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11화 (10/1,001)

제 11화

4화. 열 살이 되기까지(3)

루나와 진은 열아홉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시론과 로사의 열세 자식 중 첫째와 막내인 만큼, 당연한 일이다.

보통 그만한 나이 차가 있는 막냇동생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귀여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생의 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러운 루나의 방문이 반갑기보단, 당황스럽기만 했다.

‘괜히 부담스럽군. 첫째 누님께서 다른 형제들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긴 있나?’

기억을 급히 더듬어 보아도, 그런 적은 없다.

세인들 사이에서 루나의 이명은 백경白鯨.

신화 속의 ‘흰 고래’처럼 고고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붙여진 이명이었다. 흰 고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 그녀의 무리 짓지 않는 성격도 반영된 것이다.

“첫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첫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쾅쾅 박수를 쳐 대던 수호기사들이 뛰쳐나가 소리쳤다.

아직 그녀는 성내로 들어오지 않았으나, 식탁에 모인 하인들도 벌써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려가서 누님을 맞이하자, 유모.”

길리 역시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 가문에서 루나를 만나는 건 극히 드문 일인 만큼, 긴장한 것이다.

“아, 예. 도련님.”

진과 루나가 마주친 건 중앙 홀이었다. 선택 의식 이후 처음 보는 첫째 누님이다.

빛나는 은발, 백옥 같은 살결, 그리고……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깊은 눈동자.

루나의 눈동자엔 형용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다. 평생 검의 제왕에 다가서며, 무수한 강자를 벤 인간들만이 지닌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하자 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이 최강에 가까운 인간의 시선인가…….’

그러나 언제까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녀가 무라칸이 깨어난 걸 눈치 채고 찾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어떻게 머리를 굴려야 할까.

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루나가 곁에 모인 수호기사들의 자세를 풀어 주었다.

“많이 컸구나, 막내야.”

담담하고 건조한 목소리. 도저히 8년 만에 만난 늦둥이 막내를 향하기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은 그 건조한 목소리 속에 섞인 희미한 호의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안심하긴 이른 호의지만 말이다.

“기별을 주셨다면, 조금 더 단정한 차림으로 누님을 뵈었을 텐데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귀여운 이야길 하는구나. 동생 보는데 기별까지 넣을 필요 있겠느냐?”

루나가 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생엔 대화조차 몇 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첫째 누님이, 지금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니……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체 왜?’

‘왜?’

‘왜 이러시지?’

순식간에 그런 의문이 겹쳐 지나갔다.

오히려 시론이 찾아왔을 땐 모든 것이 예측대로 흘러갔는데, 왜인지 루나는 읽을 길이 없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읽기 어렵다고 해서 생각을 멈출 필요는 없다. 루나가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한들, 결국 아직 스물여덟 아가씨에 불과하다.

반면 진은 도합 37년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괜히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맞아요. 누님께서 룬칸델의 땅을 밟는데, 그럴 필욘 없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누님이 조금 낯설게 느껴져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곤두섭니다.”

진을 쓰다듬던 루나의 손길이 멎었다. 진의 맹랑한 이야길 들은 길리가 화들짝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곁에 있던 수호기사들도 두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곁에 모인 이들이 두 남매가 주고받는 시선을 느끼며 잔뜩 긴장했다.

“마음이…… 곤두선다?”

“예, 누님.”

“그건 곧, 내가 거북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거북하진 않습니다. 다만, 저는 누님을 처음 뵙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또다시 정적.

그러나 루나의 분위기가 묘했다.

수호기사와 유모는 당연히 그녀가 분노할 줄 알았으나, 그 반대였다. 그녀의 깊은 진청색 눈동자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씁쓸함.

루나의 표정에 언뜻 드러나는 것은, 그런 감정들이었다.

“……그래, 내가 배려가 부족했군. 아직 어리다 할지라도, 막내 네가 룬칸델이라는 걸 내 잠시 잊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진 또한 그녀의 반응이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룬칸델.

이 거대한 검술명가는 결코 형제들끼리 우애를 쌓고, 때로 희생하며, 응원해 주는 집안이 아니다.

서로 견제하고, 빼앗고, 짓밟는 것이야말로 룬칸델의 가풍인 것이다. 때문에 루나는 진의 이야길 듣고, 자신을 진이 ‘장애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루나가 지금 슬픈 눈빛을 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이유였다.

“자네들은 잠시 물러…… 아니, 진. 내가 잠시 네 수호기사들과 유모를 물려도 되겠느냐?”

루나가 몸을 낮춰 진과 눈높이를 맞췄다. 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수호기사들과 길리가 중앙 홀을 빠져나갔다.

진은 아직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었으나, 나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나의 가장 어린 동생아.”

“예, 누님.”

“내 갑작스레 너를 찾아온 것은…… 네게 해 줄 말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네 생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진이 표정에 드리워진 경계를 다소 풀었다.

“어떤 말씀을……?”

“아버지를 비롯해, 형제들 모두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를 보니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룬칸델의 모두가 진을 주목하고 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작년에 시론이 폭풍성을 찾은 이유가, 단지 막내아들을 한 번 살펴보기 위해서라는 게 가문에서 정설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은 선택 의식에서도 바리사다를 골랐으니 주목받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제가 폭풍성을 떠난 순간부터, 다른 형제들이 저를 견제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루나가 등에 걸친 도끼검, 크란텔을 바닥에 내려 두었다. 쿵! 조심스레 내려놓았는데도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네가 나를 경계한 이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진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루나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막내야.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가족 간의 더러운 싸움에 끼어들어 행복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큰누님이, 평소 이런 생각을 하고 사셨다는 말인가? 가주가 되기 위해 혈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루나는 형제들 중 가장 강한 만큼, 원한다면 언제든 조슈아의 차기 가주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문의 혈투에선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니, 지금 하는 말이 아주 뜬금없는 이야긴 아니다. 다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놀라울 뿐.

그러나 진으로선 약간 반발심이 드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형제끼리의 싸움에 희생되는 게 싫었다면, 전생에선 왜 언질 한 번 주지 않았지?’

그건 그런 이야길 해 줄 가치도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형제들이 진을 아예 경쟁 대상으로도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문득 그런 문장이 떠올랐으나,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루나 누님.”

“말해 보거라.”

“더없이 고마운 말씀이지만, 저는 싸움에서 빠질 생각이 없습니다.”

단호하지만 공손한 말투였다.

“나는 진심이다. 네가 장차 나를 위협할까 봐 걱정되어 하는 말이 아니야.”

“그건 저도 느끼고 있어요, 누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진심이에요. 설마 다른 형제들이 저를 걱정할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럼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누님께선 모르시겠지만.”

진이 한 차례 깊이 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한 차례의 암살 시도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내용이에요. 길리도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겁니다.”

정확히는 암살 시도가 아니라, 저주이지만. ‘날붙이의 미망’이라는 저주는 룬칸델의 일원에겐 죽음보다 더한 것이니 틀린 말이 아니다.

“감히!”

쿠르르!

루나가 소리치자 그녀의 몸에서부터 오러의 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몇 초쯤 회오리를 일으킨 오러 때문에 중앙 홀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릴 지경이었다.

“감히 이 폭풍성에서, 너를 죽이려던 형제가 있었단 말이냐! 누구냐, 토나 녀석들의 짓이더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루나가 자신을 위해 이토록 진노하는 걸 보니 어쩐지 가슴 한쪽이 찡해지는 진이었다.

“말씀드릴 수 없다기보다는, 모른다는 쪽이 더 맞겠지만요.”

“하아!”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루나는 이미 막냇동생이 가문의 더러운 싸움, 늪에 빠진 상태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루나가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자, 진이 조심스레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모든 형제가 다 저를 미워하는 건 아니라고. 오늘 누님 덕에 깨닫게 되어 무척 기쁜 마음입니다.”

“진. 동생아. 나는, 너무 슬프구나.”

설마 흰 고래, 루나 룬칸델이 이렇게 여린 사람이었을 줄이야.

진에게 그녀는 더 이상 무시무시한 9성 기사가 아니라, 그저 슬픈 일에 괴로워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 * *

루나는 이후 두 시간을 더 머물고 폭풍성을 떠났다. 진의 황량한 생일 파티는 그녀가 더해져 조금 더 밝은 분위기가 되었다.

‘첫째 누님에게 그런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어.’

진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루나가 남기고 간 생일 선물이었다.

‘딱 한 번,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이 보석을 깨라고 하셨지.’

펜던트에 박힌 푸른 보석을 깨면 딱 한 번, 루나가 곧장 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언젠가 루나가 마족 하나를 베고 얻은 아티팩트였다.

“오. 꼬마, 목에 그거! 설마 마수왕 오르갈의 물건이냐? 맞네! 캬, 귀한 생일 선물을 받았구먼. 천 년 전, 그거 얻겠다고 목숨 버린 왕들이 수십은 될 거다.”

“마수왕 오르갈이 누군데?”

“있어. 내 시대에 활동했던 대단한 마족이지. 이 몸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아까 그 강대한 기운의 주인공이 준 것일 테니, 목숨 하나를 얻은 셈이로구나. 축하한다, 꼬마.”

무라칸은 펜던트의 효능을 알고 있었다.

“좋은 물건인 줄은 나도 알겠지만, 무라칸. 강대한 기운이라고? 그런 걸 느끼고 있었어?”

“그럼, 인마. 내가 힘은 많이 잃었어도, 용인데. 누구였냐? 처음엔 네 아버지가 아닐까 짐작했다만, 내 존재를 눈치 채고도 그냥 간 걸 보니 아닌 것 같군.”

“뭐? 잠깐. 첫째 누님이 네 존재를 눈치 챘을 거라고?”

진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하하, 그 기운의 주인공이 누나였어? 하여간 미친 가문인 건 여전하군. 난 여차하면 너 데리고 튈 생각까지 하고 있었거든.”

“허.”

“뭐, 오르갈의 펜던트를 준 걸 보니 네 누이가 우리를 가문에 일러바칠 것 같지도 않고. 여러모로 잘됐네.”

“누님이 눈감아 주시려나.”

“사과파이 백 개 건다. 그렇게 쩨쩨한 인간이라면, 그 펜던트를 줬을 리 없다. 좋은 누나를 뒀군. 부럽다, 이 자식아. 반면 내 누이는…….”

무라칸이 제 누이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진은 행여 루나가 무라칸의 존재를 가문에 알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루나가 남긴 말을 떠올리자 금세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나만 기억해라, 진. 내 동생아.’

‘네가 무엇을 하든, 무엇이 되던. 나는 늘 너를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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