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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막내아들-332화 (331/1,001)

제 332화

103화. 과거의 기록 – 집사장 르엣 다미로 율(2)

희망.

적의 초월적이고 악마 같은 힘 앞에서, 너무나도 절실했던 두 글자.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르엣이 띄운 창에 적힌 글씨를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집사와 문사들의 글씨는 계속 지워지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집사장! 여기 적힌 내용대로라면, 놈들의 그 사악한 역사 조작 능력으로도 가주를 어쩔 수는 없는 모양이군요……!

다이애나가 르엣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엘로나 지플을 비롯한 삼천이십육 명의 마법사.

삼천이십육.

그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건 룬칸델이 파악하고 있는 지플의 최정예 마법사 모두를 합친 숫자였고, 정확히 일치했다.

또한 엘로나 지플은, 가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플 내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녀와 지금껏 숱한 전투를 치러본 바.

테마르와 십대기사들은 엘로나가 지플 전체 전력의 5할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으니, 이보다 그녀의 힘을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엘로나, 그 괴물 같은 마법사와 정예 마법사 전원이 이미 가주를 한 번 음해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오.

파들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작년에 십대기사들과 함께 엘로나를 저지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십대기사들은 자신들이 ‘괴물’이라 부를 만한 인간이, 테마르 외에 세상에 또 한 사람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대체 놈들은 무슨 수로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 거야? 빌어먹을 새끼들, 분명 뭔가 이야기의 탑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실더레이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말대로 아직 룬칸델은 지플이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플의 마법사들이 대규모로 이야기의 탑에 몰려든 다음이면, 조작이 발생한다는 사실만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이야기의 탑 외에도 ‘역사 조작’이 실행되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공간이 몇 군데 더 있었다.

어차피 가주께서 우선적으로 놈들의 마탑을 다 파괴하자고 결정을 내리셨으니, 조만간 답이 나올 거다.

루테로 마법 연방의 본채, 드락카는 아직 공격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엘로나가 상시로 방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탑들은 순조롭게 파괴되고 있었다. 이야기의 마탑처럼 지플이 주요 주둔지로 사용하는 곳을 제외하면, 벌써 백 개 이상의 마탑을 파괴한 상태였다.

십대기사 사라 룬칸델 경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한 수호기사가 회의실로 달려와서 말했다.

그러자 르엣과 십대기사들이 동시에 사라를 맞이하러 뛰기 시작했다.

계속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테마르와 사라, 둘 중 한 사람이 돌아오기를 말이다. 그 두 사람이 다른 십대기사들을 이끌고 지플의 마탑들을 치는 중이었다.

르엣과 십대기사들은 마음이 어찌나 조급했는지, 쏟아지는 빗물도 막지 않고 성 앞까지 달려가 사라를 만났다.

사라!

사라 경!

뭐야, 다들 이 몸을 엄청 기다렸던 것 같군. 강아지들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달려오면 내가 민망하잖아.

사라가 달려온 동료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가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녀에게서 진한 탄내와 재 냄새가 났다. 직전까지 치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특히 파들러, 이 약골은 비 맞으면 감기 걸릴 텐데. 하하.

어떻게 됐어? 사라, 적들의 탑을 다 부수고 온 거냐?

아니, 안 되겠더라. 엘로나 같은 마법사가 또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냐? 실더레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한 오십 개쯤 때려 부수다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뭐, 저, 정말이냐……!?

사라의 어설픈 거짓말에 속은 것은 실더레이 한 사람뿐이었다.

또 속냐, 실더레이. 크하하! 속을 걸 속아라. 매번 이렇게 쉽게 속으니 내가 장난을 그만둘 수가 없잖아.

뭐? 거짓말이라고? 또?

그래. 그런 미친 괴물이 세상에 또 있겠냐, 응? 하여간 멍청해서 귀여운 맛이 있다니까.

이게, 우린 너 기다리는 동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는데. 그런 거짓말을 해?

그 피가 마르는 기분 좀 가라앉혀주려고 그랬다. 이 누나가.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리면서 누나는…….

다른 동료들은 사라가 거짓말을 한 시점에 이미 그녀의 임무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라가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보일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일단 우리 쪽에 배정된 탑은 다 파괴했어. 오라버니, 아니. 가주가 있는 조보다 훨씬 숫자가 적긴 하지만. 잿더미로 만든 마법사만 만 명은 될 것 같군.

과연 사라는 십대기사 중 최강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죽인 마법사의 숫자엔 허수가 전혀 섞여있지 않았다.

가주 쪽도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되었을 거야. 그런데 이상하긴 하군. 부숴야 할 마탑이 더 많긴 하지만, 가주가 우리보다 더 먼저 끝낼 줄 알았는데.

사라의 조가 파괴하기로 한 탑은 스물.

테마르의 조가 파괴하기로 한 탑은 마흔.

두 배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마르가 지닌 무력은 충분히 그 차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어째 기분이 이상한걸? 오랜만에 가주를 내가 이긴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 가주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엘로나의 위치는 우리가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 그러니 가주께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없다. 아마 네 마검 비기가 완성되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

역시, 그렇겠지? 하긴, 마지막 다섯 개는 모조리 업화로 쓸어버리긴 했어. 살살 녹던데.

도대체가, 사람한테 녹는다는 표현 같은 것 좀 안 쓰면 안 되는 것이오?

파들러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사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게 사람이란, 룬칸델의 적이 아닌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야, 약골. 알면서 새삼스럽게 굴기는.

그래도, 그대 정서에 좋을 게 없어 보인단 말이오.

내가 사춘기 소녀야? 내 정서 챙길 시간에 네 건강이나 챙기셔.

사라가 파들러의 머리칼을 헝클며 웃었다.

르엣이 가져온 희망과 더불어 사라의 등장에 무거웠던 십대기사들의 표정이 빠르게 누그러지고 있었다.

사라, 이것 좀 보세요.

르엣이 그녀의 앞에 다시 한 번 반투명한 창을 띄웠다.

응? 이게 뭐예요, 르엣? 엘로나 지플을 비롯한 삼천이십육 명의 마법사가…… 오! 이건 진짜로 좋은 소식이군. 우리 오라버, 아니. 가주가 대단하긴 대단한가 봐?

물론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엘로나 지플과 최정예 마법사 전원이 포함되긴 했지만, 지플의 가주와 부가주가 빠져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요정족’의 역사를 조작하는 일에 지플은 가주와 부가주, 그리고 오백 명의 최정예 마법사를 사용했다.

이 역시 르엣의 기록 능력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당연히 지플 가주와 부가주의 힘도 무시할 것은 아니었다. 엘로나에 비해 모자랄 뿐, 그들 역시 충분히 초월적인 영역에 닿아있는 인물들이었다.

수만 년에 달하는 요정족 전체의 역사를 지우는 데 그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그보다 더 큰 힘을 사용하고도 테마르의 역사를 조작하진 못했다는 게, 르엣은 무척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동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잊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동족들이 쌓아온 수만 년의 세월과 역사가, 테마르라는 한 인간보다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게 서러웠다.

존재의 힘.

르엣은 기록 창에 적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읽은 사라가 르엣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사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말이죠, 내 생각에. 이 존재의 힘이라는 건 그냥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주고 있는가, 그게 기준인 거지. 지플이 요정족의 역사보다 테마르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이유고.

그러니까 사라 경의 말씀은, 세상에 큰 변화를 주는 존재일수록 지플이 조작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응, 테마르는 지금 세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고 있잖아요? 요정족은 관망자이자 기록자인 만큼 세상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역할인 거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르엣.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사라 경.

물론 어디까지나 그냥 감일 뿐이지만. 꽤 그럴듯하잖아요. 솔직히, 내 오라버니이자 우리의 가주지만. 나는 테마르 한 사람의 가치가 요정족 전체보다 우월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여러 존재들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을 테고요.

다른 십대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르엣이 처음 소식을 가져왔을 때, 기쁘긴 했지만 사라처럼 르엣을 걱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뭘, 집사장께서 우리한테 해주는 것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죠. 자, 그럼 우린 가주가 돌아올 때까지 오랜만에 한 잔…… 하고 싶긴 하지만, 집사랑 문사들이나 좀 도와줄까? 손이야 많을수록 좋을 테니.

사라가 파들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한 순간.

자연스레 기록 창을 쳐다보고 있던 르엣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 잠깐만요. 이게 대체 무슨……!

르엣의 새된 목소리에, 십대기사들은 일제히 불길한 직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집사장, 왜 그러십, 하…….

르엣의 곁으로 다가오던 다이애나가, 기록 창을 보곤 말을 멈췄다.

정확히는 멈춘 것이 아니라,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기록 창을 본 다른 동료들도 다이애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기록 창에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문장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797년 3월 3일, 테마르 룬칸델과 그를 따르는 십대기사들이 페일린 왕국에 있는 지플의 마탑 다섯 개를 파괴하다. 룬칸델 측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지플 측엔 생존자가 단 하나도 남지 않다.>

<……년 3월 3일, 테마르 룬칸델과 그를 따르는 ……들이 ……왕국에 있는 지플의 마탑 ……, 파괴하다. ……, …….>

<……, 테마르 룬칸델과 ……, ……, ……, ……,>

사라지고 있었다.

테마르와 십대기사들이 바로 ‘오늘’ 지플의 마탑을 파괴한 기록들이.

하지만 르엣과 십대기사들이 받을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740년 6월 6일, 클리오 지플이 페일린 왕국에 다섯 개의 마탑을 지으라고 권속들에게 지시를 내리다.>

<743년 8월 2일, 지플의 마법사들이 완공된 마탑들에 배치되다. 각각 지플 방계 가문 다섯의 소가주들이 탑주로 임명되다.>

<744년 1월 5일, 방계 가문의 소가주들이 탑주에서 물러나다. 그 자리를 순혈 지플들이…….>

<750년 12월 20일…….>

쉴 새 없이 기록 창의 내용이 갱신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갱신된 내용은, 바로 이러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기록이었다.

<797년 3월 3일, 페일린 왕국에 있는 지플의 마탑 다섯 개가 건재하게 운영되다. 이 마탑들은 완공된 이후 단 한 번도 외부의 공격을 받은 일 없이, 57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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