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214화 (213/1,001)

제 214화

69화. 청새 군도 32번 섬의 비밀(4)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마치 콜론에서 탈라리스가 코젝을 상대로 거대 검기를 난사했던 그때처럼, 시그문드를 뻗을 때마다 날카로운 광휘가 번졌다.

뇌기를 가득 머금은 검기가 허공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 위력에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묵직한 파공음이 일었고, 그 다음엔 겹겹이 충격파가 퍼지기까지.

‘하늘이 돕는군.’

시그문드가 그람의 잔존 사념에 각성되지 않았다면 분명 위기에 몰렸을 터.

물론 시그문드의 힘에 기대지 않아도 10분을 버티는 게 가능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무라칸의 영기 해방에 율리안의 화신 상태가 풀리지 않는 경우의 수에 대비할 수는 없었다.

또한 율리안을 제압한 이후에, 다른 적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이곳은 조슈아의 땅이니까.

[큭……!]

한창 비명을 질러대던 율리안이 다시 진에게 시선을 맞췄다. 자신이 방금 ‘공포’에 질렸다는 사실이 굉장히 수치스러운 듯, 미간을 잔뜩 구긴 얼굴.

[치워라!]

이내 페이텔이 하르밀라를 검처럼 휘두르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진의 검기들이 일제히 쓸려나갔다.

“내려와, 계속 떠 있지 말고.”

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율리안을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궁술사를 상대할 땐, 무조건 거리를 좁혀야 했다.

콰앙-!

율리안이 황급히 하르밀라를 양손으로 받쳐 검격을 막았다. 그러나 충격파가 율리안의 몸을 직각으로 추락시켰고, 진은 반동에 조금 더 떠올랐다.

파지직!

체공하는 동안 소모된 만큼 다시 뇌기를 불러 모았다. 사방에 산재되어 있는 깨진 뇌기들이 시그문드로 달라붙으며 빛의 궤적을 그렸다.

그 궤적은 곧장 번개가 되어 바닥에 처박힌 율리안을 덮쳤다.

(죽어라!)

잔존 사념의 목소리에 시그문드가 진동했다. 동생, 페이텔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죽어, 죽어! 크하하, 죽어어!)

진은 벼락이 끝나자마자 후속타를 준비하느라 잔존 사념의 미치광이 같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스가악……!

지면에 닿자마자 시그문드를 휘둘렀다. 막 몸을 일으키던 율리안은 이번에도 어정쩡한 자세로 간신히 방어에 성공한 모습.

율리안이 쓰러질 듯 옆으로 밀려나며 바닥에 있던 돌무더기와 진흙이 튀었다. 일순 진흙에 진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리고 진흙이 눈동자를 벗어나자마자 하르밀라의 뇌전이 진의 코앞을 겨눴다.

그 뇌전은 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어딘가에 닿아 폭음을 일으켰고, 진은 재차 시그문드로 율리안의 몸통을 올려쳤다.

[커헉!]

잔존 사념의 힘 덕에 완력에서는 확실히 진이 우위였다. 율리안은 검격을 막을 때마다 공처럼 이리저리 튀고 있었다.

대부분 방어에 성공했다곤 하나, 화신체가 아니었다면 이미 충격에 온몸의 뼈가 다 부서졌을 것이다.

겉보기엔 진이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닌 힘은 화신체인 율리안이 더 높다고 볼 수 있으나.

페이텔은 강자와의 싸움이 익숙하지 않은 신이었다.

언제나 하늘에서 번개로 미물들을 벌하기만 했으니 전투 자체가 서툴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 페이텔에게, ‘투신 반의 후예’가 보여주는 무위는 가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진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든 셈.

때문에, 그때쯤 베리스를 업은 채 도망치고 있는 쿠잔은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괴물이군…… 정녕 델키에서 마주친 그놈이 맞단 말인가.’

쿠잔은 시그문드가 진의 무위를 강화시킨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눈에 진은 흔히 알려진 ‘룬칸델의 기수들’을 능가하는 초인으로 보이고 있었다.

‘진 룬칸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와 베리스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여전히 지옥이 펼쳐진 듯 섬 전체에 낙뢰가 빗발치고 있었다. 쿠잔은 타이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감히 네깟 놈이 나를 능멸한단 말이냐!]

더 휘둘릴 생각이 없는 듯, 율리안이 눈을 부릅뜨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진은 그가 시위를 당기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려 했으나.

별안간 발밑에서 폭발하는 뇌기에 달려들 수가 없었다. 진의 움직임을 묶어두기 위해 율리안이 지면 전체를 뇌기로 덮어버린 것이다.

이어 뇌우에서 뇌전이 쏟아졌다. 율리안의 근처를 완전히 파랗게 물들인 그 뇌전은, 모두 하르밀라의 화살이었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화살이 준비되자마자 연사가 시작되었다. 하나하나가 섬을 끝장내기에 충분한 위력이 담긴, 뇌전 다발이 진을 덮치고 있었다.

투신기 4검 침식.

진은 반사적으로 그 검을 펼쳤다. 첫 번째 뇌전이 닿기 전에, 시그문드의 검신이 먼저 땅을 파고들었다.

바네사를 상대로 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제히 가라앉은 뇌기들이 하르밀라의 뇌전을 짓눌렀고, 그래서 뇌전은 진을 유린하는 대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뇌기에 침식된 지면 곳곳에 원이 생겼다.

‘이 정도였다면, 바네사 경도 쳐낼 수 없었을 테지.’

번개를 부르는 원이다.

율리안이 띄운 거대한 뇌우가 무색해질 만큼, 온 하늘에서 재앙과도 같은 우레가 쏟아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소음.

그리고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이 강렬한 빛과, 무릎을 흔드는 묵직한 진동.

잠시 그런 것들이 32번 섬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우레가 지면을 강타할 때마다 지진이 일었고, 그중 몇 개는 율리안의 정수리에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비명은 폭음에 가려 들리지 않았고, 흐트러진 모습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율리안은 우레 속에 갇힌 채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쐐기를 박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다음 일격을 잇기로 했다.

‘몸이 버텨줄까?’

시그문드 덕에 무위가 대폭 상승했다고 하나, 단죄까지 완벽하게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내 진은 무라칸과 약속한 10분이 다가오고 있으니, 승부수를 띄워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시금 시그문드가 뇌기를 토했다.

그러나 내내 맹렬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은 버거운 모양새였다. 율리안이 페이텔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제약이 있듯, 진이 사용하는 그람의 힘에도 한계가 있었다.

투신기 3검 단죄, 적을 끝장내기 위해 고른 검.

검신에 충분히 뇌기가 차오르자마자, 율리안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율리안은 우레에 가려진 진의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었고, 그가 달려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다만 통찰력을 통해 위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우레 사이로 하르밀라가 겨눠졌다. 놀랍게도 그곳은 정확히 진이 달려오고 있는 방향이었고, 하늘에 뜬 뇌우가 뭉개지며 하르밀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더 이상 화살이라 부를 수 없는 비대한 뇌전에 시위가 밀려났다.

막 앞에 떨어진 우레 속에서 단죄의 송곳이 삐져나온 순간, 율리안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좀 당해줬다고 너무 우쭐거렸구나, 벌레.

율리안이 시위를 놓자 두 뇌기가 부딪혔다.

하르밀라를 떠난 뇌전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단죄의 송곳을 박살내버렸다.

송곳을 이루고 있던 뇌기가 무참히 부서지는 와중, 뇌전은 진의 머리를 향해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지고 있었다.

벌레를 죽였다!

충분한 고통을 주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그건 놈의 수호룡을 죽이는 걸로 대신하면 될 터. 도취감에 입가가 가늘어지려는 찰나.

율리안은 또 한 번, 감당키 어려운 두려움에 새된 비명을 질러대야만 했다.

[그아아악! 테, 테스!]

화르륵……!

불꽃, 진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째서인지 시퍼런 불꽃이 빛나고 있었다. 유일한 청색 불사조, 테스의 불길이 율리안을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참 겁이 많은 신이로군.’

테스를 소환해야겠다는 생각은, 놈이 처음 ‘투신 반’의 이름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본 직후였다.

반을 두려워하는 신이 테스를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본신이 있는 화염계에선, 테스는 가벼운 숨결만으로 이 세상의 신을 소멸시켜버리는 위엄을 지녔다고 들었으니까.

물론 놈이 테스를 잘 모르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뇌기에 시야가 가려진 사이 시그문드를 떨구고, 측면을 노리는 건 단죄를 펼친 직후 결정한 것이었다.

그림만 압도하는 것일 뿐, 힘의 차이가 있다는 건 아까부터 느끼던 문제였다. 그걸 알고도 정면승부를 고집할 이유 따윈 없었다.

[이 교활한……!]

진에게는 더없는 칭찬이나 다름이 없었다.

비록 진짜 힘의 1할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지만, 신은 신이다. 당연히 교활하게 상대해야 했다.

진은 아마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교활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스릉.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율리안은 칼날과 검집이 마찰하는 그 차가운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브라다만테가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시커먼 영기가 브라다만테의 광채를 뒤덮었다.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진이 율리안의 옆구리로 브라다만테를 내질렀다.

푹……!

검신이 몸을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뼈와 살을 찌를 때의 바로 그 감각. 화신체를 통해 강림한 이상, 페이텔을 지탱하고 있는 건 결국 인간의 몸에 불과했다.

[커헉!]

피를 토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빼내는 율리안.

불안에 젖은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이어서 테스의 청화가 율리안의 몸을 불살랐고, 그는 중압에 억눌린 채 바닥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진은 오한을 느꼈다. 상대를 막 꺾은 참이건만 왜인지 둑이 터진 듯 불안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불안의 근원이 보였다.

뇌궁 하르밀라가 뱀처럼 변해 율리안을 휘감고 있었다. 치명적인 자상에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고, 율리안은 웃고 있었다.

[인정하마, 네놈이 꽤 대단한 벌레라는 걸. 그러나…… 난 신이다. 온몸이 조각난다 한들, 죽지 않는다는 뜻이지. 한낱 필멸자가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겠지…….]

음울한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찔러도, 베어도 죽지 않는다면 진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왜, 실망스럽더냐? 계속 덤벼보…….]

“아! 거 새끼, 쫑알쫑알 말 더럽게 많네.”

영기 해방을 끝낸 무라칸이 진과 율리안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진을 뒤로 빼내며 퉷, 침을 뱉었다.

[……뭐라고?]

“보아하니 영기에 당한 적은 없는 모양인데. 지금부터 내가 너한테 재밌는 경험을 시켜줄 거야.”

[솔더렛이 자신의 용들을 아낀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지나치구나. 네놈부터 죽여 달라는 뜻으로 알겠다.]

“경박하기는. 네 형은 죽기 전에도 나름 품위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흐흐, 흐흐흐흐.”

[왜 웃는 것이냐?]

“화신체에 깃들었더니, 본신이 지닌 힘의 5할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나. 웃음이 나오지 않겠어?”

지금 내가 바로 그런 기분이거든.

무라칸이 뒷말을 잇자 진 한 사람을 제외한, 섬의 모든 그림자가 그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온 섬을 뒤덮고 있던 율리안의 뇌기가, 촛불이 꺼지듯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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