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321화 (320/1,001)

제 321화

98화. 먹이 아니라(2)

* * *

검황성 중앙 치료실 독채.

“아이고, 우리 손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것이냐! 여봐라, 손자가 언제쯤 깨어나는 것이냐?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테지!?”

“맥박과 체온이 아주 안정적입니다, 가주님. 분명 곧 깨어나실 테니 염려 마시옵소서.”

“단테야, 단테! 내 손자, 얼마나 아팠느냐……!”

단테는 론이 자신의 꾀병을 알고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계속 의식을 잃은 척했다.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이 할아비가 금방 다시 오마. 깨어나거든 우리 손자 좋아하는 황실의 용왕탕을 먹으러 가자꾸나. 황제, 아니. 폐하에게 특급 요리사를 대기시켜놓으라고 말해놓겠다.”

론이 코를 훌쩍이는 사이, 단테는 짜릿한 마음과 조부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론은 그런 손자를 훤히 꿰뚫어 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고 말이다.

끼익.

론이 나가고 십여 분 뒤, 진이 치료실로 들어섰다. 동시에 단테가 깨어난 척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소가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기절은 오랜만이군……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30분 정도입니다.”

“길지 않아 다행이야. 아, 폴 그레이 믹.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 자네들은 잠시 나가 있게. 이 친구와 둘이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의사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단테가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혹시 그대도 속았소?”

“아니.”

“역시, 그대는 못 속이는군. 진! 내 연기가 어땠소? 훌륭하지 않았소? 하하, 이만하면 조부께서 내가 그대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셨을 테니, 분명 금화 3억을 약조하셨을 테지. 아니, 5억도 내어주셨을 것이야!”

잔뜩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단테.

“내심 걱정이 되기는 했소. 하이란과 룬칸델이 친구로 지내는 것을, 조부께서 과연 곱게 보실까 싶었소. 하지만 결국 조부님은 내 편이오. 내가 그대를 위하고자 한다면, 조부님 역시 그대를 위하……”

거기까지 말한 단테가 진의 표정을 살폈다.

진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채, 반쯤 영혼이 나간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 진? 그대. 무슨 일이 있던 거요?”

“다 털렸다…….”

“무, 뭐라고?”

“다 털렸다고, 네 할아버지께.”

“정말이오?”

“정말이다.”

단테는 직접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악마 같은 친구가 누군가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털리다니? 아무리 조부가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이 당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어, 음, 어어…… 흠. 미안하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조부께서 그럴 분이 아니건만.”

“아니,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내가 안일했던 거다. 후, 좋은 할아버지를 뒀더군.”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겠소?”

그러자 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잃기만 한 건 아니야. 도자기에 더해 고대 만년철도 일부 넘기기로 각서까지 썼지만…… 하이란의 정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되었지.”

흑기사 암살 임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진이 그 임무를 완수한 후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기수 중 론과 연이 있는 자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누구든, 룬칸델을 배신한 것은 아닐 거다. 아마 론 경에게 빚을 진 적이 있는 인물이 알렸겠지. 일회성 정보 제공일 가능성이 높고. 첩자를 심었다면 론 경이 그렇게 당당했을 리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론에게 그 정보를 넘긴 기수가 누군지를 알아내서 이용해먹으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론 하이란이라는 절세의 기사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고 하이란과 본인의 이득을 포기하지 않는, 가주의 모범.

그러나 손자를 위해서라면 목숨이 아니라 더한 것도 바칠 수 있는 자상하고 따뜻한 할아버지.

‘그런 의미에서 론 경은, 이미 내게 최대의 약점을 잡힌 것이나 다름이 없어.’

단테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론은 앞으로 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단테가 당장 몸을 던져 진을 구하려 했던 것을 직접 보았으니 말이다.

‘도자기와 만년철을 가져간 것은 경고다. 차후 단테를 앞세워 자신을 이용할 생각 따윈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

진이 인식하기에, 그건 ‘강자로서의’ 경고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중한 것을 일방적으로 저당 잡힌 입장에서 허세를 부린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때문에 론에게 당하고도 크게 잃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 론 경께 빼앗긴 것들은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 문제는, 당장의 자금줄을 하나 잃었다는 것.’

아무래도 돈을 구하기 위해 예상보다 더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할 것 같았다.

“진, 일단 조부님의 허락 없이 가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금전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소. 도움은커녕, 오히려 해가 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군.”

“괜찮아, 돈은 내버려둬. 다른 곳에서 구하면 돼.”

“가능한 일이오?”

“가능하게 만들면 될 일이지. 그보다, 나 임무에서 베라딘 만났다.”

“……얼마 전 룬칸델과 지플이 맞붙은, 밀라 왕국의 분쟁지역 벤티카에서 말이오?”

단테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진과 베라딘, 두 사람이 임무에서 만날 일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목적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베라딘 공은 어땠소?”

단테도 진이 서해에서 도망친 이후 한 번도 베라딘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정상이 아니더군. 기억 조작을 넘어 이제는 아예 정신도 온전하지 않았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고, 공격하기도 했지.”

진이 한동안 그날의 일들을 단테에게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단테는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신이 온전해졌을 때, 베라딘 공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가질 않소.”

“아마 매일 그렇게 전쟁광 같은 상태는 아닐 거야. 종종 소식지에 녀석이 연회 등의 대외 활동을 정상적으로 치르는 것이 서술되곤 했으니까.”

“구해주고 싶소.”

“동감이다. 하지만 때를 기다려야 해. 더 확실한 순간이 올 때까지.”

“진.”

“왜?”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단테가 머뭇거리며 진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만약에 말이오, 베라딘 공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시는 그때 그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어서, 지플을 위한 인형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할 것이오?”

물어보긴 했으나.

원하는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진이라면 단칼에 그러면 포기해야지, 혹은 죽이는 게 베라딘을 위한 길이겠지…… 그런 대답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굳이 물어본 이유는,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진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방법을 찾는다.”

진의 대답에 단테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오!?”

“그럼 정말이지 가짜겠냐. 놈을 포기해봤자 내가 얻는 게 없잖아. 친구이기도 하고.”

“진! 이 몸은 몹시 감동스럽소!”

“그러니까 론 경께 전해드려, 생각하시는 것보다 내가 그렇게 영악하기만 한 놈은 아니라고.”

“어차피 오늘 일로 조부께서 그대와 내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대에 대해 조금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할 생각이오.”

“그래, 그래. 난 슬슬 돌아가야겠군.”

“벌써? 저녁 식사도 같이 하고, 술도 한 잔 하고 가는 게 어떻소?”

“방금까지 빈혈로 쓰러져 있던 사람이랑?”

“그건 다 연기였잖소.”

“됐다, 나중에 연회 열면 불러. 혹시 모르니 베라딘한테도 초대장 보내보고.”

“알겠소!”

* * *

그날 밤, 티칸으로 돌아오자마자.

진은 다시 한 번 론 하이란이 제 ‘하나뿐인’ 손자를(하지만 단테에게도 형제가 있다) 얼마나 아끼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공자, 진 공자!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오늘 아침까지 초상집 분위기였던 티칸은, 정반대로 축제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카시미르 경?”

“공자는 역시 우리 티칸의 복덩이입니다. 황가를 제외한, 비먼트의 거의 모든 무가들이 앞다퉈서 돈과 물건을 싸들고 오고 있다고요.”

얼떨떨하게 듣고 있던 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단테, 이 복 많은 녀석.’

론은 진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나를 잃으면 반드시 둘 이상을 빼앗는 싸움꾼 꼬마.

의심할 여지없이 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손자이지만, 그와 별개로.

손자의 동년배 중엔 진이 단연코 최고라고 생각했다. 무력, 통찰력, 계략, 배짱, 그리고 마법까지도.

때문에 차라리 날개를 완전히 꺾어놓을 것이라면 모를까, 어설프게 건드려봐야 손자에게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정말 뼛속까지 손자만을 위한 계산이었다.

“돈벼락입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탄탄한 거래처들로 물갈이를 한 셈이 되었다고요!”

카시미르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론 경께선 과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판단을 하셨군.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어.’

황가를 제외한, 비먼트의 거의 모든 무가들이 티칸과 거래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건 티칸의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으로 끝인 호재가 아니었다. 진과 카시미르가 앞으로 티칸을 운영할 때, 이번처럼 룬칸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대신 룬칸델이 아니라 론과 하이란을 신경 써야 하므로 자율권이 어느 정도 훼손된 지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진의 입장에선 향후 티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두 세력, 말하자면 룬칸델과 하이란 중 하나와 싸워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가 덜 부담스러웠다. 룬칸델은 하이란보다 명백히 강한 가문이니 말이다.

“오늘 찾아온 무가들만 거래처가 되기로 확정된다면, 더 이상 돈을 구하지 않아도 될 지경입니다.”

그 말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안 그래도 기별을 받았습니다. 곧 공자의 손님들이 도착할 것이라 말이죠. 아! 저기, 제트가 데려오고 있는 것 같군요.”

창밖을 보니 제트를 따라오는 한 거구가 보였다.

그는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묘하게 어딘가 어긋난 것 같은 걸음걸이로 저택에 다가오고 있었다.

“나으리! 데려왔습니다요!”

제트가 호쾌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가까이서 보니 로브를 입은 거구가 훨씬 커 보였다. 골격이 기묘해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후드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보며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들, 남들 변장은 감쪽같이 시켜주면서 말이야. 정말 이게 최선이었나?”

“왜, 이 정도면 꽤 훌륭하지 않아!?”

훌렁!

로브가 벗겨지자 진의 허리께에 겨우 닿을 것 같은 털뭉치들이 드러났다. 거구의 정체는 ‘네 명이 인간 하나처럼 합체한’ 금설족이었다.

“어, 훌륭하지 않아. 오랜만이다, 팽이.”

“아, 거. 모양 빠지게 이럴 거야? 우리 이제 그 동굴 속 가난뱅이들 아니라고. 이왕이면 금팽이 상단 1번 행수 팽이라고 불러줘, 룬칸델 12기수 진 룬칸델 경.”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