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3화
76화. 쪽박과 독박(8)
“하여간 주인 닮아서 불꽃도 지랄 맞네, 대머리 되는 줄 알았다.”
무라칸이 손바닥에 듬뿍 영기를 형성해 제 머리를 빗으며 구시렁댔다. 놀랍게도 타들어간 머리가 영기를 머금으며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영기 내버려두고 왜 몸으로 껐어?”
“그러게, 왜 그랬지? 순간 마음이 급했다보니, 빌어먹을.”
“음…… 어쨌거나 고생했다. 넌 방금 마법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일을 한 거야. 목격자는 나밖에 없지만.”
“나중에 누가 네놈 평전 쓴다고 하면 꼭 이 일화 넣으라고 말해라.”
“알았다.”
멸살암천화염옥 최종형.
마법서를 쥔 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전생에선 발레리아 덕에 온갖 희귀한 마법서를 접했고, 현생에선 첸미와 키다드 홀의 마법서를 직접 몸에 새기기도 했지만.
리올 지플의 유산은 그야말로 마법 사史의 마스터피스였다. 당대 최강을 넘어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를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의 최대 역작.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이보다 기쁜 일을 또 겪기는 어려울 터였다. 당장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일단은 품속에 조심스레 챙겼다.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돌연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끄으으…….”
“추콘?”
추콘 톨더러.
완벽하게 목이 잘린 수잔과 달리, 추콘은 가까스로 생명줄을 붙잡은 모양새였다. 극방계 마법의 비전절기가 단장의 칼이 꽂힌 순간, 보호막을 일으켜 심장을 보호한 것이다.
하지만 다가가서 살펴보니 회생은 어려울 것 같았다. 보호막은 죽음을 잠시 유예시키기만 했을 뿐, 그는 이미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채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진은 그에게 싸움의 승패가 정해졌을 때, 승자가 으레 할 수 있는 말을 전했다.
“추콘 톨더러. 남길 말이 있나?”
커흑, 컥. 피거품을 토하는 추콘의 눈빛에 어두운 한이 맺혀있었다. 적 앞에서 자신이 모시던 주군의 칼날에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 내 마법…… 서를.”
간신히 내뱉은 그 몇 마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리올처럼 유산을 남기고 싶어 했다. 자신이 평생을 이룩한 고유한 업적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걸 원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게다가 배신당해 최후를 맞이했으니, 적에게라도 마법서를 넘기고 싶은 심정일 수밖에.
“어디에 있지?”
“영원…… 삼, 로클라…… 바.”
영원창고의 3번 보관실, 비밀번호는 로클라바.
추콘은 그 말을 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초점 없이 어두운 눈동자를 감겨주는 진.
“영원창고의 3번 보관실이라면 꽤나 가치가 높게 책정되긴 한 모양이군. 뭐, 나름 괜찮은 방어마법이긴 했어.”
무라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진도, 무라칸도 추콘이 마법서를 남겼다고 해서 딱히 동정심이 일지는 않았다. 그가 관여한 양민 대상 실험은 이것뿐만이 아닐 테니, 유언이라도 들어준 것을 추콘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자.”
허물어진 성내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머츄얼과 생존자들을 데리고 성국으로 돌아가서, 오늘 일을 정리하고 다음 싸움을 해야 했다.
‘킨젤로에 정체를 들켰다. 단장이라는 놈은 정체가 뭔지 감도 안 잡히는군. 무라칸의 말대로 마족인가?’
철을 형성하는 능력.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검을 만드는 것까진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공간 이동까지 하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단장이 천 년 이상 살아온 존재인 것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오래, 명왕족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존재했을지도 몰랐다.
‘명왕족을 복원하려는 건 당연히 단장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일일 것이다. 놈은 내 형제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조만 살려서 데려간 건 복원 작업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일 거고.’
또한 테마르와 모종의 관계가 있던 것도 확실해 보였다.
‘폭주는 테마르가 아니라 네가 했다’는 단장의 말에 무라칸이 보인 반응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마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직면한 사람처럼 넋이 나갔던 것이다.
그간 무라칸과 지내며 종종 왜 테마르와 싸웠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무라칸은 그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고, 진은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녀석이 알아서 이야기를 해주겠지. 테마르와 관해 내게 알려야 할 것이 있다면.’
생각하는 사이 성내로 들어섰다.
아까 찾았을 때와 달리 곳곳이 심각하게 파손된 모습이었다. 무라칸의 무자비한 공격이 그토록 이어졌으니 당연한 일.
산더미처럼 쌓인 부서진 석재들을 치우며 머츄얼이 있던 연구실로 향했다.
폭발 마법이 펼쳐진 연구실은 실험에 관련된 시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조리 부서져서 잔해가 굴러다녔다. 그래서 비밀 통로의 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머츄얼! 머츄얼 실라!”
“여, 여기 있습니다……!”
“여깁니다!”
머츄얼이 아닌 낯선 남자들의 먼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잔해를 밀고, 바닥을 통째로 뜯어냈다.
비밀 통로가 열리자 나타난 것은 살아남은 신민들의 공포에 질린, 눈물범벅이 된 얼굴과 진이 옮긴 마력 주입기.
그리고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는 머츄얼이었다.
“……성자께선 저흴 구하고 아율라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부디 성자님의 시신을 본국으로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생명력까지 짜내 신민들에게 마력을 주입하고 아율라의 품으로 향했다. 성자로서 사명을 다한 것이다.
‘애초에 이들을 살리려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주라고 했던 건가.’
일반 치유사가 아닌, ‘성자’임에도 머츄얼이 이들을 구하다 죽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신민들의 몸 곳곳에 실험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광심장이 몸 바깥에 튀어나왔거나, 팔 하나만 골렘화가 진행됐거나, 꼬리가 튀어나왔거나.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아슬아슬한 상태에 놓여있었으니 살리려면 그녀로서도 마력 주입기에 생명력을 모조리 쏟는 수밖에 없었다.
“이걸 당신께 전해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반드시 성왕 폐하께 전해져야 한다며…….”
로브를 벗어 그녀의 시신을 감싸자, 한 신민이 책과 펜던트를 내밀었다. 머츄얼의 펜던트였다.
책은 일기였다. 그녀는 성왕의 명을 받아 암흑마법회의 첩자가 된 후, 하루도 빠짐없이 목숨을 걸고 이곳의 실태를 기록했다.
“바깥으로 나가시오. 돌아갑시다, 다들.”
* * *
강림제의 마지막 날.
아율라가 축복을 내리기라도 한 듯 반켈라의 수도는 눈부신 태양빛에 물들어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광장으로 모여든 인파 한가운데, 순백색의 거대한 마차가 우뚝 솟아있었다.
가짜 미클란과 라니가 그 마차 위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호위를 위해 순백의 마차를 에워싸고 있는 서른 명의 황금방패회 성기사와, 마차의 뒤로 펼쳐진 성자들의 행렬만으로도 강림제를 보러 성국을 찾은 이들에겐 크나큰 구경거리였다.
광장은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성왕의 축성을 받기 위해 모여든 신민과 각국의 양민들, 귀족들 모두가 축성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왕 폐하!”
“폐하아!”
성왕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에 젖어 목 놓아 소리치는 신민들이 많았다. 주로 큰 병을 갖고 있어 고통 받는 하층민들이 그랬다.
병 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성왕 축성식은 삶을 연명할 수 있는 큰 기회이자 희망이었다. 축성을 받으면 병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왕의 신성력엔 한계가 있기에, 매년 강림제 때 축성의 행운을 누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십여 명 정도가 성왕의 신성력을 직접 받는 진짜 축성을 받았고 나머지는 단순히 언어를 통한 축복을 받았다.
후자는 실제적인 운명이나 현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성왕과 말을 섞어보고자 안달난 이들이 천지였다.
이내 성왕이 흔들던 손을 내리자 시끄럽던 광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친애하는 아율라의 자녀들, 그리고 나를 보러 세계 각지에서 찾아와주신 모든 여러분께 우선 감사를 전하겠소. 성왕 미클란이오.”
와아아!
“매년 그랬듯, 오늘의 축성식에도 내 소중한 딸. 라니 살로메가 늙은 나를 대신해 축복문을 읽어줄 것이오. 내일은 쉰 목소리로 기도하게 될 딸아이를 위해 박수 한 번 부탁드리겠소.”
어깨를 다독이며 딸을 향한 애정을 과시하는 가짜 성왕.
라니는 그런 가짜 성왕의 팔짱을 끼며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짜는 평소 소박한 언행을 사용하고, 딸을 죽도록 사랑하는 진짜 미클란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끝나자 라니가 축복문을 펼쳤다.
“성왕 폐하의 축성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차가 이동을 시작하면, 다치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질서 있게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행사가 으레 그렇듯, 신성력이 소모되는 ‘진짜 축성’을 받는 이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세인들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마차는 앞으로 나아가며 내정된 축성 대기자들이 있는 곳에서 한 번씩 멈췄다.
그때마다 성왕은 마차에서 내려 그들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축성을 내렸고, 라니는 축복문을 읽었다.
“아율라의 뜻과 마음과 사랑이 그대와 함께하사…….”
그런 식으로 순조롭게 마흔 명 정도의 신민에게 진짜 축성이 내려졌다. 다리가 불편한 자는 축성을 받고 걷기 시작했고, 눈이 어두운 자는 새 빛을 보았다.
그 모습에 감동 받은 구경꾼들이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치는 와중.
내정자가 아닌, 로브를 뒤집어쓴 한 신민 무리가 인파를 빠져나와 마차를 가로막았다.
“폐하!”
“폐하!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곳곳에서 야유가 터졌다.
그러나 매년 축성식이 있을 때마다 이런 식의 난입은 흔히 있는 일인지라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성왕은 난입한 이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고, 라니는 그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저들을 축성해주세요, 아버지. 작년에도 난입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마차에서 내리셨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가짜 성왕.
그와 지플은 이제 라니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의 장단에 맞추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또한 그게 비투라에게 감금당한 동안 온갖 정신 고문을 당한 결과라고 여겼다.
성왕이 마차에서 내려 그들을 맞이했다.
“그래, 아율라의 자녀들이여. 얼마나 고통스럽기에 나를 찾았는가. 그대들의 이야기를 해보라.”
난입한 신민들이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성왕 폐하, 저희는…….”
이내 신민들이 고개를 들며 로브를 벗자.
생체 실험의 흔적이 남아 흉측하게 변한 육신이 드러났다.
“세상에, 저게 대체 무슨.”
“꺄아악!”
신민들의 끔찍한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저마다 탄식과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서야 가짜 성왕은 무언가 잘못된 걸 깨달으며 흠칫했고, 라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호위 성기사들 앞에서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투라를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서른 명의 황금방패회 기사들도 이를 악물고 비투라를 쳐다보았다.
“저희는 강제로 실험실에 끌려가 이런 몰골이 되었나이다…….”
“누…… 누가, 그대들을 이리 만들었단 말인가?”
애써 침착하게 묻는 가짜 성왕. 지금 이 상황에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그로서는 더없는 낭패였다.
신민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성기사 총대장 비투라. 그가 저희를 지플의 실험실에 팔아넘겼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닥쳐라!”
스릉!
발검하며 소리치는 비투라.
라니는 차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