쉬움에 튕겨 오르는 혀.

침묵에서 해방된 세계가 슬슬 본연의 번잡함을 되찾아갔다.

“흥. 김새게.”

뱀 같은 여자가 누구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병풍처럼 늘어선 일행에게 짤막한 말을 건네며.

“뭣들 해요? 우리도 이만 가요. 아직 할 일 많이 있으니까.”

상대편 인원들이 굼뜨게 움직이자, 이세도 일행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움직이죠.”

“아, 네.”

그렇게 떠나려는 차에 누군가 ‘잠깐 기다려’ 하며 일행을 불러세웠다. 이세가 어깨너머로 돌아보자, 다들 떠나는 와중에 혼자 자리를 지킨 말라깽이가 손짓했다. 입가에 싱글싱글 매달린 웃음은 덤.

“재미없는 사람들 같으니. 뭐가 그리 급해? 여기서 볼 장 다 봤다 이거야? 그래서 그렇게 매정하게 가려고?”

구태여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여길 떠나는 즉시 일행과 공유할 것이 태반이다. 대략적인 전황 파악, 얻어낸 소득, 추정되는 적의 의도와 같은. 무슨 헛소리를 떠들든 무시하고 갈 길 가는 것이 옳다.

이세는 그리 생각했으나, 주인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끈질기게 엉겨 붙는 사람은 안 좋아하는데. 무슨 일인데스까.”

“잠깐만 어울려줘. 물어볼 게 있단 말이야. 너희도 궁금한 게 많을 테니, 너무 민감한 것만 아니면 대답해줄게. 괜찮지? 이런 게 상부상조 아니겠어?”

얼핏 그럴듯한 말을 주워섬기는 말라깽이. 사탕으로 어린아이를 꾀는 유괴범이 연상된달까. 그러나 주인은 사탕에 현혹되어 유괴범에게 끌려가는 아이처럼 순진하게 말했다.

“오, 그것참 베리 굿 아이디어네요.”

“그렇지?”

보다 못한 이세가 주인을 제지했다.

“뭐가 베리 굿 아이디어야. 보나 마나 허튼수작 부리는 걸 텐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무시해.”

“아니, 왜 그리 야박하게 굴어? 생각 없는 사람까지 붙잡을 생각은 없어. 근데 다른 사람까지 방해하면 안 되지. 아니면 뭐야.”

능글거리던 말라깽이가 의미심장한 투로 덧붙였다.

“혹시, 네가 대장이라도 되는 거야? 그래서 막 명령하는 거야?”

이세는 무심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시죠.”

그리고 다시 주인을 잡아끌었으나, 주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피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먼저 가.”

“이러는 게 피해 주는 거라곤 생각 안 하나?”

“다 계획이 있다니까.”

대체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몰라도,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닌 듯했다. 그 대단한 자신감의 근거를 한 톨이라도 같은 팀에게 알려주면 좋으련만.

이세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고는 다른 일행들을 이끌었다. 떠나는 길에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고.

“잊지 마. 넌 나한테 들을 대답이 있을 거다.”

“걱정말래두.”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러나 주인은 보지도 않고 손만 살랑살랑 흔들어 짧은 작별을 고했다. 이세는 더 미련을 두지 않고 발을 떼었다. 아닌 척, 접착제라도 묻은 듯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다섯 쌍의 눈동자를 모조리 일별하며.

물론 떠날 때 ‘라 따슈 2007’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정리해보죠.”

상대편 인원들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잡은 일행.

이세가 하연에게 물었다.

“‘불성실한 시민’은 류영태 선장에게 사용된 것이 확실합니까?”

“엇, 네. 분명 그 사람한테 썼어요.”

“그런데도 투표 결과는 동수가 나왔다…….”

이세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상박을 톡톡 두드렸다. 기대한 최선은 아니었으되, 예상한 범위 안의 결과를 상기하며.

원판인 데드 체이스에서도 그렇지만, 투표에 관여하는 자원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위력은 킬 더 킹에서 적어도 두세 배 이상의 효용을 기대할 수 있다.

어느 한 진영의 인원수가 변동되지 않는 한, 투표전은 평형을 이룰 수밖에 없으니까.

여기에 아주 작은 티끌이라도 올라가면, 위태로운 평형은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하연이 가진 ‘불성실한 시민’은 한낱 티끌 따위가 아니다. 지정한 자의 표를 무효표로 돌리는 기능. 실질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을 하나 줄이는 꼴이다. 이는 전장의 판도를 단숨에 기울일 강력한 무게추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세는 적이 제 발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미래를 그렸다. 제멋대로 시작한 투표전에서, 자기네들의 전력 손실만 입고 끝나리라고.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봤듯, 5 : 5.

이세는 뻑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역시 저쪽에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나 봅니다.”

“…아마 ‘정치 9단’을 썼겠죠?”

이세는 내키지 않게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 9단.’ 모든 투표 과정에서 2개의 표를 행사하는 스킬. 이 스킬이 상대편에게 있다면 모든 의문이 깔끔하게 해결된다. ‘불성실한 시민’으로 한 명의 표가 제외되었음에도, ‘정치 9단’을 가진 자가 모자란 표를 벌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운이 나쁘군요.”

집사가 진중하게 말했다.

“하연 씨가 지목한 자가 ‘정치 9단’을 갖고 있었다면, 스코어는 뒤집혔을 겁니다.”

“지나간 열차지. 아쉬워도 어쩔 도리 있나.”

그때는 이 수가 최선이라 여겼다. 게임 시작 직후, 이쪽을 기만하고 홀로 움직인 자.

류영태 선장.

그자는 높은 확률로 주교나 기사라 예상되었고, 이세는 잠정적으로 주교일 거라 생각했다.

‘기존에 체인질링이었던 놈들이 기사라는 역할군으로 편입되었지. 그리고 이때까지 체인질링이었던 놈들은, 대개 중범죄자였던 이력이 많아.’

단적으로, 지난 병원에서 만난 흡혈귀와 광대 괴물이 그렇다. 전 세계에서 괴현상을 연구하는 연구 단체들도 대동소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고.

그러나 이 배에 오르기 전, 천성 그룹 차원에서 철저한 조사가 있었다. 혹시 배에 체인질링으로 화할 가능성이 높은 범죄자가 올라탈 것을 경계했기에.

결국 이 개판이 벌어지고 만 걸 보면 두 놈이나 감시를 뚫고 승선에 성공한 모양이지만, 류영태 선장은 제외해도 될 듯했다.

배를 책임지는 자답게 다른 이들보다 한층 엄정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류영태 선장은 별다른 결격 사유가 보이지 않았다. 암수 범죄(暗數犯罪)만 골라서 한 인간이라면 모르겠으나, 거기까지 파고들면 끝이 없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류영태 선장은 상대편 주교일 것이라는 추정이 섰다. 한마디로 무슨 자원이든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

그래서 변수를 차단할 목적으로 ‘불성실한 시민’의 지목 대상이 되었건만, 결과는 이렇다.

이세는 문득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생각하다 보니, 두 번째로 나타난 흡혈귀를 떠올린 탓이다.

‘그 여자, 지금쯤 정신을 차렸을까? 식물인간 꼴이 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런데요, 이세 씨. 저 물어볼 게 있는데요.”

하연이 말을 걸자, 이세는 현 상황과 관련 없는 잡념을 지워냈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 이세 씨의 특전인 비열…….”

여기까지 말하던 하연은 아차 싶어 말을 바꾸었다. 이세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세의 면전에서 특전의 이름을 언급하는 금기였다.

“…하여튼 아까 투표전 끝나고 나서 특전이 발동됐나요?”

“그렇습니다. 잘 발동됐습니다.”

한결 억양이 사라진 대답이었지만, 하연이 손바닥을 맞대며 순수하게 기뻐했다.

“잘 풀렸네요! 우리 의도가 제대로 먹혔나 봐요!”

이세가 가진 특전은 ‘비열한 복수자’. 그 기능은 자신에게 표가 향했을 때, 표를 행사한 사람이 누군지 파악하고 그들 중 한 명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 웃기는 이름처럼 실속도 썩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 게임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1/5 확률만 뚫어내면 그만인 이 게임에선.

사실 이세는 이 특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없는 취급 하는 것이 속 편할 지경이었으므로. 발동 조건을 충족하는 것부터 몹시 위험한 일인 까닭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킬 더 킹에서 표가 몰린다면 왕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의미. 다른 역할군이라면 모르되, 실제로 왕을 맡은 처지에선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번 투표전에선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초반부, 양 진영의 자원 상태가 풍족하지 않은 지금이라면. 하연이 준비한 보험도 보험이고 말이다.

이 양날검 같은 특전을 쓰기 위해, 이세는 내키지 않은 연출을 준비했다. 은연중에 일행의 중심에 섰고, 다른 사람을 대표하여 그들을 통제한다는 인상을 주려 했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라 따슈 2007’은 그러한 연출에 화룡점정을 찍는 소소한 무대 소품이었고.

속이 빤한 수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노골적인 나머지, 되레 상대편에게 오판을 끌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심에서 벗어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표가 몰리면 특전을 발동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나쁜 흐름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것 없는 연출이었던 셈이다. 장기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그리하여 이세는 자신에게 투표한 뱀 같은 여자와 하와이안 남자, 말라깽이와 뚱보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보다가, 하와이안 남자를 찍었다.

“처음에 평화 조약을 맺자고 말한 게 이 인간이었고, 그다음부터는 은근히 언행을 조심했죠. 그래서 최우선 순위로 조사할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데요?”

하연의 조바심 나는 질문. 이세는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으로 X자를 그었다.

“꽝이었습니다.”

“왕이 아니었다고요?”

“네. 왕이 아니고, 그냥 병사였습니다.”

기사나 주교쯤 되면 모를까, 병사는 가장 쓸모없는 역할군이다. 실로 감탄스러운 위장이었다고 해야 할까. 목숨을 내놓고 얻은 정보치곤, 터무니없이 셈이 맞지 않다.

이세는 억지로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팀원들의 사기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 꾸준히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믿음. 그것들을 간직하는 한, 사람은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어도 성과가 좋습니다. 정보 수집 면에서, 우린 적을 몇 발자국이나 따돌렸으니까요. 류영태 선장을 잠정적으로 배제하고, 하와이안 놈까지 확실하게 제외했으니, 남은 용의자는 셋이 전부입니다. 이런 페이스만 유지하면 상대편 왕을 찾아내는 건 순식간이겠죠.”

하연이 의욕을 냈다. 집사는 처음부터 충직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무방하겠지. 양배추 여자는 줄곧 과묵했지만, 그래도 자살 희망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삶의 의지가 있다면 어련히 잘 따라올 것이다.

남은 건…….

이세는 울리는 발소리를 듣고 눈으로 먼 곳을 더듬었다.

유일하게 걸림돌처럼 거추장스러운 인간.

그자가 털레털레 걸어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우리 X 됐는데?”

이제껏 기울인 모든 노력이 물거품처럼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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