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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223화 (223/264)

223화

223. 모략의 중반(10)

하연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쓰라린 고통 같기도, 환희의 감정 같기도 한 것이 하연의 가슴 속에서 울렁였다. 하연은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세는 갑자기 주저앉은 하연을 부축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연 씨? 무슨 일입니까?”

하연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중증 호흡기 환자처럼 헐떡이던 하연은, 이내 세차게 머리를 털었다.

감각 동조는 직전까지 유지되었다. 특전의 지속 시간 동안, 하연은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된 게임의 처음과 끝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연은 보았다.

상대편 기사가 처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그 결과에 망연자실하여 넋이 나간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것을.

마침내 하연은 이세를 돌아보았다.

“이세 씨.”

“예. 괜찮으십니까?”

“상대가 졌어요.”

“예?”

“선공 기회… 그러니까 그리디거트의 통제권이, 주인이에게 주어졌어요.”

“아.”

다른 말이 더 필요 없었다. 이세는 곧바로 시간을 체크했다.

[Nighttime : 21:32]

이세는 어리석지 않았다. 하연이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게임 실황 중계를 통해, 주인이 어떤 의도로 미니 게임을 질질 끌었는지 곧장 눈치챘다.

양측 기사가 벌인 통제권 쟁탈전. 그 여파로 1/3 남짓 날아간 밤.

이런 상황에서 아군 기사가 그리디거트의 고삐를 최대한 움켜쥔다면, 적은 한없이 졸아붙은 시간에 쫓기게 된다. 그마저도 아군 기사가 휘두르는 칼끝에서 살아남은 다음의 이야기.

그리고, 적에게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밤에 노려야 할 표적은 상대측 기사야. 왕을 죽이는 게 최선이지만, 왕은 아무래도 방어가 굳건할 거란 말이지.’

이세는 묘수풀이를 하듯 게임의 향방을 읽었다.

상대측 기사를 제거하면, 적은 아군을 직접 공격할 능력을 상실한다. 남은 건 투표전인데, 하필이면 투표전에서의 우위를 보장하는 ‘정치 9단’ 소유자가 상대측 기사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번 밤에 상대측 기사를 처치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아군의 손실을 예방하는 동시에, 다음에 올 낮에 상대편 왕을 퇴출할 수 있다는 것.

체크메이트.

이세는 확신했다. 주인에게 뜻을 전달할 방도는 없었지만, 주인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들을, 누군가가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 * *

“하아, 하아.”

같은 시각, 체인질링은 패닉에 빠져 허둥지둥 달리고 있었다.

이성적인 계산은 아니었다. 구분하자면, 본능에 가까운 도주였다. 그러나 깊은 사고를 거치지 않은 행동이라도 때로 적합할 때가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달아나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조금이라도, 한 발자국이라도 더, 그 공포스러운 적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그녀가 달음박질치는 공간은 기괴하면서도 음울했다. 일렁이는 촉수, 만들어지다 만 눈동자가 깜박거리는가 하면, 크고 작은 이빨이 돋아난 입들이 곳곳에서 하품하듯 쩍 벌어지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이곳의 본질은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냥터. 도망치는 사냥감을 여흥처럼 쫓다가 숨통을 끊어내면 그만인 유희의 장소.

이 순간에도 사냥터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쫓고 쫓기는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것뿐.

한 번도 사냥꾼의 입장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그녀에게, 그 관계의 역전은 어마어마한 공포를 안기는 것이었다.

도망쳐 달리는 동안 귀 안쪽에서 계속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마치 그리디거트, 그 끔찍한 괴물이 바로 등 뒤에서 아가리를 헐떡이는 듯한 감각에 진저리가 났다. 공포와 절망에서 자신의 호흡이 얕고 빨라지는 것을 체감했다.

거칠게 지나가는 공기 흐름 속에, 문득 속삭임 같은 것이 녹아들었다.

‘도망쳐.’

직접 듣는 것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의 기억.

게임이 끝나고, 충격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그림자는 속삭였다.

‘실컷 도망쳐. 내가 잡을 수 없을 거라 믿으면서, 전력을 다해 도망쳐. 내가 따라잡기 전까지, 목덜미가 붙잡히는 그 순간까지, 굶주린 이빨이 다가오는 걸 볼 때까지, 계속.’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이다.

혹여 소리를 듣고 괴물이 따라올까 두려운 그녀에겐 흐느끼듯 억누른 신음만 허락되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스아아악.

날카로운 칼끝이 가느다란 비단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

얇고 작았으나,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소음.

그 소리는 복도를 타고 흐르며 이곳저곳을 맴돌기 시작했으며, 눈에 띄지 않는 음지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그녀는 시시각각 엄습하는 공포에 숨을 헐떡였다. 달리는 도중에 어둠 속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시선.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땅을 박차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한 공기 중에, 공허한 침묵이 나풀나풀 덧씌워졌다.

그렇게 긴장감 가득한 침묵이 맴돌고 있을 때…….

―스아악.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는 것처럼.

소리 죽여 걷는 고양이의 발놀림처럼.

너무나 작기에 그 움직임의 근원도, 그 실체도 보이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면 위에서 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들어보면, 옆에서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 소리에 방향성이 없다는 것을, 바꿔 말해 모든 곳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얼마 안 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스아아악.

공간 전체를 점유하고 누비는 양,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가.

흐르는 액체가 경사를 타고 고이듯, 한 장소로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소리가 모여드는 곳을 따라, 먹물 같은 어둠이 스멀스멀 허공에 번져 나왔다. 마치 투명한 물이 든 컵에 잉크를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어둠을 어둡게 물들이는 암흑이 그곳에 있었다. 빛의 흡수율이 99.9%를 넘는 반타 블랙조차 이에 비하면 무색해질 듯했다.

“히익.”

처음으로, 그녀는 두려움을 육성으로 토해냈다.

한없이 삿되고 어두운 그림자는 어느새 정면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모든 방향에 검고 거대한 급류가 넘실거렸다.

새카만 어둠 표면에 천천히 유동이 일었다.

뻗어나온 것은 팔이었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커다란 팔.

뒤이어, 형태가 갖추어졌다.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손. 바위도 쉽사리 집어들 장대한 손바닥. 기다란 팔엔 세 단계로 굽어지는 관절이 있었다.

다음은 입이었다.

입.

혀는 없고, 오로지 날카로운 이빨들만이 돋아 여닫히는, 커다랗고 기형적인 입술이 쩍 벌어졌다.

어둠이 으르렁거림을 섞어, 말했다.

[잡았다.]

후웅! 거칠게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앞발이 먹잇감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비좁은 복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격이었다.

―쿠르르르르릉!

그녀가 서 있던 공간이 지진이 일어난 양 격렬하게 흔들렸다. 비장의 아이템, ‘초강력 자석’을 이용한 급속 회피가 아니었다면 무너진 콘크리트와 함께 곤죽이 됐을 것이다. 파편에 휩쓸려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어둠 그 자체가 형상화된 듯한 괴물과는 거리가 벌어졌다.

그림자에 감싸인 괴수가 포효했다. 좌우 여백이 전에 비해 탁 트인 복도는 거대한 덩치로도 추적을 용이하게 했다. 애초에 물리적인 장벽 자체가 그리 의미 없기도 하다.

―쿠릉! 콰르릉!

그러나 연신 내리찍는 주먹과 철퇴처럼 휘두르는 손톱이 번번이 허탕을 친다. 그 모습에 그녀는 필사적인 도주 와중에도 작은 희망을 품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나?!’

거대 괴수를 조종하는 동안에는 몸의 감각이 예전 같을 수 없다. 그리디거트를 통제하는 적의 기사는 아직 몸에 달라붙은 초강력 자석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면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걸지도.

비장의 수가 통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는 얼마간 침착을 회복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초강력 자석이 발하는 막대한 척력에 도주가 성사되리라고.

그녀는 적의 공격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또 한 번,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 다람쥐가 숨어든 나무를 통째로 요절내는 불곰과 같은 기세였다.

엄폐물을 벗겨낸 적은 곧장 다음 공격을 개시했다. 공중에서 내리꽂는 수백 개의 작살. 장궁 부대가 일제 사격을 퍼붓듯, 그녀 주위로 어둠의 창날이 수두룩 빽빽하게 꽂혔다.

“꺄아아아!”

개중 두 개의 작살이 그녀의 등줄기와 하완(下腕)을 스쳤다. 그녀는 자신의 출혈이 믿기지 않았다. 그제야 공격 방식에 변화를 넣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란, 너무나 막대한 질량을 백분 활용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초강력 자석이 척력을 발하는 지점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그리디거트의 입. 다른 하나는 그녀의 복부 어림. 이 두 곳이 자석이 있는 위치인 탓이다.

그러나 적은 입을 제외한 신체 부위를 액체처럼 변형시켜, 자석의 영향권 밖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녀가 아는 한, 이런 터무니없는 힘은 일반적인 사도에겐 불가능하다. 오직 킬 더 킹에서만 가능한, 강대한 그리디거트와의 융합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그녀조차 이런 식의 활용은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적의 말도 안 되는 기예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꾸르륵.

주위를 창살처럼 에워싼 그림자 작살들에 일제히 눈꺼풀이 생겼다. 죽 찢어진 살갗이 빠끔 열리고, 안구가 드러났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눈동자들이 거의 동시에 초점을 일치시켰다.

[거기 있구나.]

수백 개에 달하는 안구의 직시를 받은 그녀는 진저리치며 두 번째 비상수단을 발동했다. 설마하니 쓸 일이 있을까 싶었던 자원. 그러나 지금 쓰지 않으면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판국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손전등’.

스위치를 올린 순간, 폭발적인 빛의 격류가 어둠을 휩쓸었다. 배터리를 신경 쓰지 않고 조도를 최대로 끌어올려, 밝기는 3000루멘을 넘어섰다. 환한 대낮에 봐도 일시적인 시야 방해를 일으킬 초 고광량은 그림자를 무기로 삼는 체인질링에게 특히 효과적이었다.

더군다나 수백 개의 안구로 그 빛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끄어어어어!]

눈 달린 작살의 형태였던 그림자들이 일시에 붕괴했다. 본신에 직접 타격을 입자 신체 변형을 제어할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도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고, 상대 기사는 가까스로 몇 개의 그림자를 붕괴 직전에서 엉성하게나마 회복시켰다.

아까처럼 작살이 아닌, 밤송이와 흡사한 모습. 실시간으로 크기가 부풀어가고 있다.

아이템, ‘별침’과 ‘바이스 트랩’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어둠으로 뭉쳐진 밤송이들은 그녀의 도주 경로를 가로막는 곳에 배치되는 중이었다.

‘그거에 당하고도, 내가 어디로 갈지 예상하고 막아둔다고?’

이는 강렬한 빛에 직격되는 순간, 눈에 보인 모든 물체의 위치를 기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인 대처 방안을 짜내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었고. 본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라기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다.

그녀는 추가적인 출혈을 각오했다.

즉, 발등까지 뚫고 들어오는 가시를 밟고, 얼굴을 비롯한 주요 장기를 가린 두 팔이 엉망으로 난자당하며, 그러고도 가리지 못한 부분이 찔리고 찢어지는 것을 주저 없이 해냈다.

피맛을 본 가시들이 전율했다. 눈먼 짐승은 상처 입은 사냥감이 이곳으로 이동했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그녀는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살상지대를 벗어난 대가로, 뜀박질은 꿈도 못 꿀 지경이 되었으니.

숨 가쁘게 달아나던 그녀는, 결사의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정말 마지막까지 아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최후의 패’를 꺼내 들며.

그녀가 자세를 잡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 괴물도 사방에 흩어진 몸뚱이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블랙홀처럼 소용돌이치는 중심으로 응집하는 듯한 광경.

영원한 밤의 가호를 받는 괴물이 서서히 윤곽을 갖춰갔다.

그녀 또한 깊고 긴 호흡으로 결전의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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