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273화 (272/1,001)

제 273화

87화. 남매(4)

데구르르…… 뽀시락, 뽀시락!

메리가 던진 마력 폭탄들은 잘도 굴러갔다. 겉보기엔 그저 자그마한 푸른 달걀처럼 보이지만, 단 하나로도 평범한 인간 수십 정도는 한순간에 죽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대체 몇 개야……? 잘도 이런 걸 깜빡 잊었었다고 말씀하시는군.’

어림잡아도 이백 이상.

이런 위험한 물건을 사방에 깔아두고 결투를 하자는 미친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방금까지 드넓은 공터에 불과했던 이곳은 이제 죽음의 무도장이 되었다.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여기까지 와서 이 누나를 실망시…….”

스릉……!

진이 시그문드를 뽑자 메리가 히죽 웃음을 흘렸다.

무위의 고하와 관계없이, 그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진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있었다.

“옳지, 그래야지.”

메리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리자 살짝 통통하게 빗어진 단발이 바람에 날리듯 휘날렸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초롱초롱 반짝이는 두 눈동자 속에 어울리지 않는 전의와 살기가 담겨있었다.

메리는 룬칸델 내에서 결코 최강이 아니다.

그러나 싸움과 승리 그 자체를 숭상하고 즐기는 건 단연코 그녀가 룬칸델 최고였다.

“첫 수는 양보해주시는 겁니까?”

“물론.”

“정말로?”

“그렇다니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진이 검을 늘어뜨리며 자세를 잡기 시작하자, 메리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순간을 대체 몇 년이나 고대해왔던가.

‘아버지께서 직접, 꽤나 강대한 기운이라고 표현하셨다. 과연, 심상치 않아. 이 짜릿함, 이 쾌감, 이 전율! 막내야, 오늘 우린 둘 중 하나는 의료원에 가서 앓아누울 때까지 치고받는 거다.’

메리가 흥분을 주체하는 사이, 진은 차분히 공격을 준비했다.

동작이 극히 느렸다. 메리가 선수를 양보해주지 않았다면 결코 시도하지 못할 느린 공격이었다.

루나만큼은 아니어도, 진과 메리도 충분히 극강이라 불릴 만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마력 폭탄 밭에서 제대로 결투를 펼치고도 몸이 성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

‘일격에 끝내는 게 좋겠어. 오자마자 의사들을 또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

진이 펼치려는 것은 영검 1식, 영혼 베기.

지난 1년 동안 라프라로사에서 매일 영혼 베기를 수련했다. 물론 상대의 영혼 그 자체를 베어버리는 경지는 아직 한참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번 수련에서 진의 영혼 베기는 분명히 진일보를 이뤘다.

전처럼 ‘벤다’는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실전에서 언제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숙달되었고, 보다 예리해졌다.

또한 전처럼, 주문을 외우며 영기를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루나나 바네사 같이 초월적인 무인에게도 부담스러운 파괴력을 낼 수 있었다.

때문에 메리가 선수를 ‘온전히’ 양보해준다는 가정 하에, 진은 단 일격에 그녀를 빈사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후우웅-.

시그문드의 창백한 칼날이 검게 물들어갔다.

‘영기, 솔더렛의 힘이로군. 막내가 처음 검을 뽑은 순간 느꼈던 짜릿함에 비하면, 뭔가 밋밋하군. 아니, 밋밋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미약해. 아무것도 안 느껴져.’

가만히 5초가 지났다.

메리는 아직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

또 10초가 흐른 다음엔, 짜증을 낼 뻔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

찌릿!

싸움꾼으로서의 천부적인 감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메리가 순간적으로 시그문드에 모인 영기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은.

‘신기한 검이네? 위압감 따윈 전혀 없는데도 갑자기 솜털이 바짝 곤두서잖아……!’

메리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 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몇 초만 더 줘도, 단 일격에 당할지도 모른다고.

“야!”

갑자기 메리가 진과 거리를 좁혔다.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다가와 종으로 검을 내지르는 메리.

챙!

진은 어쩔 수 없이 준비하던 일격을 멈추고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다.

“누님, 분명 첫 수는 양보해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도껏이라는 걸 모르냐, 이 양심 없는 놈! 뭘 하려던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이 누이조차 감당키 어려운 기술이 나왔을 것 같거든.”

“오해입니다. 아직 결전기도 배우지 못한 제게 무슨 그런 기술이 있겠습…….”

“아무튼, 실전에서 쓸 수 없는 검까지 받아줄 생각은 없단다.”

메리가 안광을 빛내며 연격을 이어갔다. 변화무쌍하면서도 파괴적인 검이 진의 시야를 흔들어댔다.

‘칫, 안 통하네. 분명 영기의 힘을 가늠하지 못했을 텐데, 그냥 감으로 느끼신 건가?’

현재 진의 영기는 7성에 이른 상태였다.

영기는 오러나 마력 같은 일반적인 힘보다 2성쯤 높은 위력을 발할 수 있다.

즉, 진은 순수 영기만으로 일반 기운 9성의 파괴력을 낼 수 있다는 의미.

그러나 영기의 우월성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일반 기운과 달리 잘 정제된 영기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커도 그림자엔 무게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럼에도 메리는 그 존재감 없는 기운 이면의 거대한 힘을 경계해버렸고, 진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는 누님이야말로 정도를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목숨 건 결투는 아닌데, 이렇게 폭탄을 사방에 까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이 누이의 옛 이명을 들어본 적 없느냐?”

“남부 대륙의 광녀?”

“그래, 나는 그 이명이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지금 광풍의 메리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확실히, 광녀 쪽이 더 어울리긴 하는군요.

진이 뒷말을 삼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행히 이런 경우를 완전히 배제하진 않아서 영기가 폭주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이익! 씨익!

메리가 본격적으로 검기를 뿌려대자, 진은 우선 물러나며 방어에 치중했다.

마력 폭탄이 거슬리기 때문이었다. 검기를 제대로 상쇄시키지 않으면 폭탄이 터질 거고, 하나만 폭발해도 끔찍한 연쇄 폭발이 시작될 것이다.

“으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메리.

허공에 두 사람의 오러가 정신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고, 충격파가 일어났다.

아직은 그 충격파에 폭탄이 사방으로 더 흩어지기만 하는 모양새였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진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메리는 과연 ‘광녀’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진은 오러로 두터운 보호막을 만든 채로 싸우는 반면, 메리는 폭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화끈하게 공격만 퍼붓고 있었다. 어서 터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설마 메리 누님도 루나 누님처럼 몸이 너무 튼튼한 부류인가?’

청아석 훈련의 통과의례를 겪고도 멀쩡했던 루나처럼.

메리 역시 최상급 인명살상용 마력 폭탄 따윈 맨몸으로 받아도 생채기나 겨우 나는 수준일까?

“으흐흐, 크하하하! 잘 막네, 죽이는걸!”

시익, 휘리릭, 착!

이윽고 메리의 검이 돌연 채찍처럼 흐늘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애검 ‘독사’는 겉보기엔 평범한 장검처럼 보이나, 오러를 주입해 검신 내부의 잠금을 해제하면 ‘사슬검’이 되었다.

직선으로 날아들던 검이 돌연 길어지고, 꺾이고, 휘어지자 진으로서는 여간 정신없는 게 아니었다.

진이 피하거나 쳐낼 때마다 사슬검이 자연스레 바닥을 내리쳤다. 돌덩이와 흙무더기가 살점 떨어지듯 튀었고, 폭탄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안정하게 떨리는 모습.

폭탄이 터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쩌적……!

바로 발아래 놓인 폭탄 하나에 실금이 생기는 순간이,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제길.’

진은 한숨을 삼키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영기는 영혼 베기를 실패한 부작용으로 인해 해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흑광갑이라도 입고 있었다면 그나마 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흑광갑은 라프라로사의 수련을 견디는 도중 처참히 박살이 났다. 오러 보호막과 뮬타의 룬만으로 버텨야 했다.

‘어차피 폭탄이 터지면 메리 누님도 적잖은 피해를 입는다. 먼저 회복하고 덤비면 그만…… 어?’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메리의 코트 속에 숨겨져 있던, 은빛의 절세 명갑을!

은광갑.

흑광갑과 동시에 제작된 그 물건은, 마찬가지로 민체 대장장이 협회의 걸작 중 하나였다.

메롱.

심지어 메리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혓바닥까지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진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칠 생각이 없었다. 마력 폭탄은 단순히 스릴을 즐기기 위해 깔린 게 아니었다.

‘도발은 너만 할 줄 아는 게 아니거든, 막내.’

메리는 생긋 미소를 지었고, 진은 이를 악물었다. 수 싸움에서 밀리고, 역으로 도발 당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설마 메리 누님한테 이런 걸 당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를테면, 진은 방심한 것이다.

퍼엉, 펑! 콰아앙-! 쿠르르르……!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과 함께 연쇄 폭발이 시작되었다.

‘최상급 인명살상’이라는 용도에 걸맞게, 메리가 준비한 마력 폭탄은 단순히 파괴력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청아석처럼, 속이 온통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가득했다.

청아석은 ‘그나마’ 훈련용이기에 위력을 조절했으나, 마력 폭탄은 그렇지 않았다.

펑, 쾅! 피잉! 핑!

폭발과 더불어 쇳조각이 진을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쏘아지고 있었다.

“큽!”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 쇳조각들이 전신을 찔러댔다. 축복받은 육체가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육편이 되는 걸 면치 못했을 터.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시작된 메리의 공격도 막아야 했다. 그녀는 갑옷 덕에 상대적으로 적은 부위를 보호하고 있으니 훨씬 수월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갑옷이 만능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곳곳에 크고 작은 파편이 박히고 있었다. 절로 욕지거리가 쏟아질 만큼 끔찍한 고통도 수반되었다.

다만, 메리는 살을 주고 뼈를 부수자는 각오였다. 막내가 자신보다 불리한 상황이기도 하고.

‘네 녀석이 이 정도로 끝날 리는 없겠지. 하지만 중상은 면치 못할 거다. 그다음 차근차근 공들여서 마저 꺾어주마!’

쉬익, 쉭! 폭발 속에서도 사슬검 독사는 힘을 잃지 않고 쇄도했다.

시야가 흐려 급소만을 정확히 노릴 수는 없었으나, 메리는 한 번씩 살을 베는 짜릿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걸 느꼈다.

폭발은 무려 3분이나 지속되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무인도 형체조차 남지 않을 만큼 길고 강력한 폭발이 끝난 후.

메리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먼지구름이 옅어지기를 기다렸다. 엉망진창이 되었을 막내의 모습을 기대하며 말이다.

이내 눈이 좀 밝아지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석상처럼 굳어있는 진이 보였다. 피에 젖어 온몸이 새빨갰고, 입으로도 피를 토하고 있었다.

괜찮니? 내가 좀 심했나? 혹시 죽을 것 같으면 이쯤에서 그만하고.

메리는 그렇게 말하는 부류가 아니다. 즉시 사슬검에 새로 오러를 덧씌우는 게 메리였다. 상대를 완전히 꺾었다는 확신이 들기 전엔 방심할 필요가 없었다.

“누…… 님.”

진의 부름에 메리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반짝였다.

“그래, 내 동생아! 아직 더 할 수 있지!?”

천천히 고개를 든 진은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죽일…… 겁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