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6화
53화. 상(2)
정제된 만독주는 이름 그대로 술이 되었다. 대접에 담아 한 번에 쭉 들이켜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퀴칸텔이 아닌 엔야가 진의 곁에 앉아 있었다.
“으.”
“앗, 진 공자.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엔야? 퀴칸텔 님은? 그리고 드디어라니?”
진은 잠깐 정신을 잃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방금까지 앞에 있던 퀴칸텔 대신 엔야가 보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퀴칸텔 님 저쪽 방에 있어요. 그리고 공자는 닷새 만에 깨어난 거고요.”
“뭐라고요? 닷새!?”
“네. 와, 저는 진짜 공자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기절하신 동안 온몸이 시커멓게 변했다가 돌아오기를 수십 번은 반복했을 거예요. 물론 그 모습도 멋있었습니다!”
룬칸델의 축복받은 육체이기에 닷새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인 무인은 만독주를 소화하기까지 보통 한 달이 넘게 필요했다. 퀴칸텔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알려 주지 않았다.
어차피 쓰러질 거, 모르고 먹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만독불침이 되셨다면서요? 축하해요, 공자. 공자가 나날이 대단해지는 걸 보는 게 저한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실 거예요! 그나저나, 여러분! 공자께서 깨어났어요!”
엔야가 복도로 나서 소리치자 하나둘씩 동료들이 진을 찾았다. 길리, 무라칸, 퀴칸텔, 알리사, 제트 등. 모두가 모인 와중 이번에도 카시미르만 없었다.
그는 시론과 술자리를 끝낸 후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흑해의 마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고, 나으리! 고생하셨습니다요! 그리고 경하드립니다!”
“무명이 널 암살하지 않는 기간이 10년이라고 했지? 그 이후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만독주는 회수 가능한 영약이야. 무명의 최고 살수들에게 만독불침이 계속 전승되는 이유지.”
퀴칸텔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 일주일쯤 기절할 줄 알았는데, 닷새밖에 안 걸렸네. 푹 쉬라는 의미도 있었으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 마라.”
“기분 나쁘긴요. 차라리 모르고 복용한 게 낫네요. 알고 마셨으면 꽤나 신경 쓰였을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만독불침이라니…… 무인들에겐 꿈이나 다름없는 능력을 또 하나 얻으셨군요.”
“야, 꼬마. 기념으로 이거 한번 쭉 들이켜.”
무라칸이 진에게 정체불명의 시커먼 용액이 가득 담긴 잔을 내밀었다.
“……뭐냐? 이건. 사람이 먹어도 될 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글지글. 잔 속에서 기포가 터지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뭐긴, 독이지. 너 기절한 동안 제트 놈이 비먼트 암시장에서 공수한 거야. 얼른 마셔, 만독불침 좀 확인해 보게.”
“무라칸. 미친 거냐, 진짜로? 무슨 눈 뜨자마자 생체 실험도 아니…….”
그러나 침대에 모인 동료들 모두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수천 년을 살아온 용들에게조차 만독불침은 쉽게 구경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길리조차 무라칸을 말리는 시늉만 하며 꼴깍 침을 삼키고 있었다.
“후, 알았다.”
꿀꺽, 꿀꺽……!
혀가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한 잔의 독액이 진의 목구멍을 넘어갔다.
“카학, 더럽게 맛없네.”
“오오, 나으리. 어떠십니까요?”
“와, 진짜 멀쩡하네?”
“뱃속이 좀 뜨거워지는 기분인데…… 그게 전부로군. 이거 어느 정도의 독이야?”
얼른 길리가 건네준 물로 입을 헹구며 물었다.
“한 모금이면 7성 무인도 보내는 독이라더군.”
“하하. 그런 걸 나한테 먹였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어? 미쳐가지고.”
“퀴칸텔이 이제 널 단숨에 죽일 수 있는 독은 세상에 없을 거라더라.”
진이 슬쩍 퀴칸텔에게 시선을 옮겼다.
“널 즉사시킬 수 있는 독은 이제 하나도 없어. 방금 네가 마신 것 정도까지는 완전면역이고, 그 이상부터는 지나치게 노출되면 위험해. 대신 남들은 한 방울에 사망할 것도 넌 한 잔 정도까지 버틸 수 있게 된 거지.”
절대적인 만독불침까지는 아니다. 그건 테마르와 시론, 그리고 무명의 초대 가주인 코룬만이 닿았다고 추정되는 영역.
그마저도 추정일 뿐, 확인된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진이 얻은 만독불침은 사실상 최종적인 수준이었다.
“앞으로는 그 어떤 독이라도 날붙이에 도포하거나, 음식에 섞인 정도로는 널 위협조차 할 수 없다. 그게 무인에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인지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겠지?”
사실상 독살로 진을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쿠잔을 다시 만나도 독 때문에 위축될 필요는 없겠군. 그 이상의 독술사라 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하자 생체 실험을 당해 어이없는 마음이 싹 달아났다. 뱃속에서 뜨겁게 꿈틀대던 독기가 벌써 중화되어 숨으로 날아가는 것도 느껴졌고.
“만족스럽군요. 고생한 보람이 있어. 자, 그럼 이제…… 식사 좀. 아무리 궁금하기로서니, 닷새 만에 깨어난 사람한테 밥이 아니라 독부터 먹이는 법이 어딨어, 대체.”
점심이었다.
카시미르가 빠지긴 했지만, 오랜만에 동료들끼리 모인 식탁 위에서 온갖 수다가 오갔다.
사밀에서 진이 활약한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엔야는 내내 부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진 공자, 이제 엄청 강해지셨으니까. 다음에 어디 갈 때는 저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요? 어디든 갑니다. 저도 진 공자랑 같이 성장하고 싶다고요.”
“하긴, 저 녀석도 슬슬 실전 경험을 쌓긴 해야지. 장차 1인분을 해내려면 말이야, 안 그래? 퀴칸텔. 너희 계약자도 긴장감을 좀 가져야 한다고.”
“분하지만 맞는 말이다.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니지.”
“엔야 양은 지금 퀴칸텔 님하고 무라칸한테 마법 수련을 받고있는 것 아니에요? 저번에 4성쯤 됐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진이 지나치게 대단해 묻히고 있으나.
열여섯에 4성 마법사가 되는 건 국보급 천재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엔야는 단지 올타의 계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먼트 아카데미의 장학생 신분이었던 게 아니다.
“아무래도 실전 없이 이론만 챙기다 보니 성장이 더뎌. 무엇보다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고.”
“으음, 살인이라. 굳이 엔야 양까지 그런 걸 경험할 필요가 있을까요?”
탁!
퀴칸텔이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놨다.
“진 룬칸델. 여기 있는 모두는 네 동료다. 네가 기수가 되어 룬칸델에서 형제들과 치고받을 때도 우린 함께 싸운다는 뜻이야. 툭하면 만만찮은 싸움이 있을 테지. 그때도 엔야더러 민폐만 끼치고 있으라는 말이냐?”
일부러 진을 나무라는 듯 말했으나.
퀴칸텔이 진짜 혼내는 것은 엔야였다. 티칸에 온 이후, 엔야는 마법 수련을 하며 아이들과 놀아준 것 외에 딱히 한 일이 없었다.
물론 엔야는 고작 열여섯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여러 거대한 사건과 세력에 엮인 이상, 어떤 상황에서도 제 몸 건사할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 것은 필수이며. 나아가 등을 맡겨도 될 만한 일원이 되는 것도 필요한 덕목이었다.
또한 퀴칸텔은 내심 무라칸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중이기도 했다. 같은 수호룡의 입장에서, 진만 도드라지는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당연한 일.
“보기엔 이래도, 이 아이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올타의 계약자야.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은 룬칸델과 지플. 엔야는 강해져야 해. 네가 기수가 된 다음에도, 당당히 동료라 부를 수 있을 만큼.”
퀴칸텔의 의도를 파악한 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을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좋아요, 어차피 저도 다음번엔 마법사들을 좀 상대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역류계 마법도 다듬을 겸, 엔야 양과 함께하면 되겠네요.”
“오오오!”
언제나처럼 엔야가 제 가슴을 쾅쾅 치며 눈을 반짝였다. 기쁨을 드러내는 그녀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진 공자와! 단둘이! 모험을! 그럼 결혼식은 언제 올리는 게 좋을까요?”
진이 마시던 물을 뿜었고, 퀴칸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밌는 듯 컬컬 웃는 무라칸을 제지하는 건 길리의 몫이었다.
“엔야. 이제 품위를 갖추라는 말까진 안 할게. 올타 님도 그건 포기했다고 하셨으니까…… 제발 상식적으로라도 행동하자. 나 방금 진이 아니라 널 혼낸 거야, 응? 알아?”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분명 진심이 섞인 것 같지만, 진은 허허 웃어넘겼다. 엔야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어쩐지 엔야는 요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듯 느껴졌다.
‘비먼트에서 온갖 차별과 따돌림을 겪으며 지냈다고 하니. 엔야 양도 마음에 상처가 있겠지. 과도하게 쾌활한 성격은 거기서 기인한 것일 테고.’
진 역시 전생에서 철저한 차별과 따돌림을 겪었다. 룬칸델에 있는 동안, 대체 자살을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래서 엔야가 밝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마냥 유쾌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도련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응?”
“저는 당분간 본가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주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비 기수의 유모를 부를 일이 대체 무엇일까. 예비 기수의 유모는 예비 기수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으로 완벽한 외인이 되는 것인데.
잠시 고민하던 진이 무언가 떠오른 듯 길리와 눈을 맞췄다.
“설마 상을 내리려고 부르신 건가?”
“상이라니요? 도련님은 예비 기수인데요?”
“이번에 나 때문에 조슈아의 기사들이 좀 죽었거든. 무명의 살수들한테.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에 대해 상을 내리려고 나 대신 길리를 부른 게 아닐까 싶은데. 예비 기수 신분으로 가문 2기수와 비공식적 서열전쟁에서 승리한 셈이니까.”
진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자, 동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요나 아가씨와 그런 일도 있었단 말이에요? 게다가 무명왕에게 그런 대담한 요구를… 조슈아 그 개, 아니. 조슈아 도련님이 도련님을 염탐할 것까지 예상하셨고요……?”
“완전히 예상하고 있던 건 아니야. 다만, 최근 키다드를 죽이며 경고를 남겼으니.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 그래서 무명왕에게 도움을 준 후, 그들을 없애주라는 은근한 청을 한 거고.”
“죄송합니다, 도련님.”
“갑자기 왜?”
“저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도련님이 그냥 무사히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유모로서 도련님을 볼 낯이 없군요.”
“그런 말 말고, 잘 다녀와. 벌을 내리실 거라면 나를 직접 호출하셨을 테니, 분명 상이야. 그리고 알지? 룬칸델에서 서열전쟁에 승리해 보상을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예. 정말 상이라면, 가주께서는 조슈아 도련님이 가진 것 중 하나를 빼앗아 도련님께 하사하시겠지요.”
기수끼리 싸워 누군가 승리하면, 가주는 패배자의 물건이나 병력을 빼앗아 승자에게 준다.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경우에 한하는 이야기. 그리고 진은 예비 기수 신분으로 2기수를 꺾은 셈이니, 당연히 특별한 승리였다.
“놈에게 어떤 걸 빼앗아 내게 주실지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