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9화
71화. 예언의 아이
1797년 10월 7일, 진이 확인한 것은 휴페스터의 한 소식지였다. 그 소식지는 나흘 전 진행된 슈체론 왕가의 기사 서임식을 전면에 알리고 있었다.
(이번 슈체론 왕국의 중앙 기사 서임식은 국왕 루몬 슈체론 대신, 이례적으로 1왕자 톨리안 슈체론이 주관하였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룬칸델의 조슈아 룬칸델을 비롯해 맥로란, 투코, 닐트로, 켄 가 등의 차기 가주들이 톨리안 왕자의 서임식에 참관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톨리안 왕자가 계승 경쟁을 종식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으며, 과거 시론 룬칸델이 톨리안 왕자에게 수호기사를 내어준 사실이 다시 조명…….)
진은 조슈아가 ‘나흘 전’ 화산을 펼치고 온몸이 분해되어 사망한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사흘 전’을 알리는 이 기사는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었다.
진이 한동안 소식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자 길리가 걱정스러운 듯 곁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역시, 뭔가 있었군. 이렇게 쉽게 죽을만한 놈이 아니긴 했지.”
길리와 동료들은 청새 군도에서 있던 일들을 이미 전해들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 역시 조슈아를 살아있는 듯 묘사한 소식지를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가 조슈아 룬칸델의 얼굴을 착각했을 리도 없고…… 이상하군요. 공자가 죽인 게 설마 대역이었다거나, 부바르 가스톤이 변신시킨 인물이었다거나…….”
카시미르의 말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대역이나 변신일 가능성은 낮아요. 놈이 펼친 결전기는 명왕족 투왕이 두 팔을 잃을 정도의 위력이었습니다. 룬칸델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위력이었죠. 다른 검술을 사용했다면 모를까.”
많은 무가들이 비기와 결전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룬칸델의 검은 ‘축복받은 육체’가 없으면 10성 기사라 할지라도 흉내조차 불가능했다. 몸이 버티질 못하는 것이다.
“하긴, 대역이라면 오히려 슈체론 기사 서임식에 등장한 조슈아가 가짜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 부분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아무래도 그 뱀 같은 놈이 뭔가 술수를 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슈리처럼 저주에 걸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엔야가 슈리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소곤 말했다.
“그랬다면 몸이 분해되었을 때 재생되는 모습이 눈에 띄었어야 해.”
“도련님, 그러면 혹시 누메루스의 눈물을 사용했을 가능성은요?”
“누메루스의 눈물은 발현될 때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는다고 하더군. 조슈아가 죽을 때도 오러 때문에 온통 빛나긴 했지만, 모양새가 전혀 달랐어.”
“하, 나는 그때 계속 자고 있었으니…… 답답하군. 대체 네 큰형이라는 놈은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복제?”
진이 그 단어를 내뱉자 동료들이 시선을 모았다.
“공자, 복제라고요?”
“어쩌면 복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새 군도에서 놈이 내게 보인 태도와 이야기들을 돌아보면, 조슈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는 판단할 수 없어요.”
인간을 복제하는 건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만큼,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당장 슈리가 지닌 불사의 저주나, 부바르가 만든 나침반과 마신석 같은 것들도 불과 얼마 전까진 불가능으로 알려진 것들이었다.
“계속 얘기해보십시오.”
“제 가정은 이겁니다. 놈은 복제한 자신을 여럿 보유하고 있고, 그중 하나를 청새 군도로 보낸 겁니다. 페이텔의 계약자, 율리안은 분명 놈의 중요 전력 중 하나였을 거고, 섬이 뇌전으로 뒤덮였으니 율리안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한 거죠.”
진이 율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화신의 여파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실신한 상태였고, 구속구에 묶여 있었다.
“아마 놈은 율리안이 폭주를 일으켰다고 인지했을 겁니다. 쿠잔과 베리스, 그놈들과 율리안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걸 제압하려고 섬에 찾아왔다……?”
“예. 호위도 없이 혼자 온 이유는, 폭주한 율리안에게 다른 유능한 부하를 잃고 싶지 않아서. 혹은 청새 군도에 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일 테고요.”
당시 조슈아는 집행기사조차 없이 혼자 자그마한 배를 타고 청새 군도를 찾아왔다. 진은 처음부터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충분히 혼자서도 율리안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기사를 대동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평소 조슈아의 성격을 미루어보면 납득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물며 가르문드와 싸울 땐 자폭까지 했으니까요.”
“그 비열한 새…… 아니, 2기수가 자폭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역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도련님. 명왕족을 상대로 밀리고 있었다지만, 그렇게 목숨을 포기할 작자가 아닙니다.”
“놈은 청새 군도에서 날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눈치였어. 그러다 날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뒤, 영기를 탐내고 있었다는 것까지 실토했지. 내 도발에도 끝까지 날 죽인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놈은 나를 잡고 솔더렛의 계약을 빼앗을 미래만 생각했던 거야.”
-그건 본래 나의 힘이어야 했다.
조슈아가 진이 펼친 영기를 보자마자 했던 말.
그때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묘한 이야기였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영기의 주인이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는 어조인 것이다.
“그런데 가르문드가 등장해서 상황이 역전되었지. 놈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고…… 결정을 내린 것 같아. 날 붙잡는 건 미루더라도, 내 전력을 떨어뜨려놔야 한다고.”
“화산의 힘에 도련님까지 사망할 수 있다는 건 계산하지 않았을까요?”
“놈도 9성 기사야. 가르문드의 힘이라면 충분히 날 지켜줄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지. 그래서 화산으로 가르문드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든 후, 내게서 계약을 강탈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게 내 가정이야.”
진이 생각하기에, 조슈아의 목숨이 ‘하나’뿐이라면 자폭은 결코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여럿이라면, 가르문드라는 전력을 없애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슈아가 아는 한 가르문드는 진이 지닌 최강의 전력이었을 테니 말이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섣불리 긍정할만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동료들은 진의 가정이 사실일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군요. 만약 공자의 말대로 청새 군도의 조슈아가 복제였다면,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습니다.”
“공자, 시론 경을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알리사의 물음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이건 후계 전쟁입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내 무능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확실한 증거조차 없습니다. 내가 직접 죽음을 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단이 없죠.”
“그것도 그렇군요.”
“슈체론 기사 서임식에 나온 조슈아가 대역이든, 내가 만난 놈이 복제든, 아니면 다 틀린 이야기든. 지금은 가설을 세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군요. 율리안이 깨어나면 뭐라도 정보가 더 나올 겁니다.”
“쿠잔과 베리스. 칠색조 대원들에게 그 두 인물에 대한 수색도 지시하겠습니다.”
청새 군도를 빠져나올 땐 그들을 오래 찾지 못했다.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고, 행여 조슈아의 사람들이 섬을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굳이 먼저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이 시기에 청새 군도 쪽에 사람을 보냈다가 꼬리를 밟힐 수도 있고요. 살아만 있다면, 분명 먼저 신호를 줄 겁니다. 자신들의 진짜 원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요.”
* * *
덜덜덜…….
의자에 앉은 남자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식은땀과 고열,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시때때로 정신이 분절되는 충격.
그리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패배감.
이 모든 것은, 조슈아가 몸을 하나 잃었을 때 겪는 현상이었다.
후우웅…….
그의 앞으로 시커먼 기운이 뭉쳐졌다.
영기, 조슈아가 욕망하는 바로 그 힘.
이내 영기 속에서 한 여인의 형상이 빚어졌고, 여인은 조슈아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룬칸델의 주인이 될 사람이 이런 지하실에서 혼자 떨고 있다니, 딱하기도 하지. 꼭 버려진 채 비를 잔뜩 맞은 고아라도 보는 것 같군요. 기분이 어때요? 고아.”
지하실의 어둠이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강렬한 호박색을 띤 두 눈동자만이 번들거리는 모습.
“비웃으려고 온 것이냐?”
“예, 맞아요. 비웃어주러 왔어요. 하하, 이 멍청한 놈! 대체 자폭을 왜 했죠? 내가 당신의 몸을 만들어주는 게, 쉬운 일처럼 보이던가요?”
조슈아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여인을 노려보았다.
“노려보지만 말고 변명을 좀 해봐요. 정말 그게 최선이었어요? 그렇다면 실망인데.”
“막내가 소환한 명왕족을 죽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꺄하하하!
여인이 대뜸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뚝, 웃음을 그친 채 이를 악물었다.
“자, 여기서 어리석은 이를 위한 문제 하나. 과연 가르문드라는 명왕족은 사망했을까요? 아뇨, 그자의 본체는 애초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명왕족이 살아있단 말이냐?”
“이미 죽은 세계에 갇혀 있긴 했지만, 본체가 멀쩡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살아있는 셈이죠. 즉, 당신은 내가 만들어준 몸을 하나 그냥 버린 꼴이랍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고 있으나, 여인의 눈빛엔 짙은 경멸이 스며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왜 예언이 당신 같은 사람을 가리켰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죠. 당신의 첫째 누이나, 막냇동생이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디푸스나 메리 정도만 되었어도 좀 편했을 텐데…….”
가슴속이 후벼지는 것 같은 치욕.
“아니면 본래 예언이 가리켰던 당신의 아비. 그자가 운명을 거슬러 창성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전에 나를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당신 같은 반푼이를 도울 이유 따윈 없었겠죠?”
조슈아는 가만히 여인의 야유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여인은 자신을 결코 떠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 한참을 비웃다가 언제나처럼 고개를 조아릴 것이다.
후…….
여인이 악담을 그만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아요. 당신의 막냇동생이 명왕족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더 중요한 시기에 깨달았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요.”
여인이 조슈아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슈리. 그 아이의 행방도 찾았고 말이에요. 슈리까지 진이 데리고 있는 건 더 속상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예언의 아이여. 새 분신을 만들어드리죠.”
“이번엔 얼마나 필요하지?”
조슈아의 물음에 여인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주신 것으로, 재료는 아직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