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5화
67화. 마녀 헬루람의 유산(1)
슈체론 남부, 바네사의 집.
오래전, 화룡의 습격에 불타 없어진 바로 그 시골 마을이다.
화전으로도 쓸 수 없게 된 이 땅은 슈체론 왕국에서 완전히 버려진 지 오래라, 드넓은 대지 한가운데 바네사의 집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가주. 얼마 전에 편지를 보내신 것도 모자라, 이번엔 기별도 없이 직접 찾아오시깁니까.”
바네사가 낡은 나무문을 열며 말했다.
좁은 방 한가운데 시론이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바네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앞에 앉았다.
“한창 때 자네가 날 놀라게 만든 것만 하겠나.”
테이블엔 막 끓인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쪼르륵…… 시론이 찻주전자를 기울여 바네사의 잔을 채워주었다.
“칸이 고생이 많겠군요. 이거 끓여놓고 조용히 사라졌을 게 눈에 훤히 보입니다. 차 정도는 혼자 끓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려하도록 하지.”
“뭐, 그 친구가 워낙 잘 우려내긴 합니다.”
호로록, 두 사람이 잠시 차향을 음미했다.
‘이건 마치 자식자랑이 하고 싶은 평범한 아버지 같지 않은가.’
시론의 기사가 되고 반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바네사는 시론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래, 막내 녀석은 어떻던가?”
“첫인상이 좋더군요. 동료들 중에도 쓸 만한 인물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닐세.”
나와 일합이 가능하겠나, 그걸 물어본 것이다. 바네사는 알고도 일부러 대답을 돌렸다.
“후후, 경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입니다. 이토록 안달하시다니요.”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군.”
“진 룬칸델, 그 아이는 충분했습니다. 경과 충분히 일합을 나누고도 남겠더군요.”
미세하게, 시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지도를 넘겨줬습니다.”
“자네가 그것까지 넘겨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능청도 늘어나신 겁니까?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시론이 대답 대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아직 루나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면, 녀석은 그 지도를 받지 못했을 테지.”
그러자 바네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진에게 준 그 지도는 본래 루나를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흑해 전체의 지도를 만들다 우연히 그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시론은 그것을 언젠가 루나에게 선물하고자 아껴두고 있었다.
“경은 물론이고, 저를 포함한 모든 흑기사들이 그 아이에게 기대를 걸었던 시절이 있었죠.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다면, 그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쯤 룬칸델의 모든 것을 거머쥐었겠죠. 우린 우리 일에만 매진할 수 있었을 테고요.”
“날 질타하고 싶은 겐가, 바네사.”
“아뇨, 저와 제 동료들을 질타하고 싶군요. 그 시절, 흑기사들이 맡은 수많은 임무 중 실패로 끝난 건 오직 루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뿐이니까요.”
“그게 어찌 자네들의 탓이겠나. 나와 로사의 잘못이다.”
“하여, 진은 루나처럼 되지 않도록. 제가 뒤를 좀 살펴줄까 합니다. 조슈아, 그 녀석이 워낙 말썽이어야 말이죠. 진을 예의주시하며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양이더군요.”
시론이 고개를 저었다.
“보살핌이 필요한 녀석이었다면 애초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말고 지켜보기만 하게, 가문조차 오롯이 혼자 평정하지 못한다면 적들과 싸우는 건 꿈도 꿀 수 없으니.”
“……그러다 또 루나처럼 되어버리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진이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조슈아의 세력을 감당하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군요.”
“자네가 그래서 지도를 준 것 아닌가?”
바네사가 시론이 방금 한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말라는 대목 때문에 웃음이 나온 것이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오신 김에 술이나 드시고 가시죠. 마침 투벤이 근처에 자리 잡고 지내는 중이니, 연락하겠습니다.”
“투벤, 그 친구도 몇 년 만에 얼굴을 보겠군.”
* * *
진과 동료들은 회의실에 앉아 바네사가 준 지도를 펼쳐보고 있었다.
“……흑해에 지도를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이었군요. 마물이 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대부분의 지역에 독기가 가득해 어디서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카시미르의 말대로, 흑해의 지도를 제작하는 건 그 어떤 국가와 단체에서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지플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작업이라고 알려진 일.
적어도 세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눈앞에 놓인 지도를 보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겼건만, 룬칸델은 이미 지도를 만들어둔 것이다.
지도가 없이도 흑해를 돌아다니는 건 가능했다. 흑해 초입부터, 중앙 지역까지는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건 시론이 흑해를 오가며 자연스레 생긴 것이었다.
따라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마물과 싸울 수만 있다면, 누구나 흑해의 중앙 지역까지는 갈 수가 있었다.
“전대 흑기사들의 피와 땀과 세월이 스민 지도일 겁니다. 또한 가문 내에서도 극비로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련님. 적어도 제가 아는 한, 현 세대의 수호기사들이 흑해에 임무를 나갔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맞아, 길리. 아버지와 전대 흑기사들, 그리고 어머니와 일부 원로만 알고 있는 임무라더군. 기수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정보야.”
“흠, 꼬마 녀석 아버지가 늘 흑해에 있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게다가 헬루람이 기르던 마물이라니.”
헬루람.
그녀는 마수왕 오르갈의 연인이었던 마법사였고, 마법사들 사이에선 ‘어둠계열 마법의 대모’, 혹은 ‘마녀’로 불렸다.
이제는 어둠계열 마법이 유실 및 금지되었으나, 그녀가 사용했던 마법에 대한 묘사는 역사서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있었다.
반면 역사가들은 헬루람을 ‘대재앙’이라 이름 붙였다. 그녀에 대해 서술한 세상의 모든 역사서는 온통 파괴와 학살의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어김없이 세상엔 거대한 비극이 일어났다.
천오백년 전, 정체불명의 역병, ‘광인병’이 서대륙을 초토화시킨 것부터 시작해 천이백년 전의 마신강림, 천년 전의 북대륙 대폭발, 칠백년 전의 사산아 사태 등등.
헬루람이 일으켰다고 추정되는 재앙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과연 인간이 의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수준의 재앙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들이 많았으나.
오백년 전, 성국수호전 당시 헬루람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왕들을 소환하는 걸 본 다음엔 그런 논란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신 학계엔 새로운 논쟁거리가 생겼다. ‘헬루람’이 과연 1인인지, 아니면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다수의 마법사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자를 주장했다. 그녀의 추정 활동 기간이 천오백 년을 가뿐히 넘어서니 당연한 일.
“괜히 건드렸다가 그 여자한테 보복당하는 것 아니야? 약간 찝찝하군.”
퀴칸텔이 그렇게 말하자 무라칸을 제외한 모든 동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퀴칸텔의 입에서 ‘보복이 두렵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헬루람이 개인인 듯 말했다는 이유였다.
“마녀 헬루람이 단체가 아니라 개인을 뜻하는 말인가요?”
엔야의 물음에 퀴칸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명이다. 그 여자는 반마야, 인간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수명은 마족과 똑같지.”
진은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전생의 스승, 발레리아는 헬루람을 만난 적이 있었고, 그때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을 진에게 이야기해준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는 존재 자체가 저주다. 온갖 마신과 역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유일한 존재고, 신들도 헬루람이 깨어 있을 땐 웬만하면 계약자를 찾지 않을 정도야. 마수왕 오르갈이 헬루람의 저주를 다 견디면서 그녀와 지낼 땐 용들도 찬사를 보냈지.”
“세상에, 그럼 제가 교과서에서 본 헬루람이 일으켰다고 추정된 대재앙들이 전부 사실이었단 말이에요?”
퀴칸텔의 추가 설명에 놀란 엔야가 제 입을 가렸다.
“어, 사실이다, 광팬. 용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 흐음, 마물. 헬루람이 기르던 마물이라…… 퀴칸텔, 뭐 생각나는 것 없냐?”
“설마 거기로 진을 보내게? 헬루람이랑 엮일 수도 있다니까?”
“크하하, 나나 꼬마는 저주에 면역이라서 그 여자랑 엮여도 상관없어. 그리고 안테 산맥의 공포인지 뭔지 하는 인간의 말에 따르면, 그 마물은 룬칸델이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안 찾는 걸 보면, 죽은 것 같은데?”
“마지막 활동이 삼백 년도 더 되긴 했는데, 죽진 않았을 걸.”
퀴칸텔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계속해서 무라칸을 말렸다.
당연하게도, 진은 무라칸과 같은 의견이었다. 바네사가 직접 ‘또 다른 시험이자 상’이라고 언급한 지도를 찝찝하다고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린 상입니다. 거절하면 제게서 뭘 앗아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도련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주께서 내리신 걸 방치하거나 거절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카시미르와 알리사, 제트도 고개를 끄덕이자 퀴칸텔로서도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마물이 있는 곳까진 나와 무라칸이 동행한다. 그 이상은 독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으니, 거기까지라도 챙겨줘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겠어.”
“미물도 데려가자, 퀴칸텔. 식사 챙길 사람 있어야지.”
“……저 예전에 그래도 황자였습니다, 여러분.”
“너 요리 잘 못해?”
“못합니다.”
“그럼 너 말고 제트나 데려가야겠군.”
“이 제트가 또 한 요리 합지요!”
“흑해에 저런 약골을 데려간다고? 안 돼. 그냥 카시미르 데려가. 아니, 라트리가 더 나으려나? 요리 잘하잖아.”
“전 요즘 다과점이 너무 바쁘고, 아직 제가 없으면 유리아가 위험해서…… 대신 상큼상큼딱딱 쿠키는 넉넉하게 싸드릴 수 있어요.”
쾅!
돌연 카시미르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 깜짝이야. 미쳤냐?”
“이래봬도 저도 세상에선 귀검이라 불리는 무인이자, 칠색조의 수장입니다! 고작 잡일이나 거들러 여정에 함께하는 건,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 그냥 조용히 다녀와. 라트리 님은 용인데 다과점도 하는 걸.”
“자기까지 이럴 거야? 나 카시미르야. 귀검 카시미르 알프리온이라고.”
저, 식사는 그냥 제가 준비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다들 쓸데없이 열 내지 말고…….
진이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무라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미물이랑 제트를 같이 데려가면 되겠네. 제트가 식사 챙기고, 각종 잡일 도맡고, 미물은 마물 썰어.”
“그런 조건이라면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 진은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진, 무라칸, 퀴칸텔, 카시미르, 제트. 그렇게 흑해로 떠나는 다섯 사람이 정해졌다.
어쩐지 진은 카시미르가 안쓰러웠지만, 위로해주기엔 그가 너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