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7화. 변신, 들통
안절부절.
안절, 부절…….
가짜들에 이어, 새로 진을 호위하게 된 흑왕단은 왠지 모르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유타의 마법사들은 따로 산을 내려갔으니, 이 무시무시한 꼬마를 수행하는 건 오롯이 그들의 몫이었다.
‘무슨 열 살이 저래?’
3군 부대장, 무르카를 비롯해 흑왕단 전원이 같은 마음이었다.
흑왕단! 피와 살과 뼈가 뭉쳐 산과 강을 이루는, 전장의 역전 용사들.
그런 그들에게 사로잡은 적을 처벌하는 끔찍한 장면은 일상이나 다름이 없다. 진이 길리를 시켜 가짜 제롬과 홀츠를 죽인 것쯤은, 새삼 살벌할 일도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흑왕단이 살살 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나이 때문이었다.
자객 앞에서 그토록 대범한 열 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룬칸델이라 할지라도, 이제 갓 폭풍성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일 뿐인데.
심지어 길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진에겐 묘한 위엄마저 서려 있었다. 태도와 언행은 물론이고, 적에 대한 처분마저 도무지 열 살의 그것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흑왕단이 목격한 진은 그야말로 룬칸델의 어린 제왕이었다.
“이동 관문까지 수행하는 동안, 한 치의 빈틈도 없어야 한다. 경박한 언행도 금지다. 다들 알겠나?”
“예, 무르카 부대장.”
거칠기로 소문난 흑왕단의 용병들이 품격 가득한 신사처럼 행동하고 있다. 불편한 옷을 입은 듯, 다소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단지 진이 룬칸델의 무서운 꼬마로 느껴져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진이라는 위험한 꼬마에게 매료된 것이다.
“도련님.”
한창 눈밭을 헤치며 걷는 중, 길리가 진을 불렀다. 담담한 말투와 표정이지만, 진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침울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두어 시간만 더 가면 마을입니다. 거기서 눈이 그치길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진이 어깨에 싸인 눈덩이들을 털어 냈다.
“그리고 길리.”
“예, 도련님.”
“호위에 대한 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네 실수가 아니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칸조차 제롬과 홀츠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길리가 어떻게 파악한단 말인가.
수호기사들의 호위 원칙을 진이 먼저 알려 준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적어도 진은 그렇게 여겼으나, 길리는 제 실수를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대답을 듣자, 옛 기억이 떠오른 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길리는 변명하지 않는다.
폭풍성에서 10년이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 잠시 감을 잃었다든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감각이 무뎌졌다든가 하는 식의.
‘전생에선…… 길리의 이런 성격 때문에 참 미안하고 괴로웠지.’
회귀 전 룬칸델에서 늘 변함없이 진을 아껴 준 단 한 사람이, 바로 길리다. 그녀는 쫓겨난 진 때문에 비참한 신세가 되고도 진을 원망하지 않았다.
7성의 오러가 봉인된 채, 진과 같이 룬칸델에서 추방당한 그 순간에도. 길리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본가 복귀 후 어떤 벌도 달게 받겠…….”
“그만.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 명령이야.”
길리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너는 내 유모이기도 하지만, 현재 유일한 수호기사이기도 해. 그런 네가 사소한 실수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라면 내 호위에도 문제가 생겨. 같은 말이 또 나오지 않으면 좋겠군.”
길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속상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생은 자신이 유모를 지켜 줄 차례였다. 때론 냉정하더라도, 따뜻한 성품이 혹독한 현실보다 앞서는 일이 없도록. 진이 그녀를 잘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시정하겠습니다, 도련님.”
길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녀는 진이 자신을 배려해 냉담하게 말한 걸 모르지 않았다.
‘이렇게 총명한 도련님이, 하필 나같이 둔한 사람을 유모로 두게 되다니. 오늘처럼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늘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도련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자! 속으로 다짐한 길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소 안심이 된 진은 암살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가짜 제롬과 홀츠.
놈들은 지플의 ‘극렬 추종 세력’이고, 그야말로 완벽한 변장술을 이용해 폭풍성의 모두를 속였다.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변신’은 용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고, 그마저도 타인을 완벽히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암살자들은 어떻게 그리 감쪽같은 모습이었나.
룬칸델 본가는 진짜 제롬과 홀츠가 당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미텔에 주둔하고 있던 흑왕단을 파견하고 놈들의 정체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아마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지플의 추종 세력은 바퀴벌레만큼이나 우글거렸다. 그들을 모두 범인으로 지목해 죽이는 건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려운 일.
또한 진이 습격 사실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고, 수배를 내리는 것도 룬칸델의 평판에 문제가 된다.
결국, 룬칸델은 늘 그래 왔듯 ‘본보기’로 다른 지플 추종 세력 일부를 처단해 공포감을 조성할 것이다.
하지만 진은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
‘부바르 가스톤.’
정확히는, 범인이 아니라… 범인을 변장시킨 인물, 부바르 가스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변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인물은, 진이 알기로 오직 그자 하나였다.
부바르는 진이 스물이 될 무렵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 ‘변신 범죄’를 끝내기 위해 비먼트 제국 특임대가 10년간 끈질기게 놈을 추적한 결과였다.
진이 한동안 부바르의 변신 범죄가 온 세상 소식지에 가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모두가 부바르를 알았지만, 현재는 오직 회귀자인 진만이 알고 있다.
‘완전 변신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부바르는 아군으로 포섭해 써먹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이 고개를 저었다.
‘비먼트 지하감옥에서도 자신은 예술가라며, 헛소리만 해댄 정신 나간 놈이었다는데. 웬만하면 처리하는 쪽이 낫지. 무엇보다 내게 칼을 들이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부바르는 세계에 혼란만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혼란을 위한 혼란, 그게 부바르가 추구하는 예술성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진이었다.
다행인 점은, 부바르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 진은 그가 일반인인 척 오랫동안 꾸려온 ‘조각 공방’의 위치도 기억하고 있었다.
“곧 도착이오. 혹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내 부하들에게 이야기하시오.”
일행이 마을에 도착하자 쨍한 아침 해가 떴다.
진은 여관에서 수프와 달걀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각종 수련을 해 왔어도, 몇 시간이나 혹설 속을 걷는 건 어린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 * *
“냐아옹.”
“냐아.”
“냐앙!”
1790년 11월 2일의 오후 세 시. 정오까지 쏟아지던 폭설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고,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울고 있다.
고양이는 진이 잠들어 있는 여관의 3층 창문에 붙어 울었다. 앙증맞은 앞발을 들어 콕콕 창문을 두들기기도 했는데, 쾌활하고 호기심 많은 여느 고양이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으음.”
진이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비적댔다. 몇 시간 푹 잤더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개운했다.
“냐앗. 냐!”
이제 고양이는 두 앞발로 격하게 창문을 벅벅 긁고 있었다. 어서 들여보내 달라는 듯.
풉.
그 모습을 보니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저 귀여운 고양이의 정체가, 위대한 흑룡 무라칸이라는 사실을.
‘미친…… 귀엽긴 하네.’
조금만 놀려 볼까?
장난기가 발동했다. 진이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머리맡에 있는 따뜻한 물을 들이켜려는 찰나.
캬학! 캬하아악!
무라칸이 미친 듯이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진은 뒷감당이 피곤할 것 같아 장난을 포기하고 창문을 열어 주었다.
“아, 알겠어. 알겠다고.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퍼펑!
무라칸이 순식간에 인간 모습으로 변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쿵! 묵직한 소리가 난 순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길리가 동시에 방으로 들어섰다.
“도련님!”
스랑!
그녀는 무라칸을 보자마자 클로를 꺼냈다. 서슬 퍼런 오러까지 덧씌운 채였다.
‘망했다. 세상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난감해진, 예상치 못하게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닥뜨린… 진과 무라칸이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길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쓰러진 무라칸에게 올라타, 그의 목에 클로를 겨누고 이렇게 속삭였다.
“누가 보냈느냐, 바른대로 말해라. 네놈을 천 갈래로 찢어발기기 전에……!”
그녀는 무라칸을 자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주 완벽하게.
그 모습을 지켜본 진은 가슴에서부터 무언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이를테면, 영혼 같은 것이.
“기, 길리.”
“물러서십시오, 도련님! 극도로 훈련된 암살자입니다. 인기척도 없이……!”
진이 자는 내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길리가 인기척을 못 느낀 게 당연하다. 방금 전까지, 무라칸은 고양이였으니까.
짧은 순간, 진이 이 불의의 사태를 유연하게 넘길 온갖 변명을 떠올렸으나.
답이 있을 리 없다.
‘틀렸어. 이건 무마가 불가능해.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후우!
진이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길리. 그자는 암살자가 아니야. 클로를 거둬.”
길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까지 그녀의 완력에 팔이 거꾸로 꺾여 있던 무라칸은 겨우 끅끅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련님. 그럼 이자는…….”
“그리고 정중히 사과한 다음, 예를 갖춰. 그는 룬칸델의 수호자, 흑룡 무라칸이다.”
길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볼품없이 널브러져 끅끅대는 남자가, 어떻게 위대한 흑룡 무라칸일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팔 조금 꺾은 게 아직도 괴로운 듯,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무라칸이 이토록 힘들어하고 있는 건, 길리에게 제압당해서가 아니라 변신의 부작용이지만. 길리가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부작용에 대해선 아직 진도 듣지 못했으니.
이내 진의 눈빛을 살핀 길리는 묵묵히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룬칸델의 하찮은 권속이 감히 수호자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크흐윽…….”
무라칸이 몸을 뒤집으며 빤히 길리를 올려다보았다.
“용서한다… 나의 딸기파이여.”
딸기파이!
그 단어를 들은 순간, 길리는 도련님이 왜 그토록 딸기파이에 미쳐 있던 건지. 명상을 하겠다고 폭풍성 뒷마당 굴을 갈 때마다, 왜 그토록 많은 딸기파이를 챙겨 갔던 건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휘이잉……!
열린 창문으로 한 줄기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세 사람은 한동안 정적 속에서 민망한 시선만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길리.”
“예…… 도련님.”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테니, 문 좀 닫고 올래?”
끼익.
길리가 문을 닫자, 진이 폭풍성에서 보낸 지난날의 여러 비밀스러운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회귀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비전서 필사와 솔더렛의 계약자임은 밝혔다.
의외로, 길리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어쩐지 설레는 듯, 종종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공범이다. 무라칸이 깨어났다는 사실도, 그와 내 관계도. 아직 가문에 알려져선 안 돼.”
“앞으로 잘 부탁해, 딸기파이.”
룬칸델 비공식 3인조가 결성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