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화
23화. 귀검 카시미르(3)
카시미르의 두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딸이 폐인이 된다는 얘길 듣고도 멀쩡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라칸, 대체 무슨 소리야. 그 애가 폐인이 된다고? 자세히 얘기해 봐.”
진도 거북한 마음이 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에게 그런 가혹한 일이 생긴다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매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인간들은 미래를 보는 게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좋은 면만 본 거야. 아즈 밀의 계약자가 된 순간부터 그는 미래를 결정할 자유가 사라지는 거다.”
이어진 무라칸의 설명은 ‘인과율’에 대한 것이었다.
“미래를 본 자는 그 미래를 그대로 따라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야 한다. 거스르는 순간부터 아즈 밀의 단죄가 시작되거든.”
설령 미래를 본 영향으로 인해 심리와 행동에 변화가 생기더라도. 그로 인해 원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 싶어도, 미래에 순응해야 하는 게 아즈 밀 계약자들의 숙명.
설령 내일 내 형제가 암살당하는 미래를 보았어도 알려 줘서도 안 되고, 직접 가서 막아도 안 된다.
계약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미래를 알게 된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들이 인과율을 어겨도 아즈 밀의 단죄가 향하는 건 계약자다.
“인과율을 훼손한 계약자가 얻을 건 파멸뿐이다. 그렇기에 네 딸은 애초에 우리랑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야. 이미 정해진 인생을 살고 있는 거지.”
“미,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얘긴 들어 본 적도 없다고요.”
“당연히 들어 본 적 없겠지. 용들 중에서도 아는 놈 많이 없는 얘기거든.”
“무라칸, 그럼 유리아가 널 본 게 미래에 포함된 내용일 거라는 건 무슨 뜻이야?”
“그건 예측이야. 우리가 이곳에 오자마자 아즈 밀의 계약자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 아마 아즈 밀이 수호룡을 잃은 어린 계약자를 위해 대가를 치른 거겠지. 말하자면 아즈 밀이 도움을 요청한 거다.”
“신이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해?”
“용 하나와 인간 둘에게 요청한 거지. 아즈 밀의 개입은 확실치 않지만, 아마 맞을 거다. 단순한 우연으로 여기기엔 너무 가능성이 낮은 만남이니까.”
카시미르는 할 말을 잊은 채 고개만 저었고, 진은 유리아를 생각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안, 그리고 절대안. 세상 모든 사물과 현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날 아저씨라고 부른 것도… 설마 내 회귀 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가?’
일순 그런 질문이 떠올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쨌거나 최대한 빨리 수호룡을 찾아 꼬마 옆에 붙여 줘야 해.”
“……용이시여. 세간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저는 ‘칠색조’라는 정보상의 수장입니다. 상당히 유능한 부하들을 지니고 있고요. 하지만 지난 1년간 딸의 수호룡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칠색조가 네 것이었어? 아즈 밀의 개입이 더더욱 확신되는군. 우리가 이 나라에 온 목적도 칠색조의 정보를 이용하기 위해서니까.”
카시미르의 입장에선 방금 무라칸의 발언이 빛과 같았다. 용에게 그냥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단, 그가 원하는 걸 내어 주면서 말하는 게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털썩!
돌연 카시미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용이시여, 도와주십시오. 딸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칠색조 전체를 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평소의 카시미르는 신중한 성격이다. 추방당했으나 비먼트의 황족이었으므로 자존심 역시 매우 강하다.
그러나 어린 딸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선 달랐다. 비록 무라칸의 이야기 중 증명된 바는 아무것도 없지만, 카시미르로서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용과 룬칸델이니까. 그들이 자신을 거짓으로 현혹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길리가 깜짝 놀라 눈을 껌뻑였고, 진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돕고 싶지만, 최종 결정은 내 몫이 아니야.”
“예?”
“네가 애원해야 할 건 이 꼬마라는 거지. 우린 어떤 일이건 이놈이 다 결정하거든. 꼬마, 어쩔 거냐?”
보통 신의 계약자와 함께하는 용은 계약자와 ‘대등한 관계’ 혹은 ‘약간 우위’에 있기 마련이다. 자율성을 갖는다는 의미.
계약자와 아무리 친해도 자율성까지 버리는 용은 없다. 카시미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진이 단순히 ‘룬칸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
“도와주십시오… 진 공자.”
“일어나십시오. 카시미르 경. 인연이 얕다지만, 어린아이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돕느냐 마느냐 할 일이 아닙니다.”
진이 카시미르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난 카시미르는 핏발 선 두 눈에 눈물마저 맺혀 있었는데, 그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카시미르 경, 초조한 마음은 알겠지만 일단 냉정을 되찾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유리아의 수호룡을 같이 찾아봅시다. 뭔가 방법이 있을 테니까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공자.”
일이 예상보다 훨씬 잘 풀렸다.
굳이 마스터피스를 보여 주며 아직 갖고 있지도 않은 ‘마력의 샘’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카시미르와 칠색조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이의 목숨이 걸린 일에 즐거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칠색조도 소식을 전혀 못 캤을 정도라면, 룬칸델이나 지플의 정보력에 기대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비 기수 신분이니 가문의 힘은 빌릴 수 없다. 심정 같아선 금기를 어기고 싶지만, 어겨봤자 가문은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카시미르 경. 유리아의 수호룡을 지플이나 비먼트가 납치한 것 같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심증이 있다면서요.”
“수호룡이 죽었다면 유리아가 모를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용을 납치할 수 있는 건 그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요.”
틀린 말이 아니다.
용을 납치하기 위해선 여러 종류의 마법이 필요하다. 룬칸델처럼 무력만 있는 가문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전투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수호룡이 사라진 시점이 1794년 8월 2일입니다. 제 부하들이 알아본 바, 8월 2일 전후로 지플과 비먼트에서 각각 굵직한 마법사들이 자리를 비운 정황도 있습니다.”
“지플과 비먼트.”
그 두 집단이 상대라면, 사실 심증이 아니라 증거가 있어도 만만치 않다.
아니, 만만찮은 정도가 아니라 수호룡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룬칸델과 더불어 세계 3대 권력에 속하는 데다, 지플은 그 첫 번째다.
“사실 저는 딸의 수호룡을 찾는 걸 반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딸의 목숨이 걸린 일이란 걸 몰랐다면 앞으로도 그랬겠죠…….”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도 아즈 밀의 계약자에게 그런 운명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으니까요.”
“그래, 인간. 자책은 도움도 안 돼. 흐음, 지플과 제국이라! 어이, 꼬마. 여기 티칸 자유 도시 말이야. 루테로 마법 연방 소속이냐?”
“아니, 티칸은 마미트처럼 그냥 도시야. ‘국가’ 기준에 미달하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다만 다른 점은, 티칸은 마미트와 달리 모두가 눈독들일 만한 땅이라는 것이다. 지플과 비먼트, 기타 강국들은 물론이고 룬칸델마저 은근히 티칸을 원하고 있었다.
특히 비먼트는 폐황자가 수장으로 있는 도시인만큼 눈엣가시로 여길 정도.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10여 년 후 끝내 ‘자유국 티칸’을 세운 카시미르와 칠색조의 협상 능력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나라는 세웠으나, 과거엔 아마 딸을 구하지 못했겠지… 자유국 티칸의 왕, 카시미르에게 자녀가 있다는 이야긴 들어 본 적 없으니까.’
따라서 유리아를 구하는 것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는 변신해도 상관없겠네?”
“그건 갑자기 왜?”
“비먼트 쪽으로 날아가서 아는 용들한테 좀 물어보려고 그런다. 지플에서 지내는 용들은 대부분 나랑 적이니까 물어볼 수 없으니.”
현재 활동하고 있는 용의 8할이 지플과 함께하고 있다.
나머지 2할은 대부분 비먼트와 함께하고, 극소수의 용들이 다른 가문의 마법사나 은거 기인의 곁에 있었다.
“비먼트도 결계 때문에 용이 함부로 날아서 갈 순 없어. 차라리 지금부터 위조 신분증 하나 구해서 이동 관문으로 가는 게 나을걸.”
“아, 결계 같은 건 상관없어. 내가 기운을 잔뜩 분출하면서 가면 알아서 몇 마리가 튀어나올 수도 있거든. 결계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말이야.”
“뭐? 어떻게 그래?”
“내가 천 년 만에 깨어나긴 했는데, 전성기 때 나한테 빚진 놈들이 꽤 된단 말이지? 비먼트에 그중 하나쯤은 있길 바라면서 가보는 거지, 그냥.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용이 천 년 이상 활동을 지속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신의 계약만 계속 계승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용이시여!”
무언가 생각난 듯, 카시미르가 소리쳤다.
“아, 거 이름 불러.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말고. 낯간지럽게, 뭐야. 내가 무슨 사이비 교주야?”
“무라칸 님! 그렇다면 가시기 전에 제가 비먼트에 있는 용들의 목록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칠색조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오, 그래? 그럼 지금부터 발에 땀나게 뛰어서 가져와. 너나 나나 헛걸음할 일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아는 이름이 있길 기대하지.”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야야, 잠깐만.”
홱 뒤돌아선 카시미르를 무라칸이 불러 세웠다.
“가기 전에 두 가지 사항을 알려 주마. 첫째로, 네 딸은 오늘부터 하루 종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한다. 날마다 어떻게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어놀게 하고, 눈만 뜨면 계속 놀게 해. 계속 잠들게.”
“어, 언제까지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수호룡을 찾을 때까지. 광대를 붙여 놓든, 전담 놀이꾼을 붙여 주든. 애가 신이 나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야 해. 체력이 빠지면 자연스레 아즈 밀 권능의 발동이 약해지니까.”
권능이 약해질수록 유리아가 안전해진다. 그만큼 유리아가 미래를 어길 가능성이 낮아지는 거니까.
지금은 미래와 현재,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나이라지만. 혹시 ‘충격적인 미래’라도 보게 되면 행동에 변화가 생겨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그걸 단순 꿈이라 착각할지라도 말이다.
“아.”
“매일 수면제를 먹이거나, 정신 마법을 걸어 강제로 재우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너도 싫지? 나도 싫고. 아마 우리 꼬마도, 딸기파이도, 네 마누라도, 애도 싫어할 거야. 그렇지?”
“알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마다 놀다 지치게 만들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사항은.”
“대피시킨 숙소 요리사들 불러서 새우 요리 좀 만들라고 해.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인 카시미르가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그러자 길리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무라칸 님, 다정하시네요.”
“하하, 딸기파이여. 네가 아까 새우 요리를 시키려다 못 먹은 게 기억이 나서.”
“아뇨, 그거 말고요. 방금까지 카시미르 경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일부러 여러 말씀을 하신 것 같았거든요.”
무라칸이 딴청을 피우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 미물의 기분 따위 내 알 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