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6화
77화. 악역(3)
라니로부터 시작된 기도는 자정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 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기도에 임했다.
그사이 성왕의 서거 소식을 들은 각국에서 급히 조문 사절단을 보냈고, 소식지들은 성국의 비극을 알리는 속보를 알렸다.
사람들은 그 기도가 성왕을 기린 것이라 생각할 테지만 라니와 진, 그리고 무라칸은 매년 오늘 한 위대한 성기사의 죽음을 추도할 것이다.
* * *
성국 내에서 킨젤로 쪽에 붙은 세력은, 아율라가 아닌 그들의 단장을 새로운 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지플 쪽에 붙은 세력은, 아율라를 대신해 지플의 힘과 질서를 숭상하기로 했다.
룬칸델은 그들이 성국을 나눠 가진 사실을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나, 개입할 여지와 명분이 없었다.
잠식당한 수뇌부를 쳤다간 침략 행위가 되고, 함부로 지플과 킨젤로를 들쑤셨다간 큰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 신민들은 지플을 ‘성국을 돕는 정의의 가문’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룬칸델은 그저 미친 침략자로만 취급할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국을 쳐봐야 성자들을 일부 사로잡을 순 있어도, 차후 치유사가 될 ‘신민’들의 신임은 얻을 수 없었다.
때문에 최근 성국은 룬칸델의 골칫거리였으나.
지금 기회가 찾아왔다.
“막내야.”
루나였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조문 사절단 중엔 당연히 룬칸델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왕의 죽음인 만큼 1기수 루나 룬칸델과 2기수 조슈아 룬칸델, 3기수 룬티아 룬칸델이 함께 성국을 찾았다.
루나는 카시미르의 연락을 받고 진을 만나기 위해 잠시 사절단을 벗어난 상태였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강해졌구나.”
당연히 그녀는 한눈에 진의 성장을 알아보았다. 검을 굳이 맞대볼 필요도, 명왕검이 어떤 무공인지를 알 필요도, 영검의 위력을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강자가 강자를 알아보듯이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루나는 진의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었다. 타이뮨의 죽음은 그녀에게 세상의 한 부분이 지워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루나는 예전의 고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 눈빛을 되찾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실감을 이겨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누님도 강해지셨습니다.”
남매는 잠시 미소를 나눴다.
“보고 싶었다고 투정이나 좀 부릴까 했더니, 또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더구나. 카시미르 경에게 대강 상황은 들었다. 그래, 내가 도와줄 것이 무엇이냐?”
진이 저 멀리 세워둔 수레를 가리켰다.
“저들을 부탁드립니다.”
수레 안에는 비투라 벨터의 가족들이 있었다. 어제 낮의 전투에서 발생한 시신으로 위장된 채.
“알겠다.”
짧게 대답하는 루나. 비투라에 대한 내막을 들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사절단이 복귀하는 길에 섞여 휴페스터로 가게 될 것이다.
“그 외에는?”
“성왕 시해에 대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성국에 상주해주십시오. 제 공을 조슈아가 가로채지 못하도록.”
진이 생각하기에, 재판이 시작되면 성국 내 지플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금도 비투라의 희생으로 인해 신민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성왕의 장례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플에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지경.
성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지플의 만행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룬칸델의 사절단이 조문을 끝내고도 성국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징이 될 예정이었다.
룬칸델이 지플을 감시하고 있다는 상징. 지플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문이 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거대한 힘을 견제하고 있다는 상징.
예비 기수인 진은 그 상징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차후 편지를 받아 알게 될) 시론을 포함해 알 만한 사람들은 진의 공을 인정하겠지만, 대외적인 공은 룬칸델의 다른 누군가가 가져가야 했다.
당연히 진은 그걸 루나의 몫으로 돌리고 싶었다. 평소처럼 그녀가 쓸데없이 주목받기 싫다는 이유로 적당히 물러나면, 그 공은 2기수인 조슈아에게로 돌아갈 테니까.
“당연히 그리할 생각이었다. 네가 그토록 고생해서 만든 그림을 놈에게 줄 수는 없지.”
“조슈아가 육체를 여럿 갖고 있다는 것, 누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진이 조슈아의 비밀에 대해 설명하자 루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예언자’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쩐지…… 조슈아가 가끔 몸을 사리지 않고 위험한 임무에 나설 때가 있었지. 그때마다 가짜를 썼던 건가.”
“아버지께선 알고 계셨겠죠?”
“분명 그럴 것이다.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아버지가 모르시는 것은 없어.”
“그렇다면 제재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군요.”
“아마 네 영기를 묵과하신 것과 비슷한 이유겠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법도에 어긋나는데 가만히 두고 있다면, 그건 당신께서 가문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하셨기 때문이다.”
루나가 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생 많았다는 듯이.
“하지만 알아볼 필요는 있겠어. 이 누이도 놈에 대해 더 본격적으로 조사하도록 하마. 너는 일단 성국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에 집중하거라.”
“예, 누님.”
* * *
다음 날 교리수호 여명회의 기사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하감옥에 구금되었다.
지플은 손발이 될 그들이 전부 잡혀 들어가는 걸 막고자 애를 썼으나, 성왕 시해라는 사건은 너무나 결정적이었다.
또한 생체 골렘 실험 생존자들의 증언은 둘째치더라도, 라니가 공개한 비투라의 ‘명부’는 도저히 덮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킨젤로, 지플에 붙어먹은 자들을 분류해서 명단을 작성해주십시오. 제가 돌아왔을 때 즉시 공개할 수 있도록. 또한 남은 충신들을 규합해주십시오.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진이 옛 오테리엄으로 가기 전, 비투라에게 요구했던 명부.
비투라는 킨젤로와 지플의 명부를 따로 만들었다. 킨젤로의 명부는 라니가 따로 보관했고, 지플의 명부는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지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플은 ‘죽은 것은 가짜 성왕이고, 생체 골렘 실험은 우리가 아니라 킨젤로가 했다’는 성명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을 구해온 영웅의 이름을 밝힐 순 없으나, 그가 말하기를 생체 골렘 실험은 지플의 4마탑에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지플의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라니와 신민들은 여전히 광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플의 끄나풀들이 모두 수감되었다고 하나, 신민들은 모든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기 전까지 라니와 가짜 성왕의 시신을 절대 왕성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분위기였다.
교리수호 여명회를 제외하면 비투라의 명부에 오른 인물들은 여전히 성내에서 버젓이 성왕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몬티아노 대신관 등의 고위 계층이 성국 내에서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여명회와 다르게 지플과 결탁했다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어야만 처단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비투라의 명부는 조금 모자랐다. 하지만 진이 이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플의 해명이 있기 전까지, 아버지의 장례식은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기 전에, 그들은 반드시 자백해야 할 겁니다!”
“4마탑주는 나서서 해명하라!”
“나오란 말이다!”
라니와 신민들만 그렇게 소리치고 있다면 얼마든지 묵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조문 사절단이 왔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자들이 있었다.
지플은 부랴부랴 킨젤로와 물밑 거래를 끝마쳐야만 했다. 칼의 신병을 돌려받고, 모든 누명을 대신 덮어쓰기로 말이다.
모든 것이 진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킨젤로 같은 3류 테러단체에 칼이 붙잡혀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보다, 차라리 누명을 쓰는 게 나을 수밖에 없겠지.’
이미지와 위신은 둘 다 한 번 떨어지면 회복이 어렵다. 그러나 전자는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한 반면, 후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피를 봐야 했다.
결국 지플은 점심이 지나기도 전에 입장문을 내놓았다.
-본가는 성국에 정치적으로 개입하였으며, 그 과정에 본가와 결탁한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신민들을 대상으로 생체 골렘 실험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생체 골렘 실험에 대한 것은 정치적 개입과 별개로, 모두 4마탑주 칼 지플 개인의 일탈입니다. 오늘 내로 칼 지플 본인이 마법 구속구를 입은 채 성국을 찾아 직접 사죄할 것이며, 이후 본가의 법도에 따라 칼 지플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엄중히 징계하겠습니다.
성왕의 서거에 대해선 심히 유감을 전하는 바이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보상을 약속하겠습니다.
단, 무분별하게 퍼지는 소문과 악의적 모함에 대해서도 가문의 법도를 따를 것입니다.
본가가 성국에 정치적으로 개입한 것은 어디까지나 성국 관료들의 요청에 의해서지, 본가의 야욕으로 인한 사태가 아니었으며…….
평소의 지플과 달리 무척 고압적인 입장문이었다. 말만 곱게 써놨을 뿐, 모든 처벌은 성국이 아닌 자신들이 담당하겠다는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입장문을 가져오자마자 성국 신민들의 분노는 하늘로 치솟았다.
‘일부러 성국 신민들의 분노를 끌어올리고, 사죄를 위해 찾아온 칼 지플이 돌에 맞아 사망하게 만들 생각이로군.’
어떤 이유로든 칼 지플이 성국 땅에서 사망하면, 지플은 그때부터 역으로 성국을 윽박지를 수 있었다.
세간의 인식을 기준으로 냉정하게 평가하면, 성왕의 목숨값은 지플 4마탑주보다 결코 비싸지 않았다. 성국 전체와 지플의 4마탑이 전투를 벌이면, 승자는 반드시 4마탑이었다.
‘킨젤로에게 데려온 칼 지플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사건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이거지. 칼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 데려왔을까?’
여전히 지플은 ‘꼬리 자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려 ‘순혈 지플’을 제물로 바친 꼬리 자르기였다. 콜론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채 세상에 알려진 뮤론과 달리, 이번엔 지플이 직접 칼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칼이 사망하면 성국 측도 생체 골렘에 관해선 더는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정치적 개입에 대해선 여전히 전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겠지만, 그건 시간과 돈이 해결해줄 문제.
진이 보기엔 나쁘지 않은 수였다. 조급한 마음에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기 전에 꺼낸 수라는 것을 빼면 말이다.
지플은 아직 라니의 배후에 진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막연히, 룬칸델의 기수 중 하나나 비먼트가 있다고만 짐작할 뿐.
킨젤로가 암흑마법회의 본진을 단신으로 격파한 게 바멀이라는, 바멀은 진 룬칸델이라는 정보를 지플과 공유할 리는 없었다.
“디노.”
“예, 공자님.”
“칼 지플이 성국에 도착하면, 즉시 킨젤로와 관련된 기사 싹 풀어. 사실 놈은 며칠 전까지 바멀 때문에 킨젤로에 붙잡혀있었고, 바멀이 생존자들을 데리고 온 곳은 4마탑이 아니라 옛 오테리엄이라고 말이야. 칼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걸 알려.”
“지플이 열심히 아니라고 부정하겠군요. 꽤 볼만하겠습니다.”
부정하지 못하면 켈리악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팔아먹은 파렴치한이 될 것이다.
진은 지플이 위신과 이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둘 다 잃게 만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