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화
21화. 테싱 지하 경매(1)
제트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아킨에 처음 온 게 확실한 이 풋내기들이 갑자기 미쳐 버린 걸까? 그래도 손님은 손님이니, 우선 교양 있게 대처하기로 결정했다.
“손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하하, 아무리 손님이라도 난데없이 욕지거리를 하면 곤란… 커헙!”
으득.
눈 깜짝할 새 접근한 무라칸의 레프트 펀치에 갈빗대가 나갔다. 반사적으로 헛숨이 삼켜졌고,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발꿈치 내려찍기 후속타에 어깨 근육이 파열되었다.
두 귀에 이어 두 눈도 의심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나, 나는 5성인데?’
그저 그런 양아치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제트도 한때는 용병단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5성 기사는 보통 어디 가서 무력하게 두들겨 맞을 일이 드물다. 고로 제트는 실로 오랜만에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는 셈이었다.
“무라칸 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여관 주인이 죽겠어요!”
“죽이려고 그러는 것이다, 딸기파이여. 이 쓰레기가 음료에 독을 탔느니라.”
다행히 제트는 눈치가 빠르고, 태세 전환에 거부감이 없으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인물이다. 이럴 때는 당장 납작 엎드려 잘못을 비는 게 상책이라는 걸 잘 안다는 뜻.
“그게, 칵, 커헉, 웁!”
물론 무라칸은 제트가 사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구타를 이어 갔다. 입으로는 하찮은 미물, 쓰레기, 죽일 놈 등의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있으나 참으로 무미건조한 표정이다.
바로 그 점이 제트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제트 놈, 보기 좋군.’
전생의 악연이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니 내장까지 고소해지는 기분.
그러나 써먹을 일이 많은 놈이다. 이쯤에서 말리지 않으면 제트는 곧 싸늘한 주검이 될 것이다.
“무라칸, 그만해.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자고.”
“몰래 약을 먹이려던 놈과 할 이야기가 있단 말이냐? 꼬마.”
무라칸이 잠시 구타를 멈춘 사이, 제트가 반짝 눈을 빛내며 진 쪽으로 절을 하듯 엎어졌다.
“하아이고! 나으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어떻게든 제 죄를 만회하겠습니다요!”
늑골이 나가고 코가 반쯤 뭉개졌지만, 생존에 대한 집념에 놀랍도록 또박또박한 발음.
어느새 제트는 진 쪽으로 기어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무라칸은 코웃음을 쳤으나 천 년의 계약자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듣고 보아야 했다.
찰싹!
“놔, 피 묻어.”
쭈그려 앉은 진이 제트의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
“예이! 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지금부터 간단한 질문을 몇 가지 할 거야. 거짓을 고하면 죽고, 진실을 고하면 산다. 판단은 내 주관과 느낌, 그리고 감. 이해했나?”
끄덕끄덕! 제트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다.
“좋아. 넌 뭐 하는 놈이지?”
보통은 진짜 약을 탔느냐, 왜 탔느냐를 먼저 물어볼 텐데.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다. 덕분에 제트는 진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런 부류에겐 어설픈 동정심 유발이 통하지 않으며, 최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고할 필요가 있다.
“여, 여관 주인이자, 정보상입니다. 그리고 포주 노릇도 좀 하고, 이, 인신매매에도… 다소 일가견이 있습니다. 사, 살려 주시면 나으리께서 정말 써먹을 곳이 많을 겁니다! 아킨은 다 꿰고 있습니다요.”
기가 막힌 자기소개에 길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라칸은 그럼 그렇지,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족은 붙이지 마. 말하자면 종합적인 쓰레기로군. 그렇다면 약을 먹이려던 건, 우릴 어디 갖다 팔아 버리려고?”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어디에?”
“예?”
드득! 진이 제트의 새끼손가락과 손등이 만나도록 도와주었다. 제트는 감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테싱, 테싱! 소리쳤다.
“테, 테테테, 테싱 지하 경매장입니다아!”
“설명해.”
“예! 테싱 지하 경매장은, 테싱이라는 암흑 조직이 운영하는 경매장으로… 노예와 마약, 기타 밀수품과 장물 아티팩트, 그런 것들을 주로 취급합니다!”
“사람을 데려와 저녁까지 네 몸을 치료해 주겠다. 그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겠지?”
“물론입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생존을 직감한 제트는 당장 진의 발등에 키스라도 할 기세였다.
그는 아킨에서 생활하는 동안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진은 제트를 무척 혐오하지만, 그의 일처리 능력만큼은 높이 샀다.
제트를 위층으로 올려 보냈다. 오늘 ‘입구에서 제트를 찾아주세요’는 영업 종료다.
“꼬마, 이 쓰레기한테 치료비를 쓰느니 그냥 뒷산에 파묻는 게 낫지 않겠어?”
“동감이에요, 도련님. 살려주면 뒤통수를 칠 게 분명해요.”
“암흑 조직, 지하 경매장. 여길 무너뜨리는 것보다 명성을 쌓기에 좋은 건수가 있을까? 놈을 죽이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한번 믿어 보자고. 아킨 길잡이가 하나 필요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수긍했다. 원활한 여정을 위해선 파티 리더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무라칸과 길리가 제트를 감시하고 진은 여관을 나섰다. 제트를 치료할 치유사를 찾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정말 좋은 친구지만.
여관 밖을 나서자마자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아킨에서 혼자 움직일 땐 회귀자로서의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해도 괜찮기 때문이었다.
아킨은 테싱의 횡포 때문에 발전이 더딘 도시다. 회귀 전에 진이 알던 시설과 단체가 대부분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입이 가장 무거운 치유사를 찾는 건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특급 수배자여도 돈만 주면 치료해 주는 남자, ‘말트랑’의 마법 상점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댁이 불법 치유 시술을 그렇게 잘한다던데.”
“어디서 들었소?”
“알 거 없고, 후하게 쳐주겠소.”
15년이나 젊어진 게 분명한데, 말트랑은 배불뚝이 중년 모습 그대로였다. 잠시 말트랑이 고민하듯 제 배를 문질렀다.
“……환자 상태는?”
“늑골 두어 대가 나갔고 손가락 하나가 덜렁덜렁하오. 피는 많이 안 흘렸고.”
팅. 진이 잘 세공된 반지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반지를 받자마자 벌떡 일어서는 말트랑.
“운수 좋은 날이군, 갑시다.”
과연 말트랑은 실력 좋은 치유 마법사다.
그는 여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섯 시간 만에 제트에게 남아 있는 구타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 놓았다.
진땀을 흘리며 치유 마법을 펼치는 모양새가 꽤 그럴싸한 성직자처럼 보일 지경이다.
“과연 마법 연방은 마법 연방이군요. 길거리에서 그냥 구한 치유사가 저 정도 실력이라니.”
내내 치유 현장을 지켜보던 길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룬칸델에서 지내느라 마법을 접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 특히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제트는 무척이나 감동한 듯 치료가 끝나자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리, 비록 첫 만남이 좋진 않았으나. 앞으로 영원히 나리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너 하는 거 봐서. 치유사, 다 끝난 건가? 몇 시간 뒤에 이놈의 붙은 뼈가 다시 떨어지고 그러는 건 아니지?”
“재미없는 농담이로군. 그럼 이만. 또 급한 일 있으면 부르도록 하시오.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면 한 번은 그냥 치료해 주겠소. 나는 돈값을 하는 사람이니까.”
“서비스가 훌륭하군. 잘 가시오.”
말트랑이 떠났다.
제트는 나란히 앉아 홍차를 홀짝이는 세 사람의 눈치를 열심히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자들… 거물의 냄새가 난다. 나도 보는 눈을 키워야겠어, 처음부터 알아보면 좋았을 것을! 이들이 아킨 촌동네에 온 이유가 대체 뭐지?’
자신을 두들겨 팬 젊은 남자는 엄청난 실력자, 하녀는 이런 광경이 익숙한 모양이고, 철부지 도련님인 줄 착각한 소년은 그들을 수족처럼 부린다.
지금껏 제트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유형이었다.
‘굵직한 무인 가문의 후계자, 혹은 비먼트 특임대? 어느 쪽이든 뒤통수 잘못 치다간 뼈도 못 추리겠어.’
잠시 후 제트는 진 일행을 비먼트 특임대로 결론지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온 것부터 계산된 행동이 확실하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다. 한 시간 만에 자신도 모르는 특급 치유사를 데려온 것도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었다.
‘저들은 이미 나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쥐고 있을 것이다. 내게 접근해 테싱 지하 경매장으로 가는 길을 열고, 그곳에서 뭔가 임무를 수행하려는 심산이겠지…….’
그럼 임무가 완료된 다음엔, 사냥이 끝난 개 신세가 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겠군.
거기까지 생각한 제트가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 저들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만큼 필요한 사람이 되자고. 또한 그만한 충심을 보이자고.
테싱의 위세가 대단하다 한들, 아킨이라는 우물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반면 비먼트 특임대는 세계적으로 위명이 드높은 집단. 어느 쪽에 붙어야 하나 더 짱구를 굴릴 필요가 없었다.
한동안 제트는 테싱과 지하 경매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그들을 특임대라 가정하고 부는 정보인 만큼 알짜배기로 가득했다.
“테싱의 대외적인 보스는 살카라는 인물이지만, 진짜 보스는 따로 있습니다. 살카는 간판일 뿐이죠. 우리들 사이에선 ‘거미손 알루’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그래?”
“알루는 저랑 달리 극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소문엔 저 바다 건너 순혈 룬칸델과도 끈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일 확률이 높고요. 그리고 지하 경매는…….”
진은 다 알고 있는 지루한 내용이지만, 계속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야 동료들에게도 자신의 회귀 전 정보가 생기는 셈이니까.
‘그나저나, 룬칸델에 끈이 있다고? 알루에 대해 그런 헛소문도 돌았던 모양이군. 형제 중에 루테로 마법 연방 양아치들과 어울릴 녀석들은 없을 것 같…….’
거기까지 생각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게 저주를 걸려고 했던 놈. 그놈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여긴 루테로 마법 연방, 지플의 땅이니까.’
속단할 수는 없다. ‘날붙이의 미망’쯤 되는 저주는 최고 수준의 마법사나 펼칠 수 있고, 기껏해야 깡패들이 그런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폭풍성 10년, 검의 정원 5년. 그 기간 동안 저주의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작은 단서 하나도 건지지 못한 상태니까 말이다.
“설명은 이제 다 끝났나?”
“예! 가서도 그때그때 필요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이 제트가 성심성의껏 설명하겠습니다. 제 아들을 걸고 맹세하지요.”
“아들이 있었나?”
되물었지만, 진은 전생에 제트의 아들과 꽤 친한 사이였다. 아비와는 달리 착하고 순하기가 이를 데 없는 꼬마였다.
“예. 나리께 충성을 바치기로 했으니, 제 아들 얼굴 한 번 보고 출발하시죠. 제가 배신할 마음이 없다는 걸 보여 드리기 위한 겁니다.”
지금은 두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 작은 아이를 제 맹세의 도구로 쓰다니. 진은 다시 한 번 제트의 인성에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냥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