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7화
100화. 무슨 징계가…….(3)
“징계 회의가 끝났다고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텔롯.
“어떤 처분이 나왔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외출 금지 3년,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징계가 당사자도 없이 확정되었을 리는 없겠지요.”
“어처구니없는 징계라고 생각하나?”
“예,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룬칸델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외출 금지는 말 그대로 신체적 자유를 강탈하겠다는 의미인데, 룬칸델의 기수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입니다. 만일 제가 외출 금지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룬칸델의 이미지도 우스워질 겁니다.”
진이 또박또박 말하자 텔롯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조소인지, 미소인지 헷갈리는 웃음이었다.
“그 말이 옳다. 하지만 자네가 받은 처분은 그대로다. 외출 금지 3년.”
“안에 원로분들이 아직 남아 계십니까?”
“들어가서 따지기라도 할 셈인가?”
“그렇습니다.”
“원로들이 과연 자네가 따진다고 징계를 물러줄까?”
“걱정은 감사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는 것에 재주가 있는 편입니다.”
진이 텔롯의 눈을 보며 말했다.
몇 초쯤 정적이 흘렀다.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지나치려는 찰나, 텔롯이 가볍게 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네의 징계는 내가 유보시켰다. 그러니 멈추게.”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제 징계를 멈춰주셨다고요……? 호민회장님께서?”
“그래.”
징계를 유보시켜준 것은 분명 진을 도와주는 행위였다.
그래서 진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는 진리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것.
‘아무 뜻도 없이 내게 호의를 보였을 리는 없다. 호민회장이라……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콜론 유적지를 점령하려다 실패했었다는 기억만 나는군.’
텔롯 룬칸델.
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전생에서 원로회와 엮일 일이 있었을 리 만무하니 당연한 일. 따라서 그가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호민회장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텔롯이 또 한 번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말귀가 밝은 친구로군. 어떤가, 이 노인과 차 한 잔 할 텐가? 아니면, 들어가서 징계 유보조차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원로들과 싸움을 할 텐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원로회를 이루는 세 가지 단체.
흑검회, 호법회, 호민회.
그중 호민회가 가장 영향력이 적은 편이라곤 하나, 호민회장인 텔롯은 말할 것도 없이 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텔롯이 유보를 결정했다면, 진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결과도 유보에 가까우리라는 이야기.
‘어쩌면 유보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조슈아가 거래를 제안한 것이 아니었으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패가 한정적이기는 했어.’
앞으로 금설족 사업체에서 들어오기 시작할 돈과 진보된 결전기.
현재로서는 진이 원로회와 거래할 수 있는 패는 그 두 가지뿐이었다. 이번에 사용해도 나쁠 것은 없었으나, 패는 아낄수록 좋은 법이었다. 더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차 쪽이 좋겠습니다.”
“좋군, 가도록 하세. 내 비밀 거처로. 그런데…… 자네.”
“말씀하십시오.”
“정말 그 꼴로 징계 회의에 참석할 생각이었나?”
“예. 문 앞에서 마주쳤는데 그렇게 물으시니 민망합니다.”
“허허허. 내가 다른 원로들과 생각이 달랐던 걸 다행으로 알게. 그대로 들어갔다면, 흑검회장이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군.”
텔롯이 하인에게 자신의 전용 마차를 불러오라 명령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마차에 올라 그의 거처로 향하기 시작했다.
‘비밀 거처라고?’
다그닥, 다그닥…….
마차 안에서 텔롯은 달리 말이 없었다. 진도 굳이 호기심을 드러내거나 대화를 시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텔롯은 오히려 그런 태도를 흐뭇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여기에 룬칸델을 데려오는 건 오랜만이로군.”
텔롯은 검의 정원 내에 있는 자신의 별채에 데려오지 않고, 일부러 그를 다른 거처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들이 내린 곳은 칼론 외곽의 한 골목이었다.
칼론은 검의 정원이 있는 도시인 만큼, 휴페스터 연합의 심장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휴페스터 어느 곳에도 칼론보다 발전한 도시는 없었다.
그렇기에 칼론의 거주민들은 평민이라 할지라도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곳에도 빈민가가 존재했다. 비록 행정 구역을 미묘하게 벗어나 있지만 말이다.
텔롯의 비밀 거처는 바로 이곳에 있었다.
‘비밀 거처라기에 거창한 공간일 줄 알았는데, 빈민가라.’
골목이 너무 좁아 마차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오물과 빈자들이 가득한 골목 몇 개를 삼십 분쯤 걸었다.
걷는 동안 걸인, 혹은 빈자들이 조심스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감히 구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빈민가에 굳이 거처를 둘 정도면, 이곳을 살리고 싶은 모양인데. 어째 저들을 보는 시선이 살벌하군.’
텔롯은 빈자들을 전혀 연민하지 않았다.
아니, 연민하지 않는 것을 넘어 혐오하는 듯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텔롯의 두 눈동자엔 살의가 가득했다.
“골목길이 꽤 길지?”
“예.”
“세상 대부분은 휴페스터의 심장인 이 도시에 이런 빈민가가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동 관문으로 도착하면 온통 번쩍번쩍한 건물들과 잘 닦인 길들만 보이니 말이다.”
슬슬 진은 텔롯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채고 있었다.
끼익.
텔롯이 낡은, 아니. 거의 삭은 듯 보이는 나무문을 열었다. 대충 널빤지를 겹겹이 쌓아 만든 이 좁고 더러운 집이 바로 텔롯의 비밀 거처였다.
문이 열리자 확 짐승 냄새가 풍겼다.
“왈왈!”
“멍!”
“냐옹!”
“오냐, 오냐. 밥들 먹어라.”
인자한 눈길로 짐승들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텔롯. 짐승들이 텔롯에게 들러붙자 그의 광나는 갑옷에 자국이 남았다.
진은 그가 먹이를 나눠주는 걸 한참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왜 여기로 자넬 데려왔는지 알겠나?”
“빈민가가 없어지길 바라시는군요. 제 사업체가 돈이 될 거라는 걸 알아보신 것 같습니다.”
“없애자면 지금 당장도 없앨 수 있다. 수호기사들을 보내 바깥의 저 쓸모없는 인간들을 다 죽여 버리고, 인부들을 시켜 빈민촌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건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지.”
텔롯이 짐승들을 부드럽게 손으로 밀어 떼어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럽지 않아. 게다가 룬칸델이 굳이 이 빈민가를 내버려두는 건, 부가 충분히 넘치지 않기 때문이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떼어내도 다시 달라붙는 짐승들을 보며 텔롯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빈민들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단정하시면서, 동물들에겐 관대하시군요.”
“이 짐승들은 아무 죄가 없지 않느냐. 걸인들은 사지가 멀쩡한데도 구걸만 하고 있으니 죽어 마땅하다. 내가 저들을 살려두는 이유는 연민하기 때문이 아니다.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을 뿐.”
“그렇군요.”
“알고 있느냐? 루테로 마법 연방의 중심 도시, 드락카엔 이따위 빈민가가 단 하나도 없다.”
“알고 있습니다. 드락카뿐만이 아니라, 인근 스무 개 정도의 도시엔 빈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건 지플이 중심 도시들의 빈민 구제에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지플이 가진 부가 너무 많아서 자연스레 아래로 흐른 결과일 뿐이지. 발에 차일 정도로 말이다.”
텔롯의 말대로였다.
자금력만으로 룬칸델은 비먼트와 함께 세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를 다퉜다. 하지만 첫 번째인 지플은 두 세력의 자금을 합친 것보다도 막강한 부를 갖고 있었다.
“나는 자네가 시작한 사업이, 지플과 우리의 자금력 격차를 줄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이 빈민촌도 굳이 힘을 쓸 필요 없이 번듯한 공간으로 변모하게 될 터.”
“검의 정원에 사업 수익금 일부를 상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 문제라면 가만히 내버려둬도 알아서 어느 정도는 바쳤을 텐데요.”
“헛소리. 그간 지켜본 바, 자네는 절대로 자신의 것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야.”
“수익금의 몇 할이나 원하십니까?”
텔롯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2할.”
내심 놀라웠다.
다른 원로였다면, 같은 상황에 분명 훨씬 더 큰 비율을 불렀을 터.
“확실히, 절 제대로 보신 모양이군요. 그 이상을 부르셨다면 결코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속임수 없이, 매달 2할을 성실하게 바친다면. 내 최대한 자네의 사업을 도울 것이다. 유보에 멈춰있는 징계를 아예 없애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어차피 2할 이상은 가문에 뜯길 걸 각오하고 있었다. 최대 5할까지도 생각했으나, 텔롯이 이렇게 나와 주니 진으로서는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징계에 대한 건만으로 2할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얻는 대가가 조금 모자라는군요.”
그러나 덤을 얻어갈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무엇을 더 받고 싶나?”
“원로회장과 2기수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조르덴 룬칸델.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로사의 사람이었으나, 진은 아까 조슈아와의 대화에서 한 가지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조슈아가 원로회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
‘놈은 은근히 내가 외출 금지라는 징계를 받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다.’
텔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똑똑한 머리로 뻔한 문제에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군. 그야 뻔한 것 아닌가? 조르덴 룬칸델, 원로장과 2기수는 상생이자 경쟁 관계다.”
“말씀대로 상생은 빤하지만 경쟁에 대해선 금시초문이로군요.”
텔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자네는 나와는 물론이고, 상위 기수들과도 시대가 조금 다르니 그럴 수 있겠군. 하나만 알아두게. 원로장은 아직 가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네.”
조르덴과 함께 세월을 보낸 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진은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를 보내고 있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깐 네놈 행동이 속 시원해 나서긴 했다만, 조르덴 원로장은 보기와 다르게 만만찮은 인물이다. 그저 그런, 속 좁은 꼰대처럼 보여도 아주 영악하고 강인한 작자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서열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분이잖습니까.
-그건 뭐…… 가주께서 그냥 봐줬다고 해석해야 옳긴 하다만. 어쨌거나 잘 안다는 놈이 왜 그리 미친개마냥 날뛰었느냐?
문득 기수 임명식을 끝낸 직후 제드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원로장이 외출 금지 3년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온 이유를 알겠군. 그걸 이용해 내게 목줄을 걸고, 조슈아를 견제하는 일에 사용하려던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에게 징계를 빌미로 거래를 제안하려던 것은, 조슈아가 아니라 조르덴이었다는 것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조르덴이 단지 ‘조슈아의 조력자’를 자처하는 인물인 줄만 알고 있었다면, 앞으로도 자신은 늘 그에 맞춰서만 대응을 했을 테니 말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내가 제대로 값을 치른 것 같군.”
“만족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좋아, 이만 돌아가게. 이번 거래에 대한 계약서는 사람을 시켜 자네 방으로 보내도록 하겠다. 하지만, 내 비호가 있다 할지라도 자네 사업이 완전히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건 잊지 말도록.”
“우산 정도만 되어주셔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텔롯은 한참 동안 짐승들을 어루만지며 빈민촌에서 시간을 보냈다.
진은 바깥에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호민회장, 별난 분이군.’
반면 텔롯은 진이 떠나간 자리를 보며 이런 마음을 가졌다.
‘12기수가 과연 룬칸델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