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2화
87화. 남매(3)
-막내의 검, 브라다만테를 갖고 가면 분명 싸워줄 거다.
-브라다만테? 그건 지금 조슈아 오라버니의 무기고에 있잖아?
-그러니까, 사람 하는 말을 똑바로 들으란 말이다, 좀.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 아버지 때문에 기수들 바빠질 거라고 했지? 큰형님은 내일부터 당분간 검의 정원을 비워야 한단 말이다. 그리고 넌 아마 여기 남을걸.
-오! 그럼 별채 무기고를 털어도, 당장은 문제가 안 생긴다는 뜻이네?
-당장은 안 생기겠지, 아마도. 돌아오면 난리를 치겠지만.
-뒷일이 왜 뒷일이겠어,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니까 뒷일이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조슈아 오라버니 떠나는 즉시 찾으러 가야겠다. 과일 깎아준 보람이 있군.
-뒷감당은 알아서 해.
-걱정 말고, 혹시 어머니가 날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시면 그때만 좀 나서줘. 오라버니만 믿을게. 그럼 나중에 봐. 난 간다!
-뭐? 야, 야! 메리! 이 자식아! 마지막은 못 들은 걸로 한다!
메리는 강자와의 싸움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게 설령 차기 가주로 지목되는 2기수의 무기고를 백주 대낮에 털어버리는 행위라 할지라도.
그녀는 조슈아가 검의 정원을 나서자마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가 기거하는 별채의 무기고를 찾아갔다.
-다 꺼져! 어디 부러지기 싫으면!
그리곤 얌전히 꺼지지 않는 조슈아의 수호기사들을 제압한 다음, 성공적으로 브라다만테를 탈취했다.
그 과정에 조슈아의 수호기사 열댓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메리 본인도 몸 곳곳을 옅게 베였다.
무기고를 지키던 수호기사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만, 사실 진이 돌아왔으니 언젠가 한 번은 일어날 사고였다.
진은 애초에 메리를 이용해 브라다만테를 되찾을 생각이었으니까.
‘설마 이렇게 빨리 가져올 줄은 몰랐는데, 참…… 메리 누님도 보통은 아니로군. 그나저나, 등에 메고 있는 보따리는 대체 뭐지? 무거워 보이는데.’
진의 시선이 메리의 등에 있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보따리로 향했다.
씨익, 씨익!
메리가 허리에 감긴 브라다만테를 엄지로 가리켰다.
“또 거절할 거냐? 불사조 심장을 공짜로 처먹으라고 한 적은 없다!”
“생일 선물은 보통 공짜이지 않습니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것도 보통이라고!”
“누님, 사실 제가 누님과 싸우지 않은 건. 오자마자 너무 많은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뭐?”
“그게…… 음. 설명이 어렵네요.”
메리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그러니까 네놈이 날 능멸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 막내, 제드 숙부께 미친놈이란 얘긴 종종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멋있을 줄은 몰랐네?”
투두두두!
바깥 복도에서 또 다른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7기수님을 발견했다!”
“무조건 회수하라!”
“7기수님! 장난 그만 치시고 검 돌려주십시오!”
“아이, 망할. 벌써 쫓아왔어? 거기 딱 멈춰라, 오면 벤다!”
진도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는 건 예상치 못했다. 메리가 브라다만테를 가져오는 건 예상했어도, 수호기사의 추격까지 줄줄이 데려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능청이나 떨 때가 아니었군.’
진이 적옥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미야아!]
난데없이 슈리가 소환되자 메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일단 가시죠, 누님.”
진이 슈리의 등에 올라 메리에게 손을 뻗었다. 메리가 손을 잡자 진은 그녀가 메고 있는 자루가 생각보다 더 육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사이 길리와 페트로는 눈치 좋게 가장 큰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슈리가 그곳으로 나갈 수 있도록.
폴짝!
퍽!
길리와 페트로가 창문을 연 것이 무색해진 건 한순간이었다. 몸집이 너무 큰 관계로, 슈리는 창문에 쿵 머리를 박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음.”
[먀…….]
진이 애써 민망함을 감추며 슈리를 다시 적옥에 넣었다. 그리곤 메리와 함께 창문으로 뛰어내린 뒤, 다시 소환했다.
“그림이 썩 아름답지 않았던 건 잊어주세요.”
“묵사발을 내주마, 내가 알려주는 길로 가!”
“알겠습니다.”
메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슈리가 검의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조슈아의 수호기사들은 목젖까지 올라온 욕설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이것들이 미쳤나…… 나 안 보여? 여긴 이 무라칸의 방이기도 하거든. 들어오면 아무튼 다 뒤질 줄 알아라.”
방으로 들어오려는 수호기사들을 무라칸이 가로막았다.
일순 조슈아의 수호기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들이 배운 ‘가문의 위계’엔, 용이 포함된 적이 없는 것이다.
‘12기수보다 이 흑룡의 위계가 높은 건가? 그런데 흑룡은 12기수의 수호룡인데?’
‘아니, 우리가 이 흑룡을 따르는 게 맞나? 얼른 7기수와 12기수를 추격해야……!’
수호기사들이 고민하는 사이 무라칸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하, 이것들 안 되겠구만. 네놈들 주인의 시조, 그러니까 어? 테마르 그 녀석도 내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아무리 시대가 무심히 흘렀기로서니, 이 몸이 룬칸델에서 이따위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돌아서 가겠습니다, 무라칸 님.”
한 수호기사가 그렇게 말했으나 무라칸은 이미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너흴 그냥 보내기엔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미 네놈들은 처음부터 날 보는 눈깔이 공손하질 않았어.”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전원, 돌아서 추격한……!”
그 순간, 무라칸의 눈동자에 검은 기운이 맺혔다.
동시에 그의 팔과 얼굴에 검은 비늘이 돋아나며, 등에 날개가 솟구쳤다.
[멈추어라.]
용의 기운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 신체만 본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돌아서려던 수호기사들이 돌처럼 굳었다.
사실, 천 년 전이었다면 일반 수호기사들은 감히 무라칸과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위치였다. 테마르가 살아있던 시절엔 룬칸델의 모든 이가 무라칸에게 존경을 표했었다.
[무릎을 계속 꼿꼿이 펴고 있어도 되겠느냐?]
무라칸의 다음 말에 수호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길리와 페트로는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랐으나 다행히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라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광대하고 심상찮은 건 사실이나, 수호기사들이 무릎을 꿇은 건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가문의 수호신으로 상징되던 존재에게, 자신들이 큰 결례를 저질렀다는 걸 방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호신, 위대한 흑룡께 감히 룬칸델의 종복들이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차후 어떤 처분이 있든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무라칸은 한참 동안 그들을 내려다보다 이렇게 대답했다.
[좋다. 책임을 물어야겠으니, 로사 룬칸델을 불러오도록.]
수호기사들은 맹세코 단언할 수 있었다. 조슈아의 기사가 된 후, 오늘처럼 개 같은 날은 없었다고 말이다.
* * *
진과 메리가 도착한 곳은, 칼론 외곽의 평야였다.
그 넓고 아무것도 없는 공터는 메리가 기수가 되자마자 직접 통제 구역으로 지정한 땅으로, 용도는 단 하나였다.
결투.
메리는 싸울 만한 상대가 생길 때마다 이곳으로 끌고 와 성에 찰 때까지 싸움을 벌이곤 했다.
올해는 진이 처음이었다. 진 역시 이곳에 와본 건 처음이고.
휘익, 휙!
메리가 가볍게 검을 돌리며 몸을 푸는 동안, 진은 평야 곳곳에 묻어있는 마른 핏자국과 검흔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메리 누님에게 죽은 강자가 백 단위에 이른다고 들었던 것 같긴 한데.’
과연 꽤나 격렬한 싸움도 많았는지,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검흔도 다수였다.
메리가 허리춤에서 브라다만테를 풀었다.
그리곤 있는 힘껏, 평야 저 멀리까지 브라다만테를 던져버렸다.
“어차피 근처에 꽂아놔도 싸우는 동안 뽑혀 튕겨 나갈 테니 말이다. 후, 드디어 네놈과 한 판 붙는구나.”
“이곳이라면 저도 안심하고 누님과 싸울 수 있겠습니다.”
진은 검의 정원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이틀에 걸쳐 그녀를 도발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도발의 이유는 분명했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기기 위해서였다.
‘8성 후반, 혹은 9성 초입.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예비 기수 생활을 한 4년 동안, 성장한 것은 진뿐만이 아니었다. 메리는 물론이고 기수들 모두 상당한 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게다가 메리는 결전기를 가지고 있다.
‘누님이 설마 결전기까지 사용하진 않겠지. 그보다, 아쉽게 됐군. 꽤 열심히 도발했는데 오는 동안 평정심을 되찾으셨잖아.’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흥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메리는 차분한 기색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내야.”
“예, 누님.”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피식.
메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넌 여기 오는 동안, 내게 적어도 서른 번은 죽었단다.”
“이상한 소릴 하시는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러자 메리가 소매 속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보였다.
“네 뒤에 앉아 저 고양이를 타고 있을 때, 내가 조금만 마음을 나쁘게 먹었어도 이 단검이 네 몸 곳곳을 탐험했을 것이다. 난 다만, 우리의 재회가 그토록 싱겁게 끝나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지.”
은근히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는 셋째 누이를 보며, 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 룬칸델.
휴페스터에서 가장 유명한 싸움광인 그녀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언제나 정정당당한 정면승부를 표방하는 무인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메리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인물이었다. 모략이나 계책은 재주가 없어 펼치지 않았으나, 독이나 암기를 쓰는 것에도, 기습에도 전혀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리가 진을 봐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반만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상한 소릴 하고 계시다고요. 제가 설마 그 정도도 염두에 두지 않았겠습니까?”
진은 오는 내내 메리의 단검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건 식은땀이 흐를 만큼 짜릿한 위협이었다.
그리고 메리는 진의 대답이 더없이 흡족한 듯 입맛을 다셨다.
“크, 보람이 있어. 토나 녀석들이 너처럼 말했다면 당장 턱뼈를 부숴줬을 텐데, 역시. 네 말은 신빙성이 있구나. 허세처럼 들리지가 않아.”
“감사합니다.”
“슬슬 시작하자꾸나, 동생아…… 아! 그전에, 깜빡 잊을 뻔했군.”
메리가 그때까지도 등에 메고 있던 자루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쿵!
그리고 그녀가 자루를 풀어헤치자, 진도 이번만큼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저거, 마력 폭탄이잖아, 그것도 최상급 인명살상용!’
자루에 가득 담긴 계란 크기의 파란 덩어리들은, 하나하나가 7성 공격 마법 수준의 위력을 품고 있는 폭탄이었다.
메리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 폭탄을 모조리 바닥에 쫙, 뿌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폭탄이 남매의 사이를 빠르게 채우고 있었다.
안전장치가 되어있으니 작은 충격엔 폭발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충격파라면 안전장치 따윈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얼마나 기다린 싸움인데, 무대가 심심해선 안 되지 않겠느냐. 어떻게 해야 더 만족스러운 결투가 될지 밤새 고민을 많이 했다. 후후, 오너라,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