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무대에 오른 이들(1)>
눈을 떴다.
붉은 조명이 내리쬐는 공간이다.
나는 작게 떨었다.
…실로 몇 개월 만에 돌아왔다.
심연과 같은 어둠을 두려워하고.
다시 핏빛의 낮이 돌아와도 안심할 수 없었던.
날카롭게 곤두선 오감과 배양된 경험이 합치되어, 고한다.
이전에도 많은 피가 흘렀고, 앞으로도 그 못지않게 피가 흐를 공간이라고.
넌 지금 그런 곳에 와 있노라고.
“윽.”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머리가 띵한 것을 느꼈다. 기립성 저혈압 같은 어지럼증. 나는 머리를 싸매며 어지럼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기억과 현실 사이의 간격. 전후 관계가 통째로 삭제된 듯한 감각. 이 엿 같은 데드 체이스에 휘말린 것이 장장 네 번째이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다음 찾아온 것은 목이 갑갑하다는 인식이었다.
한 손으로 텁텁 목 언저리를 더듬거리니, 묘한 이물감이 만져졌다. 목이 더 두꺼워진 것 같달까, 깁스 같은 것을 두른 느낌이다.
이게 뭘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하든, 일단 사람이 먼저다. 어느 정치인의 구호처럼 되뇌이고는 일행의 행방부터 찾아다니기로 했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이상, 무작정 걸을 수밖에.
목발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는 차에, 징―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
이 타이밍에 무슨 일인가.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종이비행기 형상의 아이콘이 새로운 메시지가 왔음을 표시했다.
그것을 누르자, 내용이 출력되었다.
―특전, ‘헛된 희망’을 획득하였습니다.
―정정. 체인질링 특전 ‘헛된 희망’이 생존자 특전 ‘불굴의 의지’로 변경되었습니다.
그 외에 있는 것이라곤 달랑 송신자의 이름과, 간략한 문장 한 줄.
‘My present. From ET.’
“…….”
나는 잠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네겐 아무리 고마움을 표해도 부족함을 느낀다.
ET가 전해준 특전은, 그 효용을 헤아리기 난해했다. 강력하다면 강력하고, 쓸모없다면 쓸모없을 수도 있는 기능. 지극히 제한된 상황이 조성되어야만 진가를 드러내는 특전이다.
어쨌든 당장으로선, 이걸 쓸 방법이 없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기하학적인 문양의 데코타일 위로 첫걸음을 떼었다.
언제나 그렇듯, 맨정신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흐른 피가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로테스크한 추상화로 변모시키고 있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살점 묻은 문짝을 지나, 수많은 살해와 파괴의 흔적으로 얼룩진 통로를 지났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하루에 수만 명이 오갔을 64빌딩.
이곳에 발을 들인 누구도, 이와 같은 악몽을 예상하지 못했겠지.
한때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했을 빌딩 내부는 폭동에 휩쓸린 폐허처럼 변했고, 무덤 같은 고요함과 음산함에 잠겨 있었다. 불길하고도 탁한 광채를 뿌리는 붉은빛은 딱 없는 것보단 나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묵묵히 걸었다. 발밑을 주의해야 했다. 복도가 오래도록 방치된 도로처럼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기 때문. 이 황폐하고 너덜너덜한 광경은 미친 맹수가 수백 마리는 풀려나 마구잡이로 난동을 피운 듯했다.
힐끗 시선을 돌리면, 생명 없는 무기물 덩어리들도 성한 것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키오스크 하나는 뿌리째 뽑혀 처량하게 나뒹굴었고, 비상연락망으로 쓰였던 듯한 유선 전화는 수화기에 핏빛 손자국만 남긴 채 몸통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살피며, 백지상태인 ‘맵’의 구조를 조금씩 파악해나갔다. 마치 빈칸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문장을 완성하는 퀴즈처럼,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받아들였다. 그나마 눈이 보일 때 끝마쳐야 할 일이다.
그때 마주 걸어오는 두 명이 보였다.
“조수, 저기 보게! 사람이야!”
“탐정님, 저도 눈이 달려 있습니다.”
꽤 독특한 2인조였다.
트렌치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불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남자와, 개성 자체가 말소된 듯한 특색 없는 남자의 조합.
창작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탐정과 조수의 조합처럼 보였으나, 현실에서 보자니 위화감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고 보면 이제껏 만난 인간군상 중에서도 이색적인 유형이다.
탐정이라 불린 이가 조수라고 부른 쪽에 호통쳤다.
“앞에 명을 붙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난 그냥 탐정이 아니라 명탐정이라고! 이 두 호칭은 자판기 커피와 엘 인제르토 커피 사이의 격차만큼 크다네!”
“네, 그러시겠죠.”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떠들어대는 두 사람. 나는 미약한 호기심을 느꼈다.
내가 알기로, 테러 예고 이후로 자진하여 64빌딩에 들어온 것은 우리 일행 넷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줄곧 초현실적인 인질극의 희생양으로 붙잡힌 신세였을 터.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떨고.
인체가 창의적이다 못해 역겹게 활용되는 것을 목격하고.
사태가 끝날 거라는 기약도 없이, 공포와 무기력함을 견뎌왔을 이들.
요컨대, 내가 느끼는 호기심은 이것이다.
그런 이들이 과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것인가?
정신 나간 탐정 놀이에 몰입한 꼴을 보자니, 글쎄. 적잖은 회의가 들었으나, 나는 게임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플레이어들이라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세 명분의 다리가 멈췄다. 각자가 생각하는,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 계산. 그 합의점에 도달한 것이다.
다시 보니 탐정이 입에 문 것은 담배가 아니었다. 한때 막대 사탕이었던 것을, 알맹이가 사라진 채로 물고 있는 것일 뿐. 공갈 젖꼭지를 빨던 버릇이 남아있는 것일까.
탐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네도! 자네도 그걸 달고 있군!”
“그거요?”
“목걸이 말일세!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는가! 참으로 사고가 둔한 인간이로고!”
나는 가만히 목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그곳에 자리한, 차갑고 단단한 감촉.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탐정과 조수, 두 사람도 목에 두꺼운 철제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거울이 없어 몰랐는데, 일정 간격으로 붉게 점멸하는 램프가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대중매체에서 자주 나오는, 폭탄 목걸이 같은 형상.
‘저게 내 목에도 채워져 있단 말이지.’
실제 활용법이 뭔진 몰라도, 이로운 작용을 할 것 같진 않다. 일단 숨 쉬는 것부터 조금 답답한걸.
처음 겪는 상황에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잠시.
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혹시 두 분께선 다른 사람 못 보셨나요?”
“많았지! 아주 많았어! 그런데 갑자기 다 사라졌어! 벽에, 바닥에, 천장에, 그리고 커다란 짐승의 입으로 꿀꺽꿀꺽 사라지더군!”
그리고선 파하하! 느닷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탐정.
“자네도 사라지나? 어떻게 사라지나? 아, 내 앞에서 그러진 말게.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거든. 절대로 아니지, 암!”
눈동자에 언뜻 스쳐 가는 광증. 그동안 눈동자에 무엇을 담았는지 몰라도, 뒤쪽의 뇌가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것이었나 보다.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이 탐정 구실을 못하니 다른 쪽에 기대를 걸며 시선을 돌리자, 조수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쪽으로 오는 길엔 없었지. 그렇게 묻는 걸 보니 너도 우리와 만날 때까지 다른 사람을 못 본 건가.”
“아, 네.”
어째 조수와 탐정의 역할이 바뀐 게 아닌가. 그런 감상을 품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탐정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런데 자네는 대관절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이 밀실에서, 무슨 마법처럼 말이야!”
“그냥 저쪽에서 걸어왔는데요.”
정직하게 답했지만, 원래 진실은 탄압받기 마련이었다. 탐정은 발작 버튼이 눌린 것처럼 흥분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거짓말거짓말거짓말! 이 새빨간 거짓말쟁이 같으니! 다른 모두는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독수리처럼 진실을 보는 내 눈만큼은 속이지 못한다!”
독수리가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썩은 고기일 텐데. 나는 엇나간 생각을 떠올리며 조수를 돌아보았다.
“이분, 원래 이래요?”
“몰라.”
아니, 조수라며 당신은 왜 몰라. 조수 맞나? 그렇게 무관심할 거면 왜 같이 다니는데?
이대로 가면 밑도 끝도 없는 소모전이 될 거란 사실은 명확했다. 나는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이들과 갈라서서 일행과 합류하는 데 시간을 쓸지.
아니면 이왕 얽힌 것, 동행을 제안할지.
그러나 게임이 중후반부에 접어들었으면 모를까, 처음 만난 이들을 무시하고 가는 건 하책일 것이다. 정치질이 필수인 게임에서 초반 인간관계로부터 얻는 이득은 가볍지 않다.
작게는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것이고.
크게는 이들과의 피아식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발을 내빼려고 해도 쉽지 않을 거라는 점도 있겠지만. 내 허약한 몸뚱이에 드잡이질은 영 상성이 맞지 않다.
나는 광인의 논리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역시 추리력이 대단하시네요. 사실 그냥 걸어온 게 아니라, 특수한 방법을 썼거든요.”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옮기는 일반적인 방법 대신, 목발까지 병행하는 특수한 보법을 썼지.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잘못 볼 리가 없다고! 자네의 소매에 묻은 먼지! 신발의 상태! 그 관상까지! 이 모든 단서들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네!”
이렇게 떠들어대는 탐정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지난 번의 광대 괴물과는 다른 의미로, 감정 낙차의 폭이 크다. 끓는 점이 낮은 수준이 아니라 제멋대로 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잘못 건드리면 매우 성가신 부류였다.
나는 머리 안쪽이 간질거리는 듯했다. 이런 인간에게도 알맞은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 쓰임새가 무엇인지는 아직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우선 이동을 재개하는 쪽으로 유도할까.
“그런데 여기 저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한번 둘러보는 게 어떨까요? 다른 수상한 사람을 발견할지도 몰라요.”
“다, 다른 사람? 용의자가 또 있어? 조수, 저 말이 참말인가?”
옷을 제외하면, 아무리 봐도 이쪽이 탐정 같은 조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지요. 저 말에 따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안내하게! 당장 안내해! 어디 그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낯짝들을 확인해보자고!”
그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낯짝들은 동행을 시작하고 1분 후에 확인되었다.
“꺄악!”
“당신들 뭐야!”
같은 디자인, 다른 색의 티셔츠를 입은 남녀가 있었다. 나이는 대략 대학생쯤으로 비슷해 보였고, 서로 부둥켜안은 모습을 보아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선입견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금단의 사랑이라는 소재까지 떠올릴 수 있겠으나, 그건 너무 나간 거겠지.
엎어진 캐비닛 뒤에 벌벌 떨고 있던 이들을 발견한 것은 탐정이었다. 딱히 놀라운 추리력을 발휘했다기보다, 저마다 다른 시야각을 커버하는 와중에, 어설프게 숨어 있던 커플이 공교롭게도 탐정의 눈에 띈 것에 가깝다.
탐정은 이들을 보자마자 일갈했다.
“공범! 공범이로군! 공범이라서 그렇게들 붙어있는 거지?!”
“뭐라는 거야, 미친 인간이!”
“나는 이미 축복받은 지성으로 사건의 전말을 꿰뚫었다네! 순순히 자백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야! 조수, 당장 이들을 포박하게!”
“나비매듭으로 묶을까요, 8자 매듭으로 묶을까요?”
“저리 가요! 다가오지 말라고요!”
나는 괴상하고 평범한 4인조의 아웅다웅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기이한 일이다. 초반에 만난 네 사람이 개성의 차이는 현격할지언정, 연속해서 2인조라니.
이번엔 대체 어떤 인간들이 모인 걸까.
내 경험을 돌이켜보면, 인원 선발은 완전한 무작위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게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출신 배경, 성격, 사전 인간관계 등이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단합은 어렵고 분열은 쉬운 인적 구성이라고 할까. 게임이 너무 일방적이면 재미없기에, 눈깔 괴물은 대부분 발암 전개를 위한 암덩이들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참가자로 편성한다.
그렇기에 초반에는 이 인간 암덩이들을 조기에 식별하고, 게임 진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치워두거나 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를 치우고 누구를 회유할지는, 조금 더 지켜보고 결정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