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8화
88화. 축하 사절단, 의외의 만남(4)
“엇……!”
빈이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살펴보아도 묘한 울림 가득한 목소리의 근원은 자신의 머릿속이었다.
[무엇하느냐, 빈 브랑슈. 당장 빼앗지 않고!]
재차 독촉하는 그 목소리는, 대장장이의 신이 내는 것이다.
진의 전생에서 빈은 본래 대장장이의 신과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 처음으로 소통했다.
그러나 진이 그를 찾았기 때문에 역사가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빈 브랑슈에게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브라다만테를 빼앗으라고? 아니. 대장장이의 신의 목소리가 왜 내게도 들리는 거야?’
일반적으로 계약자가 아닌 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신이 이끌릴 만큼 강력한 기도가 수반되거나, 신이 직접 화신을 통해 강림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진은 청새 군도 32번 섬에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시그문드와 그람처럼, 브라다만테도 대장장이의 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인가?’
진이 고민하는 사이, 빈은 난데없는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는 몇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목소리의 근원을 확인하더니, 이내 환청이라 판단하고 진에게 감사를 올렸다.
“저, 그, 감사합니다! 나리,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절 구하기 위해 찾아오신 것 같은데, 존함을 알려주시면…… 흐에엑!”
고개를 조아리던 빈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 이게 무슨!”
[놈을 쳐! 빈 브랑슈, 이 검으로! 풍기는 기운이 영 불쾌한 놈이로다.]
크드득, 크득……!
빈이 기겁한 것은, 난데없이 자신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를 시커먼 쇳조각들이 빈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동시에, 진의 눈동자에도 이채가 서렸다.
‘금속이 검을 형성하고 있어……!?’
이 역시, 진이 한 번 겪어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킨젤로의 단장.
옛 오테리엄에서 그자도 빈과 똑같이 금속을 부려 검과 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내 권능을 빌려줄 테니, 저 녀석을 제압하고 브라다만테를 빼앗아라. 빈 브랑슈, 상황이 당황스러울 테지만, 넌 사실 내 계약자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지. 난 대장장이의 신이자 네 선조고. 지금 내 말을 잘 따르면 본격적으로 널 키워주마.]
대장장이의 신은 자신의 목소리가 진에게 들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면 빈은 행여 이 목소리를 진이 듣고 있을까 걱정이 돼서(진이 겉보기엔 달리 반응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로서는 얼른 판단이 되질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나리! 해, 행여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전 이 목소리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그, 그저 구해주셔서 감사할 뿐인데 왜 갑자기 제 손에 검이 생기는 것인지, 으아아!”
쐐액!
빈이 검을 내리쳤다.
위협이 아닌, 정확히 정수리부터 시작해 몸을 반으로 가르려는 의도가 다분한 일격.
심지어 칼날에 오러까지 둘러져 있었다.
가볍게 보법을 밟아 검을 피하는 진.
[빈, 무엇하느냐. 내가 힘을 주고 있지 않느냐, 시범도 보였고. 어서 놈을 공격해라, 내가 계속 도와줄 테니. 움직임을 보아하니 칼깨나 쓰는 놈이로군.]
당연하게도 방금의 일격은 빈의 의지가 아니었다.
대장장이의 신이 강제로 움직인 것일 뿐.
“나리! 혹시 이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이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뭔가가 맘대로 제 몸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빈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저놈은 내 목소릴 못 듣는다. 내 얘기 좀 들어라! 빈, 내 작품을 빼앗아야 한단 말이다.]
“내 몸에서 나가, 이 악귀 놈!”
진은 마치 한 편의 우스꽝스러운 일인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것과 별개로, 대장장이의 신이 내뱉은 말들엔 분명 흥미로운 정보가 한가득 녹아있었다.
‘대장장이의 신은 브라다만테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했고, 빈의 선조라고도 했다. 마치 자신이 피콘 민체 본인인 것처럼.’
게다가 킨젤로의 단장처럼 철을 사용하는 능력까지.
아무래도 대장장이의 신과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빈 브랑슈.”
“나리! 죄송합니다, 하필 이런 순간에 미친 악귀가.”
“날 공격한 게 네 의지가 아니라는 건 인지하고 있다. 스스로를 대장장이의 신이라고 말한 악귀의 뜻일 테지. 브라다만테를 빼앗으라고 아주 난리를 치더군.”
빈이 눈물을 글썽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반면 대장장이의 신은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뭣, 네놈. 내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끝마다 이놈, 저놈, 다짜고짜 초면에 칼질까지. 그것도 자신의 계약자를 구해준 은인에게.
이쯤 되면 상대가 신이라 할지라도 딱히 공경해줄 필요가 없었다.
“아주 잘 들린다, 악귀.”
[허, 신기한 일이군. 내 목소리가 들렸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누구더러 악귀라는 것이냐? 난 위대한 대장장이의 신, 피콘 민체다!]
세간에 알려진 대장장이의 신은 피콘 민체가 아니라, ‘그롤러’였다.
“대장장이의 신은 피콘 민체가 아니라, 그롤러다.”
[하! 그롤러, 그래. 그런 녀석이 대장장이의 신이었던 시절도 있었지. 그러나 이 피콘 민체의 대장술이 더 우월했다. 그롤러는 죽었고. 이런 엄청난 이야길 네깟 놈이 알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브라다만테는 어디서 난 것이냐? 일단 내놓아라, 그러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묻어두고 고통 없이 죽여주마.]
그때쯤 빈은 피콘에게 몸을 잠식당해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허옇게 드러난 흰자가 미약하게 빛을 냈고, 검을 쥔 손아귀엔 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청새 군도에서 페이텔이 율리안의 몸을 빌렸던 것처럼, 완벽한 상태의 화신은 아니었다.
아직 피콘은 그만한 강신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신격’을 쌓지 못했기에, 계약자의 몸을 강제로 탈취만 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진도, 말하자면 ‘초보 신’인 피콘도 이 사실은 알지 못했다.
“이봐, 피콘 민체. 자꾸 날 죽이네 어쩌네 하는데,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나.”
[헹! 설마 내가 검깨나 쓰는 놈 같다고 표현한 게 칭찬처럼 들렸더냐……?]
피식.
진이 웃음을 흘렸다.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브라다만테 때문에 두 번이나 싸움을 하게 되는군.’
진은 자신이 룬칸델이라는 걸 밝히는 대신, 브라다만테를 바닥에 꽂았다. 푹!
“가져가, 가능하다면.”
[이놈이!]
쏜살같이 달려드는 피콘에게 다시금 금속이 모여들었다.
검에 이어 갑옷, 방패까지. 금속은 순식간에 새로 장비를 만들었고, 진은 그 능력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대장장이의 신에게 이런 권능이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다시 봐도 킨젤로 단장의 능력과 지나치게 흡사해.’
그러나 이제는 단장의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단장이 지닌 권능이 분명 한 수 위였다.
피콘의 철이 만든 무구들은 다소 투박한 반면, 당시 단장의 검과 문에선 어딘지 모를 완벽함이 느껴졌었다.
‘원래 대장장이의 신이었던 그롤러의 힘을, 킨젤로 단장이 흡수한 건가? 혹은 마신석처럼, 단장이 그롤러를 흡수한 것일지도.’
그래서 대장장이의 신이 공석이 되었고, 그 자리를 피콘 민체가 채워 새로 신이 되었다.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쨌거나, 피콘 민체의 전투력은 위협적인 수준이 아니다.’
도대체 뭘 믿고 이토록 기세등등한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피콘의 무위는 그저 그랬다.
빠악!
진이 검을 피하며 정권을 내질렀다.
파각……!
방패는 단 일격에 산산조각 부서졌고, 피콘은.
그때서야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진이 가볍게 내지른 주먹에 방패가 깨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방패를 깬 것도 모자라 갑옷까지 부수고, 한 번 더 날아들 것 같아서도 아니었다.
‘영기……!?’
진의 주먹에 둘러진 그 검은 기운.
피콘의 인식 속에서, 영기를 갖고 있다는 건 곧 브라다만테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잠깐! 차, 착오가 있었다! 넌 솔더렛의……!]
솔더렛, 그 이름을 듣자마자 흠칫했으나 진은 일단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주먹을 뻗어 한 대는 때려야 할 것 같았다.
빠각!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피콘이 데굴데굴 네 바퀴를 뒤로 굴렀다.
“뭐라고?”
진의 물음에 피콘이 벌떡 일어서서 빽, 소리를 질렀다.
[이런 망할!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것이냐, 네놈이 솔더렛의 계약자라고!]
“말할 기회는 줬나?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하지?”
[안 줬어도, 알아서 밝혔어야 할 것 아니냐!]
꽥꽥 소리치고 있으나, 피콘의 말투엔 아까와 달리 묘하게 반가운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그리고 진은 고작 영기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주도권이 완전히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이제라도 사과해라. 그러면 방금까지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피콘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군. 처음엔 네게서 웬 이상한 기운만 느껴졌으니, 설마 솔더렛의 계약자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오, 의외로군. 또 입에 거품을 물면서 욕지거릴 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이상한 기운이라고?”
피콘이 진의 허리춤에 걸린 시그문드를 가리켰다.
[이제 보니 그 독기 가득한 요상한 검 때문에 내가 착각을 한 것 같구나. 잘은 몰라도 많은 신을 베고, 신격을 봉한 검인 것 같은데…… 그래서 널 보자마자 극도로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는지도 모르겠어.]
진을 처음 본 순간 피콘이 느낀 것은, ‘신으로서의 본능’이었다.
피콘은 비교적 최근에 신이 된 만큼, 반만년 전 명왕족과 신들의 싸움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살검이자 신봉검인 시그문드의 기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런 와중 진이 브라다만테까지 갖고 있으니 어떻게든 회수해야 한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름이 무엇이냐? 일단 분명히 룬칸델, 테마르의 후손이겠군.]
“진 룬칸델이다.”
[좋아, 진 룬칸델. 천 년 전, 솔더렛이 나를 신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진의 추론대로 대장장이의 신이 공석이 되었다 한들. 또, 피콘 민체의 대장술이 얼마나 신기에 가까웠든.
일개 인간에 불과했던 피콘이 그냥 신격을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더렛이 자신의 힘과 위상을 이용해 그를 신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그림자와 계약을 맺은 인물 중, 브라다만테나 바리사다를 가져온 자에겐 테마르가 처음 묻혔던 땅을 알려주라고 하였다. 아울러 그의 검을 다시 한 번 벼려주라고 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