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211화 (211/264)

211화

211. 탐색의 서반(3)

“잠깐 둘이서 얘기하지.”

이세는 주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직감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이 자가 하는 말이 심상치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기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들려줄지 어떨지는 자신이 먼저 듣고 결정해야 한다고. 기껏 사기 유지를 위해 안심시켜둔 것이 무효로 돌아가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어어 하며 끄는 대로 끌려가는 주인. 마음만 먹으면 버틸 수 있을 법한데도 순순히 끌려 나왔다. 당황하거나,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심히 방관하는 세 사람의 시선을 뒤로하며.

그렇게 세 사람과 떨어진 곳에 이르자 이세가 말했다.

“무슨 일이야. 또 무슨 개소리를 듣고 와서 이러는데?”

평소였다면 말 좀 곱게 하라고 타박했을 타이밍. 그러나 주인은 아무런 지적 없이 본론을 입에 담았다.

“우리 이미 첫 턴 뺏긴 것 같아.”

“첫 턴을 뺏겨?”

첫 번째 ‘낮’의 투표는 종료되었다. 당장으로선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고. 그걸 두 눈 뜨고 본 주인이 첫 턴이라는 말을 썼다면, 필시 다른 것을 염두에 두었을 터.

바로 그리디거트의 통제권.

그리고 그것을 빼앗겼다는 것은…….

그 거대 괴수를 둘러싼 통제권 쟁탈전에서, 상대 기사가 앞서나갔다는 의미다.

이세의 머릿속을 슬금슬금 잠식하는 불안. 그러나 주인은 터럭만큼의 긴장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 빼빼 마른 아저씨랑 이래저래 이야기하다 보니 알겠더라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나와 대화를 나눴다는 거 자체가 중요한 단서 아니겠어?”

“너와 대화를 나눴다는 거 자체……?”

여기까지 말한 이세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까부터 얼간이나 앵무새처럼 상대의 말만 흉내 내는 꼴이다. 그것도 내심 보통 정신 나간 부류가 아니라 단정 지었던 자를 상대로.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다. 다소 나사 빠진 부분이 있을지언정 이토록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니.

역으로,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면 이러는가 싶기도 하지만.

주인은 그 치고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세스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너는 이 상황이 어떻게 느껴져?”

이세는 극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가장 상식적이지 않은 인간이 잘도 상식을 논한다고.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다만 어떤 의도로 던진 질문일지 고찰해보다가, 그조차 관두었다.

낮의 임무 수행과 투표전으로 밤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 한시 빨리 결론을, 그것도 핵심만 간추린 결론을 듣고 싶었다.

“시간 없다. 요점만 말해.”

“그건 처음부터 말했잖아. 첫 턴 뺏긴 것 같다니까.”

“아니,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뭐냐고?”

데굴. 오른쪽 대각선 방향을 짧게 바라본 주인은, 순식간에 기승전결을 정리했다.

“멸치아저씨가아무것도안하고탱자탱자놀면서나랑노닥거리기만한건밤에당할위험이없어서그렇게느긋할수있었던게아닐까하고난생각했어.”

“…내가 잘못했다. 다시 말해줘.”

주인이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텍스트로 치면 띄어쓰기가 들어간 양식으로.

그 말을 곰곰이 반추한 이세는, 제법 그럴싸한 의견이라 판단했다.

‘일리가 있어. 목숨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었으니 그런 태평한 모습도 가능하겠지. 이놈처럼 그냥 맛이 간 인간이라면 몰라도, 정상적인 인간은 대개 그런 보험을 준비하고 나서야 여유를 부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일견 설득력 있는 가설에도 빈틈은 있다. 이세는 그 틈새를 찔렀다.

“네 의견이 맞다면 이상한데. 놈들이 모종의 수단으로 그리디거트의 통제권을 얻었다고 쳐. 그런데 자기네들만 그 조건을 만족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적들은 아군 기사가 누군지,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당연하다. 아군도 적에 관한 정보는 깜깜하니까.

그러니 아군 기사의 특성을, ‘밤’에만 변신 스택을― 여기서는 그리디거트의 통제권을 쥘 수 있다는 제약도 모를 수밖에.

의문은 여기 있다. 정신머리가 알맞은 곳에 박힌 인간이라면, 적들도 슬며시 칼을 빼 들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품을 것이다.

그런 것 하나 없이, 그저 단순하게 ‘우리가 먼저 통제권 얻었다! 이겼다! 4부 끝!’ 같이 단세포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상대의 지능지수가 일제히 급락하여, 아메바와 자웅을 겨룰 수준이 되지 않는 한.

‘만에 하나, 이 자칭 우주인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면 모를까… 응?’

돌연 이세의 눈길이 의심으로 차올랐다.

“너냐?”

“아니.”

“정말 네가 가르쳐준 거 아냐?”

“아니래도. 그 아저씨랑은 그냥 지구 온난화를 비롯해서 대한민국 부동산 문제, 남녀갈등의 원인, 차이와 차별의 기준,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소득과 분배 같은 이야기만 나눴어.”

지면에서 발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비현실성. 이세는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초면인 인간들끼리, 그것도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끼리 이런 심오하고 학구적인 주제로 환담했다는 것이.

그러나 둘러대는 것치고는 묘하게 이놈이 나눌 법한 대화라는 생각도 들고, 내용도 구체적이다. 최소한 아군 전력에 관한 정보를 노출하진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현실 감각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됐고. 네 말만 들어선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놈들도 마냥 안심할 처지가 아닐 텐데, 지들 안전은 이미 보장된 것처럼 구는 이유가 뭐냐? 짐작 가는 게 있어?”

“이건 내 개인적인 추측인데―”

주인은 그런 밑밥을 깔아두고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했다.

이쪽은 아직 저쪽이 보유한 자원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적들이 남몰래 얻어둔 자원을 바탕으로 이미 이쪽의 기사를 특정하고, 특성마저 알아냈다면 어떨까?

이세는 그 가설을 완강히 반박했다.

“말도 안 된다. 어느 자원이든, 체인질링의 정체를 식별하는 것들은 발동할 때 너무 눈에 띄어. 그런 것들을 썼으면 우리가 못 봤을 리 없지.”

대표적으로, ‘판독기’가 그러하고 ‘진실의 오망성’이 그러하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자원들도 쉬이 숨길 수 없는 시인성(視認性)을 갖기는 마찬가지.

주인이 굽히지 않고 보강 가설을 내세웠다.

“사용하는 모습을 감추는 자원을 병행해서 썼다면?”

“그건 더 이상하지. 지난 투표전을 잊었나? 놈들은 벌써 ‘두 번째 기회’와 ‘정치 9단’을 얻었어. 그와 별개로 탐색에 특화된 자원과, 은신에 특화된 자원까지 추가로 얻었다고?”

이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것들을 얻기란 턱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자원 획득 창구가 주교라는 단일 역할군으로 한정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집사의 설명을 들은 바, 주교 역할군은 표식을 획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홀로 표식을 식별하는 능력을 겸비한다.

이 말인즉, 다른 사람이 표식을 발견하여 주교 역할군을 맡은 자에게 알려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의미.

즉, 자원을 얻는 과정이 다른 때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주인은 이세의 설명을 듣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는 잘 모르니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이러면 상대편이 믿는 구석이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 분명 여유로운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야.”

“글쎄다.”

이세는 한동안 골머리를 썩인 끝에, 색다른 가설을 구성했다.

“기사와 그리디거트 사이에 어떤… 일종의 링크가 형성되어 있는 건 아닌가?”

“엥?”

이세가 내세운 가설은 이러했다.

기사와 그리디거트. 둘 다 에를쾨니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니 어느 한 쪽이 통제권을 얻는 순간, 다른 기사의 통제권 획득 여부도 판별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그러나 이 가설 역시 부정당했다.

“그렇지 않아. 상대 기사가 통제권을 얻었는지 아닌지는 별도의 수단 없이 판별할 수 없어.”

“확실한 건가?”

“적어도 내가 아는 규칙상으론.”

이세는 미덥지 못한 눈길로 주인을 보았지만, 곧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러나저러나 아군 진영에 들어온 협력자. 고의로 거짓말을 하거나 독이 되는 조언을 하진 않을 터.

이런 논박을 거듭하던 중, 불현듯 떠오르는 마지막 가설.

아군에게도 적들에게도 드리운 제약. 그 무수한 제약을 뚫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특전?’

만약 놈들에게도 특전이 주어졌다 가정하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오로지 소수의 선택 받은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이제껏 출시된 스킬과 아이템의 범주를 벗어난 특별한 힘을, 아군만 독점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세가 경험하고 목격한 특전들은, 하나같이 게임의 판도를 뒤흔들 만큼 강력하면서도 중복되는 것을 찾기 힘든 독특함을 자랑했다.

상대가 그중 어느 것을 손에 쥐고 있다면, 놈들이 보인 자신감은 뿌리 없는 나무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죄다 가설에 가정일 뿐이야.’

추측과 추리란, 현실에 일어난 현상을 머릿속 공상과 억지로 끼워 맞추는 과정. 그 행위란 마치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퍼즐을 만드는 것과 흡사하다.

어둠 속에서 집어 든 퍼즐 조각. 그것을 어느 자리에 가져가도, 도무지 알맞은 곳이라는 확신은 없다. 전혀 끼워지지 않거나, 억지로 욱여넣어 조각이 망가지는 일도 빈번하다.

그렇게 꾸역꾸역 퍼즐을 완성시킨다 한들, 과연 봐줄 만한 형태를 갖추고 있을 것인가?

이세는 단 한 가지만 기억해두기로 했다.

“일단 이번 밤은 놈들의 공세가 올 거라 생각해야겠군. 그게 안전할 테니까.”

“그렇지. 유비무환이란 말도 있으니.”

우우우우웅―

때맞춰, 기나긴 경적 같은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깜박거리는 조명. 1분 후에 다가올 밤을 알리는 자명종과 같다.

킬 더 킹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밤. 아마 지금껏 겪은 어느 밤과도 다를 어둠과 핏빛의 시간.

그들은 서둘러 나머지 일행과 합류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적의 기사가 벌써 칼을 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점. 그에 따른 대비 태세를 갖춰두기 위해.

사람이 할 일을 끝냈으니, 남은 건 하늘의 뜻에 달렸다.

도무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미지 앞에서, 불식간에 어둠이 엄습했다.

[Nighttime : 30:00]

* * *

새까만 어둠이 빛을 지워냈다. 일행은 그 속에 갇혀 숨죽인 채 기다렸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하연이 불안한 듯 속삭였다.

“역시 이번 밤은 적들의 것일까요.”

집사가 억눌린 목소리를 내었다.

“다들 조용히.”

줄곧 있는 듯 없는 듯 굴었던 양배추 여자가 날카로운 음색으로 읊조렸다.

이세는 숨을 내쉬고 긴장의 끈을 다잡았다.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속으로 되뇌며.

침착해라.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허락된 것은 헤매고,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억측을 쌓아 올리는 것뿐. 아군의 사정이 그렇듯, 적 또한 그러할지니.

다만 자문한다.

당면한 일을 감내할 준비가 되었는가?

“…….”

자문에 자답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밤이 개막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쿵!

지면을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일행의 몸이 가늘게 튀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하연이 딸꾹질처럼 중얼거렸다.

“저 소리 설마…….”

―쿠웅!

다시 들려왔다. 방금보다 더 컸다. 연속해서 조금씩 커진다.

“…아무래도 발소리 같은데.”

주인이 잡담을 나누듯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상대편 기사가 먼저 고삐를 채운 것 같네.”

“이런 시발.”

이세가 못 참고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번만큼은 깐깐한 집사도 품위를 따지지 않았다.

쿠르릉, 발소리는 땅을 울리며 점점 가까워져 왔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몬스터처럼 현실감 없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다가오는 발소리에는 말 그대로 듣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압감이 가득했다.

게임 시작 직후, 규칙을 설명하던 악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유념하시길. 그리디거트의 탐색 역량, 추적 능력, 맷집 등은 그 어떤 체인질링과도 비교를 불허할 만치 압도적입니다.]

중립 세력, 그리디거트가 기존의 체인질링과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란 것은 익히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정도의 괴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놈에게 반격 비슷한 짓이라도 한 것이, 기껏 스턴건을 한쪽 눈에 박아넣은 것이었으니까.

이제 머지않아 진정한 위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몹시 달갑지 않게도.

“…거의 다 온… 것 같은데…요?”

하연이 벌벌 떨었다. 발소리만으로도 지진이 일어난 듯 선체 내부가 흔들리고 미세한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졌다.

“…모두 대기. 지금 있는 자리에서 대응할 겁니다. 다들 준비하세요.”

이세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느껴졌다. 몸집 육중한 거체가 움직이며 자아내는 공기의 흔들림.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열량. 그것을 통틀어, 압도적인 존재감 자체가.

―쿵! 쿵! 쿵!

그리디거트.

―쿠웅!

놈이.

―크오아아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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