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4화
78화. 예비 기수의 위업(3)
“베라딘……?”
슈리의 등에서 내린 진의 눈동자도 만만찮게 커졌다.
‘이 녀석이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금괴는 또 왜 이 모양이고……?’
금괴를 덮친 불은 화마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거대했다.
성국이 수십 년을 쓸 수 있는 금괴인 만큼 불타는 규모도 범상치 않았다.
이거 네가 한 거냐?
그렇게 물어보려는 순간, 또 한 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베라딘 공! 뒤쪽까지 불이 다 붙었소, 이제 도망…… 어? 진!? 정말 그대 맞소?”
왜소한 체격, 걸걸한 목소리.
단테 하이란이었다. 그는 금괴 뒤쪽에서 불이 잘 붙었는지 확인하느라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 단테까지?”
단테까지 튀어나오자 진조차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것들은 왜 맨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매번 그랬다. 폭풍성을 떠날 때도, 코스모스의 각축장에서도, 무명의 도시 사밀에서도, 지금도.
진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두 사람을 살폈다.
둘은 이미 눈동자를 반짝이며 한껏 반가움을 표하는 모습.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군! 역시 우리 셋 사이엔 무언가 있나 보오.”
“맞아, 맞아. 하하, 히, 후후. 그때는 네가 사밀에서 사고를 치고 있었는데, 이번엔 우리가 사고를 치고 있네.”
“그나저나 그 고양이는 무엇이오? 무척 크군.”
“그나저나 너 적옥묘를 타고 있잖아! 이 영물하고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어? 어, 어쨌든 너무 반갑다. 하하, 하.”
단테와 베라딘이 동시에 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은 불타는 금괴 앞에서 한없이 해맑은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너희들, 방금 도망치네 어쩌네 하지 않았냐. 이 불, 너희들이 질렀어?”
“정확히는 베라딘 공이 질렀소.”
단테가 손가락으로 베라딘을 가리켰다. 꼭 잘못을 들킨 아이가 고자질을 하듯이.
“아니, 네가 질렀잖아.”
베라딘이 정색하며 ‘네가’라고 가리킨 것은 단테가 아니라 진이었다.
진이 눈동자를 홉뜨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뭐, 나? 내가 언제?”
“베라딘 공, 이 친구는 방금 왔잖소? 불은 분명 그대가.”
“그, 그냥 진이 한 걸로 하자. 얘는 어차피 룬칸델의 예비 기수니까 공적 쌓았다는 셈 치면…….”
쩔그렁!
베라딘에게 손을 휘저으려던 단테의 호주머니에서, 돌연 금괴 한 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흠칫하며 단테와 떨어진 금괴를 위아래로 번갈아 쳐다보는 진.
“……너희, 아이, 미친. 설마 여기서 한 덩이 슬쩍한 건 아니지?”
“오, 오해요! 나는 그저 베라딘 공이 자길 도와주면 돈을 준다기에 따라왔다가.”
“단테! 너 설마 나 몰래 금괴를 챙겼던 거야?”
베라딘의 일갈에 단테는 눈동자가 거의 바깥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베라딘 공! 왜 자꾸 이상한 소릴 하는 것이오? 불은 그대가 질렀고, 이건 내가 받기로 한 보수잖소……!”
그야말로 횡설수설 대잔치.
진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래, 단테, 이 대쪽 같은 놈이 이깟 금괴 따위에 홀렸을 리는 없어. 그리고 베라딘, 가만 보니 이건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눈빛도 다소 맛이 갔고.’
삐질.
베라딘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단테는 그의 멱살을 붙잡은 채 왜 자길 도둑으로 몰아가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무튼! 난 몰라, 이건 진이 한 걸로 해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곤란해져, 단테!”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그런 얘긴 없었잖소!”
“그땐 분노에 잠깐 이성을 잃었었어!”
“잠깐 이성을 잃었다니. 여기 오는 동안 우리 둘이 저 돛단배를 사흘이나 탔소. 그간 내내 멀쩡했었잖소. 그대 가문의 패악질을 용서할 수 없다며 결의에 찼던 그 모습은 다 거짓이었단 말이오?”
“어으어어.”
베라딘이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기괴하게 몸을 비틀었다.
“베라딘, 넌 닥치고 단테가 상황 설명 좀 해봐. 시간 없다, 곧 나 죽이려는 지플 마법사들이 들이닥칠 예정이거든.”
“진,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번 성국 사건의 전말을 까발린 게 나야. 나는 방금 그걸 광장에서 밝히고, 날 공격하는 지플의 마법사들과 싸우다가 도주하는 중이고.”
“뭐, 뭣. 그럼 그대가 바멀이었다는 말이오?”
“네가 바멀이라고!?”
단테와 베라딘이 진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셋 다 서로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진은 간신히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까지 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면 상황이 우스워지는 건 한순간인 것이다.
“게다가 룬칸델의 예비 기수라는 사실까지 공개해서, 지플은 무조건 날 죽여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지. 도주 방향을 이쪽으로 잡은 건, 지플이 성국에 선심 쓰듯 준 금괴를 싹 없애버리려는 의도였고.”
“진, 역시 우린 운명이 맞소.”
단테가 감동한 얼굴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대와 우리의 목적은 같소. 지금은 잠깐 베라딘 공의 정신이 좀 나간 모양새지만, 그 또한 제 가문을 용서할 수 없다며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오. 지플의 차기 가주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말이오.”
말하자면 세 사람은 같은 목적으로 이 항구를 찾은 셈이었다.
베라딘과 단테는 소식지를 통해 성국의 상황을 전해 듣고 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라딘은 지플이 자신의 가문임에도 직접 나서서 패악을 바로잡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진과 단테 역시 대大 명가의 후계들로서 그 선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청이 있었다지만, 하이란의 차기 가주인 단테가 베라딘을 돕기로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단테는 베라딘의 결단에 감동을 받았다.
막상 사건을 벌이고 난 다음 횡설수설하는 모습에서 감동이 깎여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금괴의 불은 내가 지른 걸로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너희가 없었다면 내가 질렀을 테니까.”
“진.”
베라딘이 표정을 고치며 진과 눈을 맞췄다.
“우리 마법사들이 널 공격했단 말이지? 진실을 덮고, 가문의 위세를 지키기 위해?”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
베라딘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널 쫓아오고 있다고?”
“그래.”
“이…… 개자식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 죽여 버리겠어.”
베라딘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8성.
혹은 그 이상.
베라딘의 마력을 가늠한 진이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지? 전생에선 서른에 9성에 올랐다고 알려졌건만.’
진은 그간 베라딘의 힘이 7성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해왔다. 초 동시영창을 해내는 괴물인 만큼, 7성만으로도 다른 8성 이상의 마법사들보다 뛰어나다고도.
그러나 아니었다. 지금 베라딘으로부터 요동치기 시작한 마력은 얼핏 느끼기에도 9성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진정해라, 베라딘.”
“가문의 위신? 그딴 게 중요하다고 대체 죄 없는 사람들을 몇이나 죽이려는 거야?”
문득 베라딘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뭐, 좋아. 멋지군.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선배로서 조언 하나 하지. 나중에 다른 지플을 만나 다소 불쾌한 일을 겪더라도, 함부로 손가락을 자르진 마. 각자 가문이 너무 피곤해지지 않겠어?
-그거야말로 재미있는 농담이야, 베라딘 지플.
-음, 왜지? 우리와 룬칸델이 사소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피 터지게 싸우면, 세상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전쟁에 고통 받는 민중들 쪽도 생각해 주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야.
당시 진이 미텔 왕국의 이동 관문 안에서 베라딘의 손가락을 자르려다 나눈 대화.
‘베라딘은 늘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고만 여겼는데. 차기 가주인 이 녀석이 지플의 악행들을 모를 리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러나 지금 베라딘은 지플의 악행을 정말로 모르고 있던 분위기였다.
단지 행동거지가 독특할 뿐, 어쩌면 베라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지도 몰랐다.
“이 금괴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진. 이걸 받고 적당히 넘어가주지 않으면 성국을 수십 년은 가난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의미다. 그건 백만 명이 넘는 양민을 굶겨 죽이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어.”
이제 베라딘은 다시 단테가 감동했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진은 이처럼 그가 오락가락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려운 것이로군.’
가문의 악행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후에 벌어질 일들의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 베라딘의 상태였다.
하지만 지플의 마법사들이 진을 공격했다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분노가 두려움을 이겼다.
정확히는, 진이 공격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베라딘의 머릿속엔 분노밖에 남지 않았다. 이성과 다른 감정들은 사라져버렸다.
만일 똑같은 상황에 진이 이런 선택을 했다면.
룬칸델은 이유를 막론하고 진을 불구로 만들고 가문에서 추방시킬 것이다.
위세를 지키려고 가문 전체가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마당에, 후계 하나가 정의감에 취해 판을 뒤엎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정체를 밝힌 이후에도 금괴를 처리하려고 나선 것이고.”
“그런데 어떻게 진정하라는 말이냐!”
“내가 나서는 것과 네가 나서는 건 달라. 나는 제3자로서 성국에 금을 거부할 명분을 제공해주고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너는? 여기 오는 마법사들을 네 손으로 직접 죽이면, 그다음은 어쩔 건데?”
“아버지는 내 뜻을 헤아려주실 것이다.”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네 형. 칼 지플도 네 아버지가 보낸 암살자의 손에 죽었다. 4마탑주인 칼이 날 불러내기 위한 미끼로 쓰였단 말이다. 너라고 과연…….”
불이다! 금괴가 불타고 있다!
그놈이 지른 불이 분명해. 잡아라, 반드시!
별안간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진을 쫓아온 마법사들, 그들이 항구에 도착한 것이다.
“그만. 진, 단테. 너흰 먼저 가라. 저것들은 내가 막는다.”
베라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두 손에서 마력이 새로운 불을 이루고 있었다.
멸살암천화염옥 1형, 사밀에서와 달리 술식이 완벽하게 맺어졌다.
“베라딘 공.”
“그동안 즐거웠다.”
하.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늦은 사춘기 같은 건가?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분노에 취해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정도껏이지. 무슨 불나방도 아니고.’
진이 생각하기엔 이 상황을 더 효율적이고 깔끔하게 끝낼 길이 많았다.
“좋아, 우린 먼저 빠져주마, 베라딘.”
“진! 우리만 도망치면, 베라딘 공은!”
단테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단, 넌 날 막으려다 장렬히 패배한 거야.”
빠각!
진의 오른 주먹이 베라딘의 턱에 정통으로 꽂혔다.
“억.”
뻑! 이어진 앞차기는 명치,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베라딘. 진은 쓰러진 베라딘의 뒤통수를 한 번 더 밟아 그의 머리를 흙바닥에 완전히 처박기도 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급격히 마력 역류까지 시작되었다.
그르륵, 그륵. 베라딘이 피거품을 무는 소리가 났다.
“지, 진?”
“이 녀석 잘못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을 것 아니야. 너도 이리와.”
진이 제 로브로 단테를 보자기처럼 감쌌다.
“혹시 좀 따가워도 내가 신호 줄 때까진 입 꾹 닫고 있어라. 슈리, 물어.”
진이 다시 등으로 오르자, 슈리가 단테를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