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111화 (110/1,001)

제 111화

36화. 각자의 지원군들(1)

‘설마……!’

문득 옛 마법 스승과 나눈 대화 하나가 떠올랐다.

-지플의 탑주들이 사용하는 지팡이엔 특별한 장치가 있어. 지팡이 상단에 보면, 자그마한 룬 문자가 새겨져 있거든.

-무슨 용도인데요?

-탑주가 그 룬 문자를 발동시키면 해당 탑으로 신호가 가. 휘하 마법사들을 긴급 소집하는 용도의 마법이지. 당연히 위험에 처하거나,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적을 만났을 때 사용하지. 내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지.

진이 뮤론의 시체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스승의 말대로라면, 마지막에 뮤론이 지팡이를 휘두른 건 룬 문자를 발동시키는 행위였을 터.

“꼬마, 왜 그래?”

“놈의 지팡이를 좀 봐야겠어!”

“지팡이는 왜?”

무라칸은 지플 탑주들의 지팡이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과거, 그가 한창 활동하던 당시엔 개발되지 않은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둘러댈까 고민하던 찰나, 카시미르도 같은 걸 떠올린 듯 짝 손뼉을 쳤다.

“룬 문자! 지플 탑주들의 지팡이엔 휘하 마법사들을 호출할 수 있는 룬 문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런 게 있다고?”

“저도 풍문으로만 들은 이야기입니다. 진 공자는 룬칸델인 만큼, 저보다 지플에 대한 정보가 빠삭하겠지요.”

“저도 루나 누님이 지나가는 말로 그런 이야길 했던 기억이 있어서 확인해 보려는 겁니다. 정말로 룬 문자가 있다면.”

“굉장히 곤란하겠군요…….”

나란히 뮤론의 시신 앞에 선 세 사람의 눈빛에 근심이 서려 있었다.

“……음, 테스. 그 양반이 너무 태워 놔서 지팡이인지 숯덩이인지 구분이 안 되는걸. 룬 문자는 없는 것 같은데? 발동됐다면 빛나고 있어야 하잖아.”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무라칸 님. 하하, 괜한 기우였나 보군요.”

두 사람이 시커먼 지팡이를 쳐다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진이 지팡이 상단의 검게 탄 부분을 살살 단검으로 긁어내자.

보였다. 은은한 초록빛을 발하고 있는 룬 문자가. 불길한 예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제길.”

“망할!”

동시에 이마를 짚는 무라칸과 카시미르.

“야, 꼬마. 그 신물 그거… 원주민들한테 그냥 나중에 찾으러 오자고 할까? 본모습으로 변신도 못 하는데 말이야. 미물, 마법사가 대체 몇이나 찾아올 것 같냐?”

“마탑마다 최소 100명 이상의 마법사가 배치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7, 8성 이상도 다수 섞여 있으니 절반만 몰려와도 감당이 안 됩니다.”

절반이 아니라 절반의 절반만 오더라도 세 사람이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정말. 내가 한창 날아다닐 땐 8성 마법사 네다섯 따윈 몸 풀기 정도였는데. 에잉! 아 까짓것 오라고 해, 썩어도 준치라고. 3천 년의 노련함을 보여 주지.”

“무라칸 님,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무라칸 님이 혼자서 마법사들을 다 상대한다 할지라도, 저 혼자서는 진 공자를 지키는 것도 무리일 것 같군요.”

운 좋게 얻은 일각수의 뿔로 인해 역류가 좀 진정됐지만.

진의 내상은 완전히 치유된 게 아니었다. 지금 상태로 전투를 벌였다간 다시 역류가 터질 거고, 요양 정도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신물을 두고 가기엔 앞날이 너무 캄캄해지긴 해, 미물. 네놈이 진을 데리고 먼저 복귀해라, 내가 힘을 잃었어도 그딴 조무래기들한테 설마.”

“무라칸 님을 혼자 두고 저희가 어떻게 갑니까!”

“하하. 미물 네놈, 기특한 구석이 있었군… 걱정 마, 설마 죽기야 하겠어?”

쓱 콧등을 훔치며 무라칸이 한껏 폼을 재자, 카시미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진 공자를 데리고 먼저 빠지겠습니다!”

“잠깐. 이 새끼 포기가 왜 이렇게 빨라? 같이 싸우다 죽겠다고 말하는 게 정상 아니냐? 묘하게 얄미운데.”

“아마 기분 탓일 겁니다, 무라칸 님.”

두 사람이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엇, 공자. 어떤 게요?”

“7마탑의 마법사들이 여기로 도착하는 시간이요.”

“음. 지플 7마탑은 대륙 북쪽 끝단에 있으니. 이동 관문을 이용하더라도 두 시간은 필요할 겁니다. 그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지만, 확실히는 모르겠군요.”

두 시간.

‘두 시간이라. 그 안에 해낼 수 있을까? 원주민들은 목숨을 잃더라도 신물을 찾기 전까진 절대 이 땅을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아까 티카의 눈빛이 그랬다. 지플의 탄압 속에서 수백 년이나 거울을 지켜 온 그들이 이제 와서 긍지를 버리진 않을 테니.

‘두 시간, 두 시간…… 아무튼 최대한 빨리 이곳에 와 줄 수 있는 강력한 지원군이 필요하다.’

일단 룬칸델은 제외였다. 예비 기수 신분으로 또 한 번 루나를 부르면, 이번엔 다른 형제들도 결코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룬칸델은 아니되, 지플과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이며, 아주 빠르게 콜론으로 달려올 수 있는 지원군.

세상에 그만한 힘을 지닌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판단을 내린 진이 카시미르를 쳐다보았다.

“카시미르 경. 경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진이 계획을 설명하자 카시미르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공자, 그게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그쪽에서 거절하면 공자와 무라칸 님이 너무 위험해집니다.”

“해봐야죠. 그리고 아마 불쾌해서라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힘들겠지만 서둘러 주십시오.”

* * *

한편 중앙 대륙 북부, 지플의 7마탑 최상층.

“수정구가 붉게 물들었다!”

“탑주께 변고가 생긴 모양이오!”

“이번에도 또 장난을 치시는 것 아니오? 저번에도 기껏 찾아갔더니 잔뜩 취한 채 잠들어 있지 않았소.”

“장난이라 할지라도 탑주의 부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3원로.”

“쳇, 원로들 대우조차 똑바로 못하는 사람이 무슨 탑주라고…….”

“쉿, 부탑주가 들으면 큰일 나오. 어쨌거나 부탑주께 얼른 알려야지. 여봐라! 속히 부탑주를 뫼셔라.”

뮤론의 룬 문자와 이어진 수정구가 붉어졌으나, 일부 원로들은 소식을 듣고도 탐탁찮은 기색이었다. 아니, 대부분의 원로들이 싸늘한 반응이었다.

한 하인이 헐레벌떡 뛰자 잠시 후 부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려한 인상의 젊은 실력자, 미도르 엘너.

그는 켈리악 지플의 서자였다.

“수정구가 가리키고 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콜론 유적지일세.”

“현 시간부로 7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을 소집해 콜론으로 향하겠습니다. 원로님들께서는 본가와 다른 마탑에 속히 연락해 주십시오.”

“굳이 다른 마탑까지?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 아니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 새벽에 갑작스러운 호출이라니… 필시 뭔가 사달이 난 겁니다. 3원로님께선 이동 관문을 개방해 주십시오.”

“흐음, 나도 그러고 싶소만…….”

3원로가 난처한 듯 수염을 긁적이며 창밖을 가리켰다.

“한 시간쯤 전부터 갑작스레 눈이 너무 많이 오는구려, 부탑주. 이런 날씨엔 이동 관문을 쓸 수 없소.”

그 말대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 비가 심한 날엔 이동 관문을 사용했다가 까딱하면 온몸이 분해된다. 눈 알갱이나 빗방울이 이동 관문에서 방사되는 마력을 머금고 관문과 함께 터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눈이 그치길 기다렸다가 가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만약 탑주께 변고가 생겼다면, 차후 본가에서 초동 대처 미흡을 지적했을 때 할 말도 없고요.”

잠시 고민하던 부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을 타고 가겠습니다. 첸카까지 날아간 다음, 그곳에서 이동 관문을 이용해 콜론으로 가도록 하죠.”

그건 곧, 7마탑에 소속된 모든 용들도 콜론으로 간다는 의미였다.

* * *

한 시간이 지나, 새벽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원주민들은 진과 무라칸의 도움을 받아 죽은 이들을 땅에 묻을 수 있었고, 디노는 뮤론의 일지를 비롯한 몇 가지 증거품을 챙길 수 있었다.

“무라칸, 계속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7마탑의 마법사들은 두 시간 안에 여기 못 올지도 몰라.”

“왜?”

“북부 대륙 최상단의 1, 2월은 거의 매일 눈이 내려. 그리고 이동 관문은 눈이 내릴 땐 사용을 못 해.”

“불행 중 다행이군.”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냥 눈이 자주 내리니까, 바람일 뿐이지. 두 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촉박하거든.”

다행히 진의 그 바람대로 7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동 관문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용까지 동원하리라는 건 진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말이다.

커흑!

돌연 진이 굵은 핏덩이를 토했다. 슬슬 역류의 후유증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일각수 뿔로 위기는 넘겼지만, 그만한 역류를 단시간에 완벽히 억누를 순 없었다.

“으, 무리를 하긴 했나.”

“엄청나게 무리했지. 설마 그 미친놈이 어둠 계열 마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부하들을 호출하는 룬 문자라니… 내 시대엔 싸우다 패배하면 보통 깔끔히 물러났다고. 요즘은 낭만이 없어, 낭만이.”

“우리도 저번에 오르갈의 펜던트로 루나 누님 부른 적 있잖냐. 지금도 지원군을 부르러 카시미르 경이 떠났고.”

“그건 좀 달라, 어? 그, 우린 그때 세계를 수호한 거고. 그때 마신석을 부수지 못했으면 지금쯤 온 세상이 난리였을 거다. 마찬가지로 콜론인들의 신물도 지플 손에 넘어가면 위험한 물건이니까.”

피식 웃는 진.

그는 마법 스승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생의 스승이 아니었다면 룬 문자의 존재조차 몰랐을 터.

‘스승… 잘 자라고 있으려나. 나는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은데.’

* * *

“카시미르 경! 왜 혼자 돌아오셨어요!?”

“자기? 왜 혼자야?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길리와 알리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고 곁에 있던 엔야와 퀴칸텔도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길리, 그 꽃 어디 있습니까!?”

“꽃이요? 갑자기 웬 꽃을 찾으시는.”

“아아! 저기 있군!”

카시미르가 진의 방 창가에 놓인 한 꽃병을 보며 소리쳤다. 단 한 송이의 독특한 꽃이 담겨 있는 화분이었다.

새하얀 꽃잎이 눈송이처럼 아롱진 꽃.

비궁설화.

“알리사, 비궁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 관문을 열어 줘. 1분이라도 빨리 가야 진 공자가 살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