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199화 (198/1,001)

제 199화

64화. 소문과 추적자들(2)

지이익!

시론이 검지로 서신의 밀봉을 베었다.

마지막 편지를 받은 게 벌써 근 7개월 전이니, 실로 오랜만이었다. 말하자면 시론은 요즘의 ‘유일한 즐거움’을 7개월 만에 향유하는 셈이다.

‘오랜만에 마물 피를 뒤집어쓴 보람이 있군. 가주께서 이렇게 즐거워하시다니…….’

칸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최근 카시미르가 전혀 서신을 보내지 않은 덕에 칸까지 속이 타고 있던 것이다. 대체 막내도련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으며, 귀검은 뭐하는 작자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건만.

다행히도 오랜만의 편지는 가주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우는 문장으로 빼곡히 채워진 듯했다.

‘명왕검과 영검이라.’

편지에 묘사된 두 검술이 시론의 눈길을 한참이나 잡아끌었다.

“바깥에 바멀이라는 놈이 활동하고 있다던데, 소식 들었나?”

“예, 본가 회의에서 이름이 나왔었습니다. 페이텔의 계약자일 수도 있다더군요. 단신인지 동료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벨라도 제후국의 섬에서 백랑족 돌격대장 다섯을 죽였고요.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막내인 걸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지겠군.”

“예?”

“함구하라. 또한 기수들이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도록 적절히 조치하고.”

“받들겠습니다.”

시론이 마저 편지를 읽었다.

나침반에 대한 내용은 모두 빠져 있었고, 진이 라프라로사에 다녀온 것과 킨젤로와 지플을 상대한 내용만 가득했다. 비궁의 시리스가 도와줬다는 내용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시론은 카시미르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긴 걸 알고도 고약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귀검은 자신이 아니라, 막내의 사람이니 말이다.

“크하하…….”

시론이 나지막이 터뜨린 웃음에 일대의 땅이 옅게 진동했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가주님.”

“너도 이 대목을 보면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론이 내밀어보인 편지 첫 장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존경하는 시론 경, 어젯밤 술자리에서 진 공자가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제는 아버지와 일합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칸의 표정이 굳었다.

“귀검, 그자가 기어이 실성을 한 모양입니다. 설령 막내 도련님이 그렇게 말했다 한들, 적당히 걸러서 해석하고 알려야 할 것을! 당장 제가 가서 엄중히 경고를…….”

“칸, 명왕족이라는 수인종을 들어본 적이 있더냐.”

“예, 반만년 전 세상의 패자였다는 미지의 종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막내가 솔더렛께서 내린 일종의 시련을 통해, 명왕족들을 만난 모양이다. 그들 중 투신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진의 표현에 의하면 필시 내게 필적할 수준의 강자라더군.”

칸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단신으로 시론에 필적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반만년 전에 멸망했다고 알려진 명왕족의 왕이라니, 칸에겐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막내도련님과 귀검이 감히 거짓을 고하진 않았을 터. 칸이 가만히 시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막내의 논리는, 자신이 그자와 일합을 섞었으니 내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하, 귀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막내 도련님이 아직 무에 대한 식견이 부족해 한 말이라 생각됩니다.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 열일곱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칸은 시론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2세대 순혈 룬칸델들의 열일곱 시절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인물이다.

그중 언제나 최강이라 인정받던 루나조차 열일곱엔 시론과 일합을 섞을 수 없었으니, 서신의 내용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칸.”

“예, 가주님.”

“그 녀석은 한 번도 내게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없다.”

그 말에 칸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나무라려고 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궁금하구나. 과연 막내 녀석이 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지. 네 말대로 단지 식견이 떨어질 뿐이라면 실망이 클 것이다.”

칸은 즉시 시론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시론은 진의 실력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막내 도련님을 조용히 흑해로 모셔올까요?”

고개를 젓는 시론.

“아니, 그럴 것 없다.”

“설마 가주께서 직접 티칸을 방문하시겠다는 건…….”

“그건 녀석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겠지.”

시론이 직접 티칸을 찾으면, 한순간에 세상의 모든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진에게 티칸은 더 이상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게 된다. 온갖 거대 세력이 티칸에 사람을 심기 시작할 테니까.

한 차례 수염을 쓸어내린 시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종이 가진 것 있나?”

“여기 있습니다.”

이내 시론이 펜을 움직여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적는 내내 미소가 가시질 않는 모습.

이럴 때마다 칸은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루나가 왕좌를 포기한 이후, 한동안 완전히 웃음을 잃었던 가주였다.

필기를 끝낸 시론이 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가 적은 것은 편지였다. 그리고 첫머리에 적힌 수신자의 이름을 본 칸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분은……!’

밀봉도 없고, 읽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것도 아니지만. 칸은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급히 편지를 품속에 넣었다. 수신자에게 전달될 때까지도 그는 내용을 살펴보지 않을 것이다.

“칸.”

“예.”

“서신을 전하고, 집사 하인츠에게 내 이름이 적힌 가왕주哥王酒 두 병을 받아라. 한 병은 탈라리스에게 전하고, 한 병은 열흘 뒤에 내게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 * *

1797년 7월 21일.

붉은 복면에 청색 제복을 입은 두 사내가 티칸 자유도시를 찾았다.

그 복장은 비먼트 특임대가 ‘공식적인’ 활동을 할 때 착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붉은 복면은 특임대의 조장들에게만 허용된 물건이었다.

특임대 3조장 코드네임 라츠, 특임대 4조장 코드네임 크리스.

그들이 이동관문에 등장하자마자, 티칸 수비대엔 비상이 걸렸다. 이 평화롭고 한가한 도시에 난데없이 특임대 조장이 둘이나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단 순찰대원에서 수비대장 알리사에게 그들의 방문이 보고되기까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퀴칸텔 님과 엔야를 추적하다가 온 것은 아니다.’

퀴칸텔과 엔야는 현재 비먼트의 비공식 수배자다. 그들을 잡기 위해 왔다면, 둘만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암행으로 왔을 터.

‘설마, 진 공자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건가?’

다행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방문만 갑작스러울 뿐, 그들은 정중한 태도로 카시미르의 저택을 찾은 것이다.

카시미르의 저택은 대외적으론 ‘7인회’라는 칠색조 우두머리들의 거처다. 비먼트의 옛 충신가문 출신으로 구성된 그들 중엔 라츠, 크리스와 안면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

안면이 있다고 해서 가까운 것은 아니다. 7인회는 카시미르와 함께 추방된 이들이므로, 오히려 껄끄러운 관계였다.

도시 곳곳에 대기 중인 칠색조 대원들이 진 일행에게 그들의 방문을 알렸다.

“절 찾아온 게 아닌 건 확실해 보이는군요. 음, 바로 짐작 가는 바도 없고요.”

“혹시 모르니 공자께선 엔야 양, 퀴칸텔 님과 함께 다른 방에 숨어 계십시오. 제가 직접 만나서 의중을 파악하고,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겠습니다.”

긴급 소집된 7인회와 카시미르가 응접실로 나섰다.

카시미르 측도, 특임대 조장들도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마주한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추방된 황자와 충신 가문의 마지막 후손들과 황제 직속 특임대의 만남이니 당연한 기류였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시미르 경.”

그러자 카시미르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특임대 조장들께서. 바쁘실 텐데 용건부터 말씀하십시오.”

대사는 정중하지만 싸늘한 말투.

특임대 조장들은 아랑곳 않고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비먼트 황제의 인장이 찍힌 수표였고, 카시미르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이건 뭡니까?”

“폐하께서 칠색조에 협조를 요청하라고 하셨습니다. 대금은 금화 오십만, 내용은 바멀이라는 인물의 신변확보. 일이 끝난 다음엔 두 배의 금화를 하사하실 겁니다.”

“하하.”

부우욱! 카시미르가 수표를 찢었다.

“카시미르 경, 이건 황실모독죄, 그중에서도 폐하를 직접 모독한 행위에 속합니다.”

“현 황제가 모독을 논할 만큼 명예로운 인물은 아닌 것 같군요, 크리스 조장. 날 놀리고 돌아오라고 시킨 모양인데, 황제에게 충분히 성공했다고 전해주십시오.”

“오해십니다, 카시미르 경. 아시잖습니까? 최근 바멀이 세간의 큰 화두라는 것을. 폐하께선 단지 지플보다 먼저 그와 대화를 나누길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협조를…….”

“이노오옴!”

별안간 카시미르가 벌떡 일어서 소리를 질렀다.

“네놈들 눈엔 옛 대 비먼트 충신들의 후예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내가 황자의 지위를 잃었고, 이들의 충심이 배신당했기로서니. 감히 네놈들 따위가 농락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카시미르가 핏발 선 눈으로 악을 쓰는 반면, 조장들은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라츠가 입을 열었다.

“……폐하에 대한 경의 불손한 언행들은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대신 저희가 휴식을 방해한 점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돌아가겠습니다.”

특임대 조장들이 찢어진 수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 저택을 빠져나갔고, 카시미르는 그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에야 노기를 가라앉혔다.

“오랜만에 나쁘지 않은 연기를 했군.”

카시미르의 분노는 가짜였다. 아니, 분노는 진짜일지라도 조장들에게 그걸 드러낸 것은 의도된 연출에 불과했다.

“경의 언성이 이쪽까지 들리더군요.”

“내가 옛 감정에 휘둘리고, 옛 지위를 잊지 못한 얼간이로 보여야, 황제가 내 가족과 이 땅을 언제든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진은 아직 카시미르가 왜 ‘폐황자’가 되었는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카시미르가 스스로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단순히 나를 놀리려고 사람을 보낸 건 아닐 겁니다. 공자가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입니다, 칠색조가 특임대와 협업하길 바랄 정도라면.”

“퀴칸텔 님과 엔야 때문이겠지요. 제가 검은 투구를 쓰고 그 두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라츠가 본 적이 있으니까요. 비먼트 측은 절 확보하면 둘의 행방도 알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금화 오십만, 좀 아깝긴 하군요. 코스모스 해적단에게 준 돈을 좀 메꿀 기회였나 싶기도 하고요, 하하.”

그때, 제트가 두 사람을 찾아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으리, 카시미르 경!”

“귀청 떨어지겠네, 제트.”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노부인이 칠색조를 후원하고 싶다며 찾아오셨습니다요.”

“음? 그건 간부나 대원들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지 않나. 게다가 신원을 알 수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게…… 후원금이 보통이 아닌지라, 대형 범선에 한가득 금화를 실어온 것 같다더군요, 그래서 대원들이 급히 살펴보았는데, 글쎄 아무도 그분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아무도? 오늘은 특이한 손님이 많은 날이군. 그 노부인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나?”

“저택으로 오고 계십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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