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290화 (289/1,001)

제 290화

91화. 힘, 그리고 힘을 숭상한다는 것(1)

볼타가의 저택은 공사가 한창이다.

허름하기 짝이 없어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던 저택 곳곳에 일꾼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영주와 식솔들은 아직도 이 꿈 같은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눈물을 훔쳤고, 기근에 지쳐 떠나간 영지민들도 하나둘씩 다시 돌아오는 중이었다.

볼타의 집사인 빈 브랑슈는 낮에는 영지민들의 무료 배급을 도왔고, 저녁엔 영주와 함께 룬칸델에서 나온 지원금의 사용처를 고민했다.

페트로는 진의 명에 따라 ‘과하지 않은 선에서’ 지원금을 내어줬으나, 그것만으로도 이 작은 영지는 활력을 찾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고로, 빈 브랑슈는 뿌듯했다. 단언컨대 인생이 요즘처럼 즐거운 적은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경 덕분입니다. 볼타의 집사가 된 이후, 영지에 이토록 활기가 도는 건 처음 봤습니다!”

빈이 막 끓인 보리차를 내오며 미소를 지었다.

“볼타 저택 보수가 끝나면 티칸의 인부들이 와서 네 집을 새로 지을 것이다. 지하에 특수 방음을 겸비한 대장간을 설치할 건데, 혹 추가하고 싶은 시설이 있다면 말해라.”

“아이고, 저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제 집이 따로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지.”

호로록.

진이 보리차를 마시자, 무라칸이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아니, 그는 빈의 집에 도착한 이후 한 시간 내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 피콘 민체, 빨리 나와! 이 콧수염 자식.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야?”

피콘이 아직까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라칸은 피콘이 진에게 처음 테마르의 첫 번째 무덤에 관한 정보를 알려줄 때, 위험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에도 잔뜩 뿔이 난 상태였다.

“그, 음음. 무라칸 님, 죄송합니다. 제가 계약자긴 하지만 피콘 님을 뜻대로 부를 수 있는 능력이 없는지라.”

빈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피콘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후. 그야말로 무라칸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빈이 눈동자를 하얗게 까뒤집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피콘이 강신하는 신호.

“그어억.”

잠시 후 흰 눈동자에 빛이 서리자 피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쫑알쫑알 시끄러워 죽겠군.]

“피콘 님.”

[어어, 그래. 잘 다녀왔느냐, 진 룬칸델. 그나저나 무라칸, 네놈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구나. 네놈과는 대화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던 걸 정말 모르는 건 아닐 테지?]

“뭐? 나랑 대화하기가 싫어? 왜?”

그러자 피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라칸을 노려보았다.

[바리사다와 브라다만테를 주조할 때, 네놈이 날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잊었단 말이냐!? 날마다 찾아와서는 언제 완성되냐, 콧수염 기는 속도가 더 빠르겠다며 헛소리를 하고…….]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무라칸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다.

[허, 기억이 안 나? 네놈 몰래 퀴칸텔 님과 테마르가 찾아와서 내게 몇 번이나 사과한 것도 기억이 안 나겠지? 네놈 때문에 바리사다, 브라다만테 제작을 때려치울까 고민한 게 한두 번이 아니란 말이다.]

피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진이 무라칸을 보며 혀를 찼다.

“무라칸, 네가 잘못했네.”

[그뿐이냐? 네가 한창 내 대장간에 죽치며 진상을 부리는 동안, 다른 용이 우리 마을 상공을 비행하기만 해도 잡아다가 두들겨 패지 않았나. 그것 때문에 대장장이들이 무서워 죽겠다며 내게 얼마나 호소를 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 대장간은 빌머 왕국 남부 촌구석에 있었잖아. 거긴 폭풍성하고 한참 멀어서 내 영역이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냥 지나가는 용들을 패?”

[내가 있는 곳은 어디든 나의 영역이다. 그때 네놈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그것이잖나?]

문득 진은 과거 퀴칸텔을 처음 찾아갔을 때, 비먼트 해역에서 무라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영역에 들어온 놈은 일단 맞고 시작하는 거야. 그때는 그랬어.]

실제로 전성기 시절의 무라칸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격이 좋지 않았다.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나운 최강의 존재.

전성기의 무라칸을 알던 이들은 모두 그를 그렇게 기억했다.

오죽하면 무라칸을 겪어본 적 없는 라트리조차 전해지는 이야기만으로 처음에 그를 보고 덜덜 떨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용이 성질이 좋지 않다는 건 세간에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그 시절의 무라칸은 분명 특출한 편이었다.

피콘이 씩씩 성난 숨을 내뿜었다. 과거 무라칸에게 시달린 것을 생각하니 열이 뻗치는 모양새.

[너 때문에 빌머 왕국 대장장이 마을에선 날마다 용의 비명이 들린다고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만들어 부를 정도였다. 소문이 와전돼서 나는 너와 테마르를 등에 업고 막 나가는 대장장이 소리를 듣기도 했지!]

무라칸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눈동자만 끔뻑였다.

“그…… 피콘, 내가 정말 그랬다면 일단 사과하도록 하지. 미안하다.”

피콘이 흠칫하며 무라칸과 눈을 맞췄다.

그의 속마음은 이랬다. 미안하다고? 이게 정녕 무라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종류의 말인가?

[너 방금 뭐라고.]

“미안하다고. 솔직히 네가 말한 내용 중, 네 콧수염을 놀렸던 사실만 기억나긴 하지만…… 당시 내 행동을 돌아보면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일들이군.”

[네놈 무라칸 맞냐? 진짜?]

“천 년 동안 잠들어 있을 때 기억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보다시피 힘도 많이 잃었고 말이야. 아무튼, 뭐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마.”

대뜸 무라칸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엔, 진조차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피콘도 무라칸을 붙잡으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이럴 것까진…… 야, 야, 무라칸. 우리 나름대로 친했어, 그냥 짜증나서 심술 좀 부린 거라고. 이러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

이제는 오히려 피콘이 더 불편해하는 모습.

“피콘 민체.”

[어.]

“천 년 전, 내가 악룡이었나?”

그건 무라칸의 긍지였다.

그는 자신이 최강의 힘을 갖고 안하무인이었을망정, 악룡이라 불릴 일은 행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니, 악룡은 아니었지. 인간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고, 어, 또. 마을의 꼬마들이랑 잘 놀아주기도 했고, 기억나나? 엘리, 그 아이가 지플에 납치됐을 때도 네가 찾아줬…… 아이, 씨. 내가 왜 네놈 변명을 해주고 있지?]

“이번에 무덤에서 만난 실더레이도 나를 잡놈이라 욕하더군. 처음엔 그놈이 미친 건가 싶었는데, 네 반응을 보아하니 내게 뭔가 문제가 있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엔 실더레이나 너와 좋은 추억밖에 없어. 모두 테마르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진은 무라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무라칸은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잠들기 직전까지의 기억 일부가 흐려진 상태였고, 그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흐린 기억들이 중요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했다면 자신이 잊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에 만난 그의 ‘옛 시절’을 알거나, 아는 듯 말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킨젤로의 단장이나 실더레이, 피콘을 만나보니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봐, 무라칸. 넌 악룡이 아니다. 그때 네놈이 날 들볶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테마르의 검이 완성되어야 룬칸델이 지플을 칠 수 있었으니까.]

피콘이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놈이 용들을 자주 팬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역 침범은 그럴 만한 사유가 되고, 또. 당시 내 대장간에서 만들던 게 테마르의 무기였던 만큼 보안을 위해 당연한 일이었어. 그때 세상에 존재하는 용의 9할은 지플 소속이었으니.]

무라칸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룬칸델과 휴페스터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한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가워서 심술 좀 부렸기로서니, 이러면 내가 뭐가 되나?]

“그래, 어째 이상하다 했어. 네놈이나 실더레이나 날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이러니까 어이가 없었다고. 실더레이 놈한텐 뭐 들은 말 없지? 그게 나더러 잡놈이라 했다니까? 상상이나 가냐? 그 예의 바른 녀석이!”

[실더레이는 대검 타무르를 제작해준 후 본 적이 없어. 아마 녀석도 나처럼 괜히 한 소리 해본 것일 테지.]

“실더레이는 한술 더 떠서 솔더렛을 배신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꼬마 녀석이 그곳에서 영기로 이뤄진 기록 장치를 통해 본 과거에서 그랬다더군.”

진이 한동안 기록 장치에 대해 설명하자 피콘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게 있었다고? 난 솔더렛에게 실더레이의 의지를 본뜬 수호자만 있을 거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대검 타무르의 조각을 얻어 브라다만테를 강화하려고 한 것이지.]

영기 구슬은 무라칸의 예상대로 대장술에 쓰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피콘은 구슬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다시 한 번 이런 건 솔더렛에게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그보다, 실더레이가 솔더렛을 배신자라 칭한 건 나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친구는 십대기사 중 누구보다도 솔더렛을 공경하지 않았나? 네게도 꼬박꼬박 예의를 차렸고.]

“피콘. 넌 내가 잠든 이후에도 살아있었지?”

[한 3년쯤 더 살았지. 5년이었던가?]

“혹시 그사이 솔더렛이 룬칸델에 뭔가 안 좋은 일을 했다거나. 뭐 그런 일 기억나는 건 없어? 퀴칸텔이나 미샤한테 듣기로는 없었는데 말이지.”

[오, 퀴칸텔 님도 만났나 보군. 용케 살아있구나. 아무튼, 내가 알기로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이후 룬칸델은 지플에 패배했고 맹약을 맺었다. 너와 테마르가 둘 다 멀쩡한 채로 그 전쟁을 이끌었다면…….]

피콘이 말을 끊으며 무라칸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일이 두 사람과 룬칸델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굴욕이 되었는지를.

[……실언을 했군. 미안하다, 무라칸.]

“처음엔 보자마자 나쁜 놈이라며 몰아세우더니, 이젠 사과를 하냐? 하여간 콧수염 네놈은 신이 됐어도 위엄이랄 게 없구나.”

[아무튼, 내 생각엔 말이다. 실더레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솔더렛이 남긴 기록 장치들을 더 찾아봐야 알 수 있는 영역 같군.]

“피콘 님. 혹시 솔더렛이 남긴 열쇠를 더 갖고 계십니까?”

진의 물음에 피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게 다였어. 대신, 두 번째 무덤에 이르는 열쇠를 누가 갖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무덤엔 수호자가 있을 거고, 브라다만테를 강화하기 위한 재료도 있을 것이다.]

“누가 갖고 있습니까?”

두 번째 무덤에 이르는 열쇠를 갖고 있는 건, 그야말로 의외의 이름이었다.

[조개의 신 올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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