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4화
59화. 영검의 전승지(7)
휘익!
휙……!
린파의 대검이 물결처럼 너울거리며 부드럽게 허공을 갈랐다. 영기가 대검을 감싸고 있어 시커먼 기둥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좌로, 우로, 아래로, 위로. 검은 대검이 움직일 때마다 영기의 입자가 휘날렸다.
경지를 이룬 자의 위엄이 스며있기는 하지만, 얼핏 보면 평범한 검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알 수 있었다.
허공을 가르고 있는 대검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쏟아지는 검은 입자들에 가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조차 곧바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린파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거울에 비친 듯 궤적의 반대편에서 똑같은 칼날이 튀어나오고 있다…….’
좌로 휘두르면 우측에서 영기로 이루어진 대검이 나오고, 우로 휘둘러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아래, 위, 사선도 마찬가지.
대검이 그리는 궤적의 반대 방향엔 항상 똑같은 대검이 있었다. 영기로 이루어진, 린파의 것과 똑같은 대검이. 책장이 덮이듯 두 자루의 검이 계속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진짜 영검 2식인가. 어제까진 단지 영기에 휩싸인 대검을 휘두르는 것만 보여주더니.’
검무가 고조되고 있었다.
린파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대검은 점점 더 많은 궤적을 남겼으며, 진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자루 검으로 좌우를 동시에 벨 수 있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린파가 보여주는 것은 본래 쌍검사들에게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쿵……!
검무를 끝낸 린파가 대검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가르문드와 보라스가 박수를 치자 진도 그들을 따라하며 눈빛으로 찬사를 보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떤가?”
“멋졌습니다, 이전까지는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군요.”
혹시 제가 먼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던 겁니까.
하마터면 그 말을 덧붙일 뻔했으나 다행히도 말을 가릴 수 있었다.
“그, 금언은…… 괜찮은 건가? 린파 형제.”
가르문드와 보라스는 린파가 금언 수련을 깼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괜찮다네, 형제들. 그러니 호들갑 떨 것 없어.”
“다른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군!”
“맞아, 그래야 전승자가 떠나기 전에 린파 형제와 다른 형제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아닌가. 테마르가 있을 때는 한마디도 나누지를 못했으니……!”
두 투왕이 호다닥 달려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얼결에 린파와 단둘이 남게 된 진은 한동안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위.”
“예?”
“네가 본 영검 2식의 이름이다, 전승자.”
“어울리는 이름이로군요. 영기로 이루어진 칼날이 가위처럼 맞물리니까요.”
“따라할 수 있겠나?”
“그렇게 당연하게 따라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기술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이 검도 문제고요.”
진이 허리춤에 찬 영흡검을 가리켰다.
여전히 영흡검은 진의 영기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영흡검은 칼집 같은 것이다. 발검할 때처럼, 영흡검 속에서 영기를 뽑아라.”
“예, 그건 저도 최근 들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마냥 영기를 빨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돈해주기도 하는 검이라고 말이죠.”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금언 수련은 왜 하고 있던 겁니까?”
“아무도 듣지 않더군.”
“뭘요?”
“신들에게 도전해선 안 된다는 말을, 형제들을 말리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수련보다는 형벌에 가까웠지.”
린파는 명왕족이 멸망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진은 어렴풋이 그 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굳이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린파가 바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네 덕에 형벌이 끝났군. 허무하리만치 쉽게. 나로서는 이십여 년 만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자세히 알려주도록 하지.”
린파가 영검 2식을 설명하려는 순간, 가르문드와 보라스가 돌아왔다. 린파의 금언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명왕족 수십도 함께였다.
“아무래도 내일부터나 알려줄 수 있겠군, 진 룬칸델.”
“린파 형제!”
“사투왕 형제! 드디어 금언을 끝냈군요!”
명왕족이 린파를 둘러싸고 축하와 온갖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진에게 전말을 물었으나, 진은 둘러대기만 했다. 다른 명왕족들은 모두 린파가 왜 금언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독특하고 조금 미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명왕족 중 가장 섬세하고 여린 인물이었군.’
진이 자리를 비켜주려고 슬쩍 훈련장을 나가려고 하자 보라스가 그를 붙잡았다.
“네 두 번째 업적은 내가 먹겠다.”
“아직 한 게 없는데요?”
“린파 형제의 입을 열게 했지 않나. 흐흐, 이 공기를 가장 처음 맛보는 건 나여야 한다는 말이지.”
그러면서 헙, 헙 입을 벌려 공기를 삼키는 보라스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내리는 함박눈을 먹겠다고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알다가도 모를 종족이었다. 정말 이들이 반만년 전 신들에게 최초로 도전장을 들이민 필멸자 집단이 맞나 싶을 정도로.
* * *
린파는 지금껏 금언한 게 아까울 만큼 설명에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진은 영흡검을 극복하는 방법도, 영검 2식을 펼치는 방법도. 그녀가 금언을 끝내고 채 2주가 지나기도 전에 익힐 수 있었다.
물론 방법만 익힌 것이지 통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복 훈련이라면 그야말로 이골이 났으므로 숙련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1797년 2월 중순이 시작될 때쯤 투신 반이 직접 훈련장을 찾아 영흡검을 회수했다. 이쯤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잘하고 있군.”
단지 그렇게만 말했으나, 반은 진에게서 테마르의 그림자를 점점 지워가고 있었다. 진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어 반이 ‘잘한다’고 표현한 것이 어느 정도의 칭찬인지 가늠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반을 따라온 탄텔이 브라다만테를 돌려주었다.
“이건 내 영기를 보조해주니 쓰면 안 된다더니?”
“오늘부터는 써야 해. 사투왕 형제의 수련까지 끝내면, 대련이 시작된다고 했잖냐.”
진으로서는 기대하던 물건이 도착한 기분이었다.
‘처음 라프라로사에 온 날부터, 명왕족과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지.’
투신과 투왕의 무위는 지금으로선 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직접 칼을 맞대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투왕들은 인간의 기준에서 전원 최소 9성 이상이다. 10성 수준일지도 모르고.’
투신 반의 무위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테마르, 혹은 시론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느낌만 있을 뿐.
‘일반 전사들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혀.’
백랑족이나 적호족의 평균은 확실히 상회할 것이다.
“일투왕 형제가 오후까지 네 첫 대련 상대를 골라줄 거다. 솔직히, 난 아직 한참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무조건 질 것처럼 말하는군.”
탄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열일곱 먹은 인간이 명왕족 전사와 싸운다는 건, 우리 시대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거든. 그리고 일투왕 형제는 널 좋아하지 않아.”
“왜?”
“크하하, 첫날 투신전 본당에서 그토록 건방진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나? 사투왕, 오투왕, 팔투왕 형제가 관대했던 거라고.”
이내 탄텔이 웃음기를 지우며 진과 눈을 맞췄다.
“대신, 네가 좋은 모습을 보이면 일투왕 형제를 비롯해 널 싫어하는 형제들의 시선이 단숨에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 응원해주마, 무운도 빌어주고. 내 조언은 실행해뒀겠지?”
명왕검을 한 번은 봐두라는 조언. 직접 보진 못했으나, 기억 속에는 가득했다.
반과 탄텔이 훈련장을 떠나자 가르문드가 고개를 저었다.
“흠, 너 정도면 충분히 강해. 아니, 엄청나. 인간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지. 그러니까 기죽지 마라, 괜찮아.”
“탄텔은 내가 질 것처럼 말했고, 가르문드는 내가 이미 진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리고 기죽은 적 없습니다만.”
보라스와 린파도 같은 생각인 듯 진의 시선을 피했다.
“허허, 걱정이로군. 진은 한 번 크게 실패하면 영혼이 다치는 부류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그래. 매번 성공만 거머쥐며 살아온 이들은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지.”
투왕들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진,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법도 배워야 한다.”
“동감. 패배 또한 전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다. 허허, 테마르도 바깥에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라프라로사에선 연패 행진을 했거든.”
그건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가르문드, 당신이 보기에 라프라로사에서 첫 대련을 할 때의 테마르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죠?”
“지금의 너보다는 강했어. 한두 걸음쯤?”
“그렇군요. 한두 걸음이라.”
“그런데도 한동안 일반 전사를 이기지 못했다.”
“우리 셋이 왜 이렇게 걱정하는지 잘 알겠지? 테마르도 우리 형제와의 첫 대련 이후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거든. 너도 테마르와 그런 점이 닮았을 것 같아서 말이야.”
가르문드, 보라스, 린파는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한 번 지는 게 대수로운 일도 아닌데, 걱정들이 많군. 알리사 님과 수련할 땐 백 번도 넘는 패배를 경험했다.’
라프라로사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던 테마르와 달리, 진은 그 누구보다도 패배와 실패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것에도.
* * *
일투왕이 정한 일반 전사의 이름은 샤쿠였다.
그는 장검을 사용하는 무인이었고, 명왕족의 시간이 멈추기 전엔 ‘벼락의 샤쿠’라는 이명으로 불렸다고 했다.
77인의 명왕족 모두가 두 사람의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 훈련장을 찾았다.
다른 명왕족들의 분위기도 가르문드나 보라스, 린파와 다르지 않았다. 샤쿠가 과연 진을 몇 수만에 끝장낼지 내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서른이 넘는 명왕족이 ‘열 수 안쪽’을 골랐고, 나머지는 그보다도 적은 수치를 예상할 지경.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투신 반과 진뿐이었다.
“전승자, 각오는 되었나?”
샤쿠가 심장을 빛내며 말했다. 스릉, 가볍게 뽑힌 검에 그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이왕이면 날 진짜로 죽일 마음으로 몰아붙여주면 좋겠군요.”
“뭐?”
“단지 대련일 뿐,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무뎌지거든.”
“하여간, 배짱 하나는 인정해야겠구나. 그러나 지나쳐. 세상에 겸손이 부족한 인간보다 꼴 보기 싫은 것은 드물다.”
진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곧 다른 것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진의 가슴팍에 활활 타오르는 삼각광이 서렸다. 샤쿠의 가슴에서 빛나는 진짜 명왕족 심장과 거의 흡사한 모습.
삼각광을 타고 번진 오러가 브라다만테를 물들이자, 샤쿠의 눈에 살기가 꼈다. 인간이 명왕검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된 살기였다.
“명왕검……!? 설마, 투왕 형제들이 알려줬단 말이냐?”
“그건 알 거 없고. 좋더군요, 당신들의 검.”
선공을 펼친 것은 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