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탈출, 그리고(2)>
우르르릉, 무너지고 기울어져 가는 선체.
끼기기긱,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가 선명하다. 어디선가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펑펑 터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불꽃과 스파크가 반딧불이처럼 어둠에서 깜박였다.
실로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대치가 이어졌다.
“내가 너희를 배려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자신이 방금 죽인 시체를 발끝으로 쿡 찌르며, 새하얀 여자가 말했다.
“같은 팀이었던 너희가, 이제 와서 두 명이나 버려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그래서 내가 기꺼이 군식구 한 명을 줄여준 거야. 이러면 너희의 부담도 좀 덜어지겠지?”
허울 좋은 협박의 마무리는 이러했다.
“내가 너희를 배려한 만큼 이번엔 너희 차례야. 너희끼리 잘 의논해서 다수를 위해 희생할 하나를 선정해줘. 시간이 많이 촉박하니까… 그래, 3분 내로.”
새하얀 여자에게서 거리를 둔 넷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킬 더 킹. 그 기이한 게임에서 살아남았는데, 졸지에 인기투표 내지는 기여도 평가나 하게 생긴 네 명.
최초로 나온 의견은 전제 자체의 부정이었다.
“저 사람, 거짓말하는 거 아닐까요?”
하연의 논지에 따르면 마약 따윈 블러핑이었다. 구명보트에 타기 위해 주워섬긴 헛소리일 뿐. 그냥 무시하고 우리 갈 길 가면 어떻겠냐는 결론을 제시했다.
회의적이기는 이세도 마찬가지였다.
“저 말이 맞다 쳐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게임 시작 전에 마약들을 흩뿌렸다고 했죠. 하지만 게임 시작 후 이루어진 구조 변경을 감안하면, 저 여자가 기억하는 위치가 맞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꺼낸 신중론의 밑바탕엔 거부감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협업을 이루고 목숨을 내맡겼던 사이 아니던가. 그 관계를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파탄 내기란 심리적 장벽이 높았다.
의견을 나누는 사이, 어느덧 모두의 코 안쪽에서 신경이 타는 듯 알싸한 냄새가 맴돌았다.
기분 탓인지, 괜히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정말 마약 성분이 연기에 섞여 있는가. 아니면 선입견에 의한 플라시보 효과인가.
다음 발언자는 의외로 진세라였다.
“무시하지. 무시하고, 우리 갈 길 가.”
“네? 그, 그래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자신 있었다. 사방에 즐비한 죽음을 돌파하여 생로를 찾아낼 자신이.
무엇보다 이 상황에 대한 기시감과, 그로써 비롯된 후회가 있었다.
‘더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각오를 다진 그녀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인간의 후각 수용체는 최대로 잡아도 4백 종 안팎. 후각이 주특기인 동물이 보기엔, 없는 것보다 나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특수한 강화 처치를 받은 그녀는, 후각 수용체의 가짓수는 물론이거니와 그 조합에 대한 민감성을 함께 끌어 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엄습하는 후각. 치닫는 두통.
공기 중에 섞인 다종다양한 성분들이 호흡기로 빨려 들어와 후각수용체를 자극하고, 그것들이 제각각의 정보로 가공되었다.
일반인에겐 어림도 없는 일. 평범한 사람은 기껏해야 탄내를 맡는 것이 고작일 공기에서, 그녀는 후각 정보의 결을 나누고, 보이지 않는 함정들을 무수히 건너뛰는 경로를 찾아냈다.
삶으로 나아가는, 희미하게 열린 틈새를.
“이쪽으로.”
그녀는 단 한마디를 남기고 앞장섰다.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는 건 세 사람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여자는 기가 막힌 얼굴로 메스를 옆머리에 대고 빙글, 돌렸다.
“벌써 약 기운에 정신이 나갔나? 그렇게 무턱대고 간다고 답이 나올 것 같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본래 같은 일행이었던 세 사람은 일말의 의심이 있을지언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졸지에 버려지고 만 새하얀 여자가 ‘어디 가냐고!’ 하며 황급히 그들을 뒤쫓았다.
가장 후미에 선 주인이 물었다.
“님은 왜 따라오심?”
“너희 중 누가 죽는 거 구경하려고. 그래야 내가 탈 자리가 나지.”
“한결같은 혐성. 리스펙합니다.”
“닥쳐.”
그들과 거리를 둔 하연이 뒤를 힐끗거리며 진세라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렇게 따라오게 해도 괜찮을까요? 가는 길에 아무도 죽지 않으면, 우리 중에 누구 죽일 사람 같은데요.”
진세라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시도하지 않는 한 손대지 않을 거예요.”
“시도하면?”
“그 순간 물고기밥 되는 거고.”
“아.”
그 후의 이동은 미궁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가는 테세우스를 연상케 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복잡한 지형 속에서, 진세라는 막힘 없이 길을 골랐다. 따라가는 이들은 이게 맞나 싶었으나, 별 대안이 없었기에 그 뒷모습을 쫓기만 했다.
불안한 탈출 도중에, 파국은 누군가가 도미노를 쓰러뜨린 듯 연쇄적으로 덮쳐왔다.
퍼어어엉!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후방 구획에서 확 번지는 화염. 흡사 진홍색 화염을 꽉 채운 풍선이 터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서슬에 어둡던 통로가 강렬한 빛과 그림자로 갈라졌다.
“숙여요!”
앞장 서던 진세라가 이세와 하연의 머리를 확 누르며 자세를 낮췄다.
“으윽.”
“아윽.”
미처 대비하지 못한 주인과 새하얀 여자가 동시에 신음을 토했다. 엉겁결에 두 팔을 들어 올렸으나, 열파와 충격파에 수천 조각으로 박살 난 유리를 완전히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나마 급소를 지킨 것이 다행일까.
대가로 두 팔에 잔뜩 짓무른 화상을 입고, 물집을 죄다 터뜨리는 유리조각에 난자당했지만.
주인이 엉망이 된 두 팔을 내려다보며 한탄했다.
“친구야, 너 만나기 진짜 힘들드아.”
뒤이어, 쏴아아아― 세차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귀를 때렸다. 일렁이는 화염과 폭발음 속에서도 선명한 것이, 소방용 호스를 백 개쯤 틀어 물을 내뿜는 것 같았다.
이세가 진세라의 손바닥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어딘가에서 침수가 시작됐나 봅니다.”
“그렇겠지.”
다른 손아귀에 붙잡힌 하연이 진저리를 쳤다.
“새삼스럽게 뭘. 빨리 나가기나 하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가 침수와 침몰은 좌현과 선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내부의 통로도 점점 좌현과 선미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 하필 일행이 향하는 곳은 선수 방향인지라, 그들은 점점 경사가 급해지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그마저도 이동 중에 더욱 가팔라졌다. 선박 자체가 50도 가까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통에, 단순히 걷는 행위가 놀이터 미끄럼틀을 올라가는 듯한 고행이 되었다. 계단은 숫제 사다리처럼 보일 지경.
‘지랄도 작작 좀―’
이세가 속으로 욕지기를 되뇔 차였다.
콰아아앙!
이제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굉음이 울렸다. 다음 순간, 왼쪽의 풍경이 엄청난 기세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중력의 방향 자체가 틀어진 것 같았다. 배가 완전히 기울어진 것이라고, 이세가 상황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굴러떨어지는 중이었다.
“……!”
무방비로 추락하려던 순간, 간신히 측면에 덜렁덜렁 열린 문짝을 잡고 버텼다. 이세가 무심코 발아래를 보니, 수만 가지 자잘한 물체들이 화산의 중심부 같은 저편의 화염으로 쓸려 내려가는 참이었다.
경사로 위쪽에서 하연이 외쳤다.
“이세 씨! 피해요!”
뭘 피하라는 건지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이세는 한껏 고개를 틀어 쐐애액! 하며 낙하하는 무언가를 피했다.
그 뒤에도 우르르, 우박이 쏟아지는 소리. 이세는 잡다한 낙하물에 얻어맞지 않도록 납작 몸을 움츠렸다. 피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만, 치명상은 가까스로 면하며.
붕괴가 심화된다. 구조가 뒤틀리며 고정이 헐거워진 배관이며 문짝이며 소변기까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파른 비탈길 추락에 합류하고 있다.
그중 이세의 생명줄을 끊은 것은 식당의 마스코트였다.
이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상황에 안 맞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합성수지 인형. 쉐프 복장을 한 그것이 데굴데굴 굴러 와, 이세가 붙잡고 있던 문짝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우지끈― 가뜩이나 헐겁던 나사와 경첩에 무리가 갔다. 문짝의 고정축이 속절없이 분리되며, 이세의 자세도 덩달아 불안정해졌다.
“오우야.”
그보다 아래쪽에 있던 주인이 눈을 끔벅거렸다. 문짝에 충돌하고 마저 낙하 운동을 이어간 마스코트가 저승길 가는 마지막 인사를 하듯 팔다리를 흔들며 사라졌다. 주인도 마주 손을 흔들어 무생물과의 작별 인사를 고했다.
어기영차, 하며 스포츠 클라이밍을 하듯 기어오른 주인이 이세 옆에 이르렀다.
“그거 재밌어 보인다.”
“…그딴 말 할 시간에 좀 도와주면 안 되나?”
“안 될 거 없지 예아.”
“위험해!”
하연이 비명처럼 경고한 순간, 옆에서 파공성이 울렸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뒤를 이었다.
돌아본 그들의 눈에, 새하얀 여자가 혀를 차는 모습이 보였다. 옆으로 흩뿌린 오른손엔 갖고 있던 메스가 보이지 않았다.
저 위편에서, 진세라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녀 역시 오른손을 아래로 겨냥한 채였다.
“꿈도 꾸지 마.”
새하얀 여자의 암살 시도와, 그를 저지한 진세라.
상황을 이해한 이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이대로 호락호락 보내줄 것 같아?”
새하얀 여자가 입술을 짓씹으며 하는 말. 표독스러운 안색에 짙은 독기가 도사렸다. 게임도 다 끝난 마당에, 집착의 이유가 무엇일까. 이세는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죽이면, 남은 세 명이 퍽이나 당신을 구명보트에 태워주겠습니까? 정 살고 싶다면, 차라리 구명조끼나 찾으러 가는 게 현실적일 텐데요.”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이대로 너희를 전부 내보내면 분명 그놈이…….”
빠악!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위에서 전력투구로 내리꽂힌 투사체가 새하얀 여자의 이마를 강타하는 소리였다.
아득바득 바닥의 돌출부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맥없이 풀어졌다. 두개골을 통째로 함몰시킬 작정으로 던진 투사체의 충격에, 새하얀 여자는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떨어졌다.
푸학! 새로운 제물을 받아먹은 불꽃이 혀를 날름거렸다.
결정타를 날린 진세라가 무심하게 말했다.
“물고기 밥 신세는 면하겠군. 이만 가죠.”
“어, 네.”
아까보다 한층 말없이 움직이는 일행.
주인이 이세를 끌어올리고, 진세라가 하연을 끌어올리며, 그들은 느린 속도로나마 경사로를 극복해갔다.
다 깨진 창문의 창틀을 붙잡고 몸을 끌어올렸을 때, 마침내 은은한 달빛이 내리는 밤하늘이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옷자락을 나부끼고.
수면에 영롱하게 부서지는 별빛이 춤추고.
매캐한 탄내와 피비린내가 아닌, 싱그러운 바다 내음이 코를 적셨다.
그렇게 네 사람은 잠시, 바깥의 정취를 만끽했다.
“세상에…….”
하연이 아연실색한 목소리를 냈다.
검푸른 하늘 밑에서 크루즈선 마린 블루스 호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마치 작살을 맞고 떠오른 거대한 고래 같은 몰골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세라가 손짓했다.
“저쪽에, 저거.”
일견 커다란 하얀색 원통으로만 보이는 그것. 구명보트가 들어있는 보관함이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표면에는 단 두 개뿐인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1. 안전핀을 뽑으십시오.]
[2. 투하 레버를 앞으로 당기십시오.]
주인이 뼈다귀를 본 개처럼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내가 해봐도 될까?”
뭐라 하기도 지친 듯한 허락이 떨어졌다.
“빨리 하기나 해라.”
녹슨 안전핀을 뽑고 T자형 레버를 잡고 당기니, 보관함을 지지하던 고정대가 풀려났다. 데굴데굴 굴러간 원통이 해수면에 부딪히자, 달걀 깨지는 모양새로 내용물을 뱉어냈다.
그러고 나니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하연이 멀미가 난다는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어, 음. 꽤 높네요?”
“번지 점프. 인생 살면서 꼭 한 번쯤 해볼 경험이라죠.”
주인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어푸어푸 희한한 자세로 헤엄친 그가 구명보트에 오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연이 울상을 지었다.
“저 고소공포증 있는데. 그렇다고 안 뛸 수도 없고. 뛰자니 또 무섭고…….”
“억지로 뛰지 않아도 됩니다.”
네? 하연의 반문에 이세는 말없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가리켰다. 그 속에서 깜박깜박 빛나는 별 아닌 별들. 사람이 만들어낸 별자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수평선 남쪽에서 날아온 첫 번째 헬기 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