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3화
62화. 나침반 탈취 작전(5)
코젝이 없다는 건, 곧 킨젤로와 지플도 몸을 사려가면서 싸워야한다는 뜻이다.
이곳에 모인 무인과 마법사가 몇인가, 또 그들이 가진 힘은 어떻고. 7, 8성이 즐비하고 9성 대마법사까지 섞여 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이 자그마한 섬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단지 섬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날 수도 없었다. 섬이 있던 자리엔 무인과 마법사들이 뿌린 오러와 마력이 뒤섞여 폭발과 소용돌이, 해일 등의 온갖 재해가 벌어질 것이다.
그 속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마도사도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으며, 아무리 강한 무인도 그만한 소용돌이를 거슬러 헤엄을 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 난리를 벗어난다고 가정해도(가령, 용을 탄다거나), 섬 상황이 그 지경까지 몰리면 모두에게 나쁜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큰 싸움을 룬칸델과 비먼트가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
지플과 킨젤로는 그들이 동맹이었다는 사실과 나침반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 특히 전투 과정에 나침반이 부서지거나 유실되기라도 하면 킨젤로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진과 동료들도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하다. 그 순간 티칸이라는 보금자리를 잃을 것이며, 그들은 세상 어디서도 안전하게 지낼 수 없게 될 터.
‘우릴 다 죽이겠다는 말은 그저 모종의 이유로 시간을 끌기 위한 허세라고 생각했건만, 코젝이 섬에 없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칼로서는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대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이 쓰고 있는 검은 마투구. 분명 콜론에 갔던 백야의 마법사들이 얘기했던 물건이다. 탈라리스가 검은 마투구를 쓴 인간과 제 딸을 코젝으로부터 지켰었다고. 젠장, 그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미도르 엘너, 그의 배 다른 형제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뮤론 지플을 죽인 것도 검은 투구를 쓴 인간이었다고 말이다.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또한, 미리 알았다고 해서 진이 지닌 무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놈은 그때 콜론을 왜 찾았던 거지? 설마 신물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건가? 비궁주와는 무슨 관계지? 설마, 콜론에서 코젝을 반파시킨 게 비궁주가 아니라 이놈이란 말인가?
대체 지플과 무슨 원한을 진 거지? 콜론의 신물과 나침반까지, 지플의 기밀들은 어떻게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거지?
급격히 떠오른 수많은 의문이 칼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사이.
파지직!
뇌전이 시그문드를 감쌌다. 명왕검 평식 벼락, 이제 진은 완급 조절을 하며 싸울 생각이었다.
‘싸우다가 적당한 시기에 탈출해야겠어.’
최고의 결과는 추콘과 칼, 그리고 1층과 도박장 바깥에 있는 모든 하수인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남아 있는 힘으로는 추콘의 극방계 마법을 뚫기도 어려울 뿐더러, 서로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에선 전력을 쏟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이 끝났을 때, 어떤 결과를 유도해야 할까.
검을 뻗기도 전에 결론을 내렸다.
‘칼을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킨젤로 측이 그를 인질로 잡게 만드는 구도가 가장 좋은 수다. 내가 추콘이라면, 칼이 무너지고 내가 도망쳤을 때 칼을 내버려둘 이유가 없지.’
지플과 킨젤로는 서로 전면전을 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눈치.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진이 보기에 킨젤로는 거대 세력의 한 축이 될 수 있는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킨젤로는 약속대로 나침반을 돌려받지 못했고,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일을 망쳤다.
그렇다면 칼이라도 인질로 잡아 지플에 뭔가 요구를 하는 게 킨젤로에겐 그나마 이득일 것이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연히, 킨젤로와 지플의 원한이 깊어지는 건 진에게도 유리한 일.
‘재미있군. 추콘 톨더러, 당신은 곧 내 뜻을 깨닫게 될 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거야, 바보가 아니라면.’
번쩍!
뇌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추콘이 지팡이를 내리쳐 커다란 보호막을 형성했고, 그 속으로 남은 킨젤로의 하수인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보호막이 무색할 만큼, 벼락은 오로지 칼과 그의 부하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큭! 얕보지 마라, 개자식!”
“호칭을 참 자주 바꾸는군. 습관인가?”
살아남은 지플의 호위 기사들은 다섯,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평식 벼락에 조금이나마 적응한 듯, 처음보다는 나은 대처를 보이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보호막을 이용하거나, 벼락이 떨어질 위치를 예측해 피하는 것이다. 검기를 쏴 반격을 하는 기사도 보였다.
추콘과 그의 부하들은 보호막에 틀어박혀 관망하는 분위기.
“추콘 경! 가만히 계실 겁니까!”
칼이 악을 쓰자 추콘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우리 동맹은 이미 끝났고, 방금 네놈은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표정을 지은 채.
챙! 파창!
칼의 기사들이 쏜 검기가 시그문드를 두들겼다. 칼을 포함한 지플의 마법사들은 보호막을 치느라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격을 위해 섣불리 주문을 영창하다가 추콘에게 빈틈을 보이면, 공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벼락을 막는 게 급급한 모양새이기도 했다.
“칼 경! 피신하십시오, 막아보겠습니다!”
“헛소리 마라! 1층엔 저놈의 패거리들이 없더냐? 1층에 있던 특급 마법사들이 아직까지 올라오지 않고 있단 말이다. 추콘 경, 함께 싸워야 합니다!”
추콘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제 칼을 비웃기보다는, 진의 정확한 무위를 파악하려고 정신을 집중한 상태였다.
‘뇌기라는 특수한 힘 때문에 헷갈리고 있었지만, 오러는 8성 이하, 혹은 초입이다. 다만, 실제적인 전투력은 8성 기사들을 한참 상회하는 느낌이고.’
그렇다면 칼이 진의 힘을 조금만 빼놓아도,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추콘이 생각하기에 칼이 진을 꺾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도 부상을 입힐 수준은 될 터. 하나 놈에게 당하기 전에 마탑주의 지팡이를 발동시킬까 우려되는군.’
마탑주의 지팡이엔 룬 문자가 있다. 룬 문자가 발동되면, 4마탑에서 즉시 지원군이 날아올 것이며, 룬칸델과 비먼트가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건 킨젤로는 물론 지플에게도 큰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나, 궁지에 몰리면 칼은 제 목숨을 우선시할 게 분명했다.
‘괘씸하지만, 아무래도 슬슬 칼을 도와 불청객을 먼저 제압하는 게 좋겠…….’
추콘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돌연 벼락이 멎었다.
기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에게 달려들었고, 칼은 처음으로 공격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으며.
진은 또 다른 명왕검을 펼쳤다.
‘평식 압제.’
시그문드가 동시에 달려든 다섯 기사의 검을 잡아당겼다.
어설프게나마 평식 벼락에 대처하기 시작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또 다른 미지의 검이 시작된 것이다.
“억!”
시그문드의 난데없는 인력에 당황한 기사 둘의 목이 떨어졌다. 나머지 셋은 반사적으로 다시 거리를 벌렸고, 진은 틈이 생기자마자 칼에게 몸을 던졌다.
“죽어!”
소리치며 지팡이를 뻗는 칼. 지팡이에서 무수히 많은 얼음칼날이 쏟아지려는 찰나.
가아아악!
스걱!
시그문드가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음칼날은 예정대로 쏟아졌고, 진은 피하지 않았다.
뮬타의 룬과 흑광갑을 믿고 버틴 것이다. 그 결과 옷이 다 찢어지고 양팔 가득 자상과 절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뼈에 박힌 조각은 없었다.
뚝, 뚝……!
순식간에 피범벅이 된 진의 팔과 어깨에서 피와 살점이 떨어졌다.
절세의 명갑들이 아니었다면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당황해서 그런가? 마탑주라고는 못 봐줄 수준이로군.”
콰직! 진이 떨어진 지팡이 파편을 짓밟아 으깼다. 파편에 적혀 있던 룬 문자도 함께 부서졌고, 칼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지팡이가 없다고 마법을 쓰기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나, 최후의 안전장치가 사라진 셈이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 어차피 룬 문자를 발동시켰다간 네놈들도 난처해졌을 테니까.”
그 말에 칼은 물론이고, 방관중인 추콘마저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의 검술과 대담한 승부수 때문이 아니다. 속내를 읽혔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특히 추콘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마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마탑주의 지팡이를 의식하자마자 진이 베어버린 것이다.
진이 팔에 박힌 얼음 칼날을 대충 털어내며 추콘을 쳐다보았다. 이제 알아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눈빛.
‘예상보다는 상처가 깊다. 이제 칼을 마무리 짓고, 빠져나가야겠군.’
치명상은 아니라지만, 팔이 걸레짝이 되었으니 멀쩡하게 검을 쓸 수는 없다.
또한 칼은 지팡이가 잘리는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으나. 애초에 첫 공격마법, ‘빙렬검氷裂劍’은 허수였다. 그가 진짜로 준비한 마법은 다른 것이다.
화륵!
칼의 두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맺혔다.
지플의 비전마법, 청화의 마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으로 지지는 그 마법은…….
콜론에서 뮤론 지플이 사용했던 바로 그 마법이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불꽃 속에서 몸부림쳐라.
칼 지플은 그런 말로 진을 농락하고 싶었다. 청화의 불꽃에 괴로워하며 차츰 전의를 상실해가는 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칼의 입가에 떠오른 회심의 미소는, 1초가 지나기도 전에 굳어버렸다.
가아아악!
화염계의 주인, 진짜 푸른 불꽃의 지배자.
테스가 소환된 것이다.
“테, 테스……!”
추콘의 입이 벌어졌다. 기이한 뇌검과 통찰력도 모자라, 테스라니. 마검사인 줄은 알았으나 섬광포 이후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착각했다.
마법 쪽은 ‘괜찮은’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고.
오러는 바닥을 보이고, 두 팔은 피범벅이 되었을지언정 진의 무기 중 영기와 마력은 여전히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하.”
칼이 자괴감 섞인 한숨을 내뱉자마자 진의 몸에 들러붙으려던 청화가 사그라졌다.
진의 불사조가 테스라는 사실은, 콜론에서 진과 싸운 백야와 미도르 엘너도 알 수가 없었다. 테스를 본 유일한 목격자, 뮤론 지플은 그들이 오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었으니.
“대체…… 네놈은, 무엇이란 말이냐……?”
허탈한 목소리. 칼은 여전히 싸울 만한 마력을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의지가 꺾여버렸다.
그건 곧 패배를 의미했다. 무슨 짓을 해도 칼은 진을 이길 수가 없다. 그가 갖고 있는 마법이 얼마나 대단하든, 마력이 얼마나 높든.
“글쎄, 내가 무엇인지는 알 거 없고.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싶군.”
진의 눈동자가 칼의 뒤편으로 향했다. 추콘이 서 있는 자리였다.
“뒤를 조심하는 게 좋겠어, 칼.”
수욱!
추콘이 쏜 한 줄기 마력광선이 칼의 어깨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