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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253화 (253/264)

253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8)>

|D ― 3|

작별이 남긴 후유증을 가라앉히고 사람 다니는 거리로 나왔다.

해 뜨는 방향을 보니, 어렴풋한 가시권이 물결처럼 서쪽으로 확장하는 중이었다. 비가 그친 것도 아니고 내리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날씨. 가물거리는 햇살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숨을 뱉었다.

내 나머지 인생의 첫날 아침이 밝아온다.

인도와 인접한 어느 차량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권이세의 나른한 얼굴이 나타났다.

까딱이는 손짓.

“타.”

뒷좌석에 앉고 안전벨트를 매자 차가 출발했다.

창밖을 보는 동안 차는 순식간에 주유소 하나와 세 개의 편의점을 지났다. 이는 속도가 빨라서라기보다, 한정된 토지에 여러 건물이 과도하게 들어선 까닭이었다.

저 멀리에, 고고하게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언젠가였나. 가족들과 함께 날 좋은 날을 골라 한강 둔치로 나들이를 갈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한 번을 못 갔다.

이젠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차는 얼마 안 가 굼벵이 같은 속도로 기어가기에 이르렀다. 벌써부터 미어터지면 어쩌자는 거지. 차선이 하나라도 적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싶다.

“만났나?”

권이세가 주어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생략된 자리에 들어갈 인물이 누구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만났어.”

“그렇군.”

잠시 뜸을 들이던 권이세가 묻지도 않은 말들을 주워섬겼다.

차량 대기 시점과 장소를 선정한 게 ET라는 것. 같은 차를 타고 왔으나, 내가 차에 오른 다음에는 기다리지 말고 출발하라고 요청했다는 것. 마지막까지 나를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다는 것.

수많은 감회가 북받쳤지만.

“……그래.”

나는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때, 운전을 맡던 사람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그분이세요?”

“네?”

그분이 누구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를 누군가와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 페이스리스에요?”

나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이름을 쓰기도 했네요. 네.”

“와! 살아있는 전설! 체인질링의 악몽! 단 50명에게만 허락된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생존마!”

나는 낯 뜨거운 수식어에 볼을 긁적였다. 가감 없는 사실이긴 했지만, 예전엔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들으면 민망할 뿐이다.

“하연 씨, 진정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후우― 하며 심호흡을 하는 운전자.

겉보기엔 20대 초반의 대학생 같은데, 어떤 연유로 부잣집 도련님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하니 권이세의 개인 취향이 반영된 건가?

내 마음을 읽은 듯, 권이세가 운전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설하연 씨. 내 개인 경호원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경호원?”

“그래. X 같은 것들이 허튼수작 부리기 전에 차단하거나, 허튼수작하면 스물세 배로 갚아주는 직업이지.”

대뜸 경호원이라는 직업의 자의적인 정의를 설명하는 권이세.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새삼 운전자를 다시 관찰했다. 잔뜩 상기된 얼굴. 힘이 과하게 들어가 뻣뻣하게 굳은 어깨. ‘나 긴장했어요’를 이토록 알기 쉽게 내보이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다.

이런 사람이 경호원이라고? 선입견으로 사람을 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영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호원이라고 하면 보통 쳐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위압하는 부리부리한 눈빛, 때려도 내 손이 아플 것 같은 탄탄하고 듬직한 체형의 소유자들 아닌가.

생각이야 어쨌든, 나는 간단하게 나 자신을 소개했다.

“대강 들으신 모양이지만, 이서희에요. 저쪽, 권이세하고는 모 병원에서 어쩌다 알게 됐고요.”

소개를 들은 설하연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설하연이고요. 저도 어쩌다 보니까 약 한 달 전부터 이세 씨의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권이세의 설명과 본인의 정체성이 합치한다.

“한 달…….”

머릿속에서 뭔가가 착착 맞아떨어졌다. 아, 그렇게 된 건가.

“예전에 무슨 아이디를 쓰셨어요?”

“하하. 충격왕 쇼킹이라고,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응?”

설하연은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려다 주춤했다.

“제가 데드 체이스 유저였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이세 씨가 알려줬나요?”

권이세와 나는 동시에 부정했다.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원래 저런 놈입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우리의 대답은 설하연의 이해를 돕지 못했다. 네……? 하는 얼빠진 표정을 불러왔을 뿐.

언제나 그렇듯, 보고자 하면 단서는 드러나는 법이다.

과거, 권이세의 부친인 권이중 씨가 한 제안. 경호원이라는 직무에 어울리지 않는 외양. 그리고 권이세가 말려드는 재앙의 특수한 성질을 고려하면, 어렵잖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

설하연은, 내가 예전에 보류한 제안을 받아들인 인물이다.

설하연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내가 자신에 대해 파악한 것을 놀라워했으나, 나 또한 그녀에게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충격왕 쇼킹?”

이건 이것대로 충격이다.

“5대왕 중 두 명이 여기 있네요.”

“네? 두 명?”

“충격왕 쇼킹에 은신왕 클로킹이 같이 있잖아요.”

“은신왕 클로킹이요? 그게 어디…….”

말하던 중 옆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설하연. 이에 대비되게, 권이세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아무 말 없이 창밖 경치만 바라보았다.

보는 내가 더 무섭다.

“저기, 비도 오는데 정면 주시해주시면 안 될까요?”

결전의 장소로 가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죽으면 웃기지도 않은 희극이다. 내가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울지도 못할 비극일 테지.

“아, 네.”

내 주의를 듣고 다시 전방을 주시하는 설하연.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는 희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둘 사이에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는지, 내 알 바 아니다. 정황상 권이세가 감추던 사실을 내가 들춘 모양이지만, 그거야 둘이서 원만하게 해결할 문제지.

그래도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의외로 평범한 차를 가져왔네.”

우리가 타고 가는 차는 준중형 백색 세단이었다. 60초당 한 번꼴로 색상과 번호만 다른 쌍둥이를 찾아볼 수 있는 대중성과 무난함이 특징.

권이세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 리무진이나 람보르기니 같은 걸 타고 나왔어도 위화감이 없었을 텐데. 보기만 해도 으리으리한 차를 끌고 다니는 편이 도로의 정체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이에 권이세는 어색한 공기를 깨고 대꾸했다.

“너무 눈에 띄잖아. 불필요하게 관심 끌 이유 있나?”

설아연도 질세라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건 제가 몰기 부담스러워서요.”

과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서민의 정서에 친숙함이 느껴진다.

승차감은 나쁘지 않았으나, 설하연은 운전하는 것이 썩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양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이 그걸 놓치면 곧장 대형 사고가 일어날 거라 믿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이니 기본이 억 단위인 차를 모는 건 그 자체로 신경쇠약을 일으키기 십상이겠지.

문득, 차 속도가 이상하리만치 느려졌다는 걸 깨달았다.

권이세가 성가시다는 투로 내뱉었다.

“또 시위다. 미치겠군.”

“시위?”

반쯤 몸을 일으키자, 내 눈에도 앞에서 일어나는 이변이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대로변과 도로에 나와 행진하는 인파. 이들의 존재로 가뜩이나 아침 출근 시간대에 겹쳐 북적이던 도로 흐름이 급속도로 마비되었다.

미친 듯이 눌러대는 클랙슨. 시위대가 한 몸처럼 외치는 심판의 구호. 사이사이로 섞여드는 욕설과 고함.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는 혼잡이란. 창문으로 한 번 여과된 채로도 벌떼처럼 귀를 웅웅 울렸다.

권이세가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게 다 오른손잡이 당 그 병신 같은 새끼 때문이야.”

“오른손잡이 당?”

정치에 별 관심 없던 나는, 그것이 국내의 정치 정당 중 하나라는 것밖에 몰랐다. 이 정도만 해도 상위 20% 안에는 들지 않을까.

그러자 상위 0.1% 앞에 비비기에는 너무 초라한 지식이었다.

“저 시위, 뒤에서 김선달이라는 돼지가 조장한 거다.”

권이세는 내가 무관심한 영역에 관한 해박함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현 집권 여당인 왼손잡이 당을 견제하기 위해 이루어진 야당들의 오월동주. 사사건건 여당의 의견에 퇴짜를 놓고, 더러운 과거사를 폭로하고, 무능과 부패의 프레임을 씌우는 훌륭한 역할 분담.

이 과정에서 한 국회의원은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선동과 날조의 재능을.

“괴벨스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지. 탁월하다 못해 악마적이야. 문제는 그 새끼도 이 정도로 판이 커질 줄 몰랐다는 거지만.”

애초에 김선달이라는 이름에 뭘 바란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딴죽을 걸고 싶었지만, 그보다 시급한 질문이 있었다.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어?”

설하연이 대답했다.

“원래 안 막히면 20분이면 도착하는데, 차가 이렇게 막히니까 글쎄요. 넉넉잡아 1시간은 가야 할 것 같은데요.”

1시간이라. 카운트 다운이 2일이나 남았는데, 1시간 지연되는 것쯤 감내할 만했다.

잠깐 피곤한 눈이라도 붙일까 유혹이 생긴다. 그러나 나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아직 확정되지 않은 주제를 꺼냈다.

“그래서, 도와줄 거야?”

당연히 64빌딩까지 같이 가줄 거냐는 뜻이다.

알아듣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권이세는 빈정거렸다.

“지금 하고 있는 건 셈에 넣지도 않나?”

“감사합니다. 또 한 번 감사해도 되겠습니까, 선생님?”

“……조건이 있다.”

웃음기 싹 지운 눈동자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도 알겠지. 그때 그 여자가 64빌딩에 잡혀 있다는걸.”

나랑 통화할 때는 그때 만난 그놈이냐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때 그 여자다.

대명사에 이상한 집착이라도 있나? 우리가 무슨 볼드모트야?

그래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 만했다.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느닷없이 64빌딩으로 홀라당 납치당해버린 내 지인.

김슬기.

권이세는 내 생각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의 역할이 인질인지 공범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어. 그러니까 약속해라.”

“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정말 해야 할 일을 할 때에는, 망설이지 않겠다고. 전처럼 어설프게 물렁한 짓, 이번에는 용납할 수 없다.”

권이세가 슬기를 의심하는 거야 당연했다. 지난 게임의 막바지에서 호되게 데였으니까.

비록 내 기지와 슬기 본인의 실수로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그때 당했던 기억이 쉬이 잊힐 리가 있나. 슬기에게 체인질링의 본성이 남아있을 확률이 제로라 장담할 수 없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정도야 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약속했다.

일단 끌어들이면 그걸로 끝이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그만이고.

무엇보다.

권이세가 강조하지 않았어도, 이미 결심한 바였다.

내 확답을 받은 권이세는 미심쩍은 기색이었으나, 이내 실질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그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하지. 가진 거 다 까보자고.”

우리가 가진 패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걸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저걸 저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 패로 어떤 전략을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다른 변종 게임이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 않아요?”

“확실히. 킬 더 킹이나 그보다 엿 같은 게 나와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어차피 비슷한 재료로 돌려먹기 하는 거면 대충 그 범위도 한정적이지 않을까?”

섣불리 재단할 수 없는 돌발 변수에 대해서도 간단한 토의를 마쳤다.

의견 교류의 끝자락에서, 권이세는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까 네가 그랬지.”

“뭘 그래?”

“왜 이런 차를 끌고 나왔냐고.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세상에, 허락 안 받고 왔다고?”

“우리 꼰대한테 허락을……, 응?”

나는 대충 손을 휘저으며 말을 잘랐다.

“그렇겠지. 도와줘서 고마워.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무슨 비밀 여행이라도 가는 양, 허락도 안 받고 나왔다니.

권이세가 나를 돕는 이유는 모른다. 뭐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인간이, 가진 것도 누릴 것도 많은 인간이 왜 목숨까지 걸며 나를 돕는지.

정말 의외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타입인 걸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봐선,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문득 오한이 일었다.

설마?

“권이세.”

“왜.”

기분 탓일까. 나를 응시하는 눈이 어쩐지 토 쏠리도록 그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성 정체성이 확실하거든.”

“뭐……?”

“그 뭐냐. 미안하지만, 나는 그쪽 취향이 아니라 좀 그래. 도와준 건 참 고마운데, 음. 만약 그런 마음이라면 받아주기 어려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한동안 권이세는 빠진 턱을 끼우지 못했다.

빠진 턱을 가까스로 다물었을 때.

권이세는 고드름이 뚝뚝 떨어질 듯 차갑게 말했다.

“내려, 이 새끼야. 너 혼자 걸어가.”

어라. 이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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