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305화 (304/1,001)

제 305화

93화. 테마르의 두 번째 무덤(3)

‘마녀의 짓이라고? 무슨 뜻이지? 마치 마녀의 힘이라면 솔더렛의 계약자가 아니더라도 영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슈리의 옛 주인 헬루람, 그 이름이 뇌리에 스쳤다.

그러나 당장 그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러진 검을 타고 불이 치솟기 시작했다. 시뻘건 불들이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번지며 어둑한 아공간을 빠르게 물들여갔다.

사라의 몸에선 더 이상 지난 천 년 동안 얻은 부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벌어진 상처에선 영기 대신 불이 흘렀고, 잠시 후엔 온몸이 불로 뒤덮였다. 머리카락, 눈동자, 손톱마저도 활활 타오르는 불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이내 검도 쇠붙이로서의 형태를 모두 잃고 불의 형상이 되었다.

염제,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붙인 이름.

[야이, 미친! 마검 비기, 업화? 그 몸으로!?]

무라칸이 소리를 질렀다.

방금까진 상처 입은 수호자의 모습에 마음이 어지럽고, 배신자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기분이나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실제다.

무라칸은 수호자가 마검 비기를 펼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창성에 가까운 무위를 지니고 있던 건 사실이나, 부상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우릴 죽일 셈이냐!]

[엄살을 부리는구나, 무라칸! 아니면 배신도 모자라, 날 능멸하기까지 하는 것이냐? 이런 미지근한 불로 네놈을 어쩔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지? 더러운 배신자.]

나 배신 안 했다고, 몸도 약해졌고.

무라칸의 그 대답은 불들이 폭발하는 소리에 묻혀 수호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제대로 전해졌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천 년이라는 지독한 세월과 그간 이어진 전투에 상한 것은 육신뿐만이 아니었다.

정신도 완전히 풍화되었다. 그녀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고, 일행과 싸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듣고 있었다.

온전치 않은 정신 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각인된 사명만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었다. 룬칸델에 위협이 되는 것을 죽여라.

그 외에도 진을 위한 하나의 사명이 더 있었으나, 너무 많은 전투를 치른 나머지 수호자는 그 사실을 잊고 말았다.

화르르륵! 콰륵! 크저적!

세상을 송두리째 태울 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 같았다.

전성기의, 부상을 입지 않은 사라였다면 단지 표현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펼친 업화는 천 년 전, 그녀가 지플의 마법사들을 태워 죽이던 시절에 비하면 2할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부상 때문에 마력과 오러를 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데다 그녀의 옛 불사조, ‘마니에르’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럼에도 수호자의 업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방된 무라칸의 영기들을 지우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불과 영기가 뒤섞이며 아공간의 하늘에 괴상하고 거대한 무늬를 자아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공간이 출렁였고, 열기와 영기에 사방이 이글거려 용들은 뜻대로 비행조차 할 수 없었다.

[퀴칸텔!]

[알아, 최대한 멈춰볼 테니까, 넌 불길을 잡아!]

퀴칸텔이 하강하며 은빛 눈동자를 빛냈다.

피이이이-! 날카로운 공명음과 함께, 퀴칸텔의 이마에서부터 파동이 방출되는 모습이 이어졌다.

시간의 힘이 담긴 파동이었다.

과거 안드레이 지플과 풍룡 뷰렛타를 상대할 때 사용한 권능.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그 그물 같은 파동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시간을 잃게 되기 마련이었다.

뷰렛타는 날개 끄트머리가 닿은 것만으로 완전히 몸이 굳었었다.

하지만 수호자의 불들은, 시간의 파동에 잠식당하고도 진행이 늦춰졌을 뿐. 여전히 끔찍한 열기를 토하며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퀴칸텔이 가진 권능으로는 수호자를 완전히 멈추는 게 불가능했다. 시간의 신 올타가 직접 강림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지어 수호자는 그것을 넘어.

불타는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동을 ‘베고’ 있었다. 베인 파동은 마치 끊어진 줄처럼 힘을 잃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불을 붙잡고 있는 파동을 다 그렇게 무효화할 수는 없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성큼성큼.

파동을 걷어내며, 수호자가 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 시선은 진이 아니라 무라칸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수호자는 계속 무라칸의 힘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를 제외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인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그녀와 무라칸이 둘 다 완벽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면.

[방관자, 아니. 이제 방관자가 아닌가. 어쨌든 퀴칸텔, 이쯤하고 빠지는 게 어떤가? 버텨봐야 체면 차리기 좋아하는 네 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으득! 퀴칸텔이 이를 악물었다.

수호자의 언사에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필사적으로 권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수호자는 퀴칸텔의 권능을 너무나 쉽게 상쇄시키고 있었다.

수호자, 사라 룬칸델. 그녀는 본래 퀴칸텔이 감히 자존심 같은 걸 따질 상대가 아니었다.

수호자는 자신의 업화가 미지근하다고 표현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준이었다. 업화는 아직 상당한 거리에서 작열하고 있으나, 일행은 보호막 속으로 전해지는 열기만으로도 솜털이 바짝 곤두설 지경이었다.

퀴칸텔의 권능이 멈추면, 저 불 속에서 싸울 수 있는 동료는 무라칸과 퀴칸텔, 그리고 명왕군림검을 펼친 진이 전부였다.

그러나 명왕군림검을 펼치기엔 아직 진은 몸 상태가 다 돌아오지 않은 상태. 무리해서 펼쳤다간 광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퀴칸텔의 힘이 소진되기 전에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퀴칸텔 님,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5분.]

퀴칸텔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대답했다. 예상보다 짧았다.

다행히 곧장 떠오르는 수가 없지는 않았다.

‘……보호막이 녹아내리고 있다. 무라칸과 퀴칸텔 님이 한 번 거르고 있는데도 이런 파괴력이라니. 퀴칸텔 님의 권능이 사라지면, 이쪽은 적당한 부상 정도로 넘어갈 수 없어.’

진과 길리, 카시미르, 알리사, 엔야. 제트까지 여섯 사람이 다 함께 보호막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모양새였으나 무인들의 보호막은 타인을 지키기에 효율이 좋지 않았다.

“엔야.”

“네, 공자……!”

“난 싸움에 다시 합류해야 해. 내가 빠지면, 네가 보호막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해야 한다.”

현재 그 축을 담당하는 건 진이었다. 진은 다른 무인과 달리 오러와 마력을 섞어서 보호막을 펼치고 있는 데다, 그 성취도 가장 크므로 당연한 일.

마법사인 엔야가 진의 역할을 이어야 했다. 아직 엔야는 6성 초입에 불과하나 타인을 지키기 위한 보호막의 효율은 동료 무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할 수 있겠어?”

“해볼게요.”

“더 확실한 대답을 해줘.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도 고려해봐야 해.”

질책하거나 압박하려는 게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수에 동료들의 목숨을 담보하고 싶지 않을 뿐.

만약 무인들이 전원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였다면, 이런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엔야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공자. 대신, 2분 정도만 자리를 지켜주세요. 제가 새로 술식을 맺기 전까지.”

그녀는 옛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저도 꼭 한 사람의 몫을 해낼 거예요. 오늘처럼 형님한테 보호받는 사람으로만 남고 싶지 않다고요. 그러니 저한테 편히 있어도 된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오스틴.

-저는 올타의 계약자, 엔야. 언젠가 당신이 가장 신뢰하는 대마법사가 될 겁니다.

둘이 함께 암흑마법회의 잔당들을 소탕하러 갔을 때 나눈 대화.

진 역시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대마법사라곤 할 수 없으나, 진이 라프라로사를 다녀온 동안 그녀 역시 무섭도록 빠른 성장을 이뤘다. 그 혈통 따지기 좋아하는 올타가 평민에게 계약을 제안할 정도로, 엔야가 가진 재능은 남달랐던 것이다.

“알겠어.”

엔야가 정좌하며 자신의 보호막을 해제했다.

자연스레 나머지 동료들의 부담이 커졌고, 진은 한계와 역류 사이를 오가며 방출 마력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엔야가 바르르 눈을 떨며 술식을 맺기 시작했다.

2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엔야는 다급한 마음을 잘 다스리며, 역류에 빠지지 않고 순조롭게 술식을 완성시켰다.

그녀가 준비한 마법은, 진이 예비 기수의 끝 무렵에 얻어준 것이다.

극방계.

추콘 톨더러의 유산, 그중에서도 추콘이 ‘용화차단막’이라 이름 붙인 극방계 마법의 정수였다.

엔야의 어깨에서 극방의 서를 새긴 룬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

“어서 가요, 진 공자!”

엔야가 입에서 주륵주륵 피를 흘리면서도 엄지를 척 치켜들자, 돌연 사방에 시퍼런 막이 형성되었다.

용화차단막龍火遮斷幕은 이름 그대로, 추콘이 용과의 전투를 위해 고안한 마법이었다. 용의 숨결을 막는 보호막인 것이다.

아직 극의에 다다르지는 못했으나, 엔야는 부족한 마력을 올타의 힘을 빌려 메꾸고 있었다.

“그럼 뒤를 부탁하지.”

남은 시간은 3분.

진이 보호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도 새로운 마법이 맺혀있었다.

동시 영창.

진이 마법사로서도 천재 중의 천재인 이유 중 하나. 엔야의 몫까지 보호막을 담당하는 동안, 진은 처음에 준비한 영검과 더불어 한 가지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쥐약이나 다름없는 마법을 말이다.

역천, 키다드 홀의 유산.

‘사라 경이 지금 운용하는 마력은 8성 내외에 불과하다.’

업화는 무라칸의 영기를 한지처럼 찢어발기고, 퀴칸텔의 권능마저 성가신 밧줄 정도로 격하시키고 있으나.

실제적인 마력은 8성 수준에 불과했다. 8성의 마력에 더불어 9성의 오러, 그리고 룬칸델 마검사 특유의 힘 때문에 이만한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충분히, 진이 역류에 빠뜨릴 수 있는 마력량이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마어마한 인물인 만큼 저런 상태로, 저만한 마법을 유지하면서 역천의 힘까지 받아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영검을 함께 준비했다.

이번 라프라로사에서 투왕들에게 새로이 전수받은 영검의 또 다른 형식들.

그중 진이 고른 것은 2식과 7식이었다.

가위, 그리고 그림자강습.

‘역류에 빠져도, 기회는 한순간뿐이다. 사라 경이 얼마나 부상을 입었든, 명왕군림검 없이 근거리 전투를 제대로 펼치는 건 자살행위야.’

키이이잉!

진의 손바닥을 떠난 마력이 역천의 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역천이 다 펼쳐지자 발밑에 놓인 진의 그림자가 일어서며, 주인과 함께 포개지는 모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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