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5화
106화. 기록자들(3)
‘이런 미친! 설마, 지금?’
진과 시리스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반면 탈라리스는 종종 있던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는데,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무려 천 년 전에 봉인된 인간이 만빙과 나의 힘을 넘어서고 있지. 너무 놀랄 것 없다. 한 번은 봉인이 절반 이상 부서진 적도 있느니라.”
균열이 일었을 뿐, 얼음 기둥 속 엘로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이 없었다.
탈라리스가 균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만빙의 기운이 흘러나와 균열을 파고들었다. 서서히 얼음 기둥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탈라리스는 그 균열을 복구시킨 것만으로도 무척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흐응, 우리 사위를 괜히 걱정시킨 건 아닌지 모르겠군. 하하.”
시리스는 계속 이어지는 사위 농담에도 짜증내지 않고 제 어머니를 걱정하는 모습.
“천 년 동안 이 여자는 지치지도 않은 모양이란 말이지.”
“……혹시 아버지께서도 엘로나 지플의 존재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우리 사정을 잘 모르던 젊은 시절엔, 이 여자를 깨워서 한 판 붙어보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아버지께서요?”
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탈라리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절의 시론은 자신을 달래줄 강적이 나타나기만을 바랐다. 이 여자가 깨어났다간 자칫 세상에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따윈, 소싯적의 네 아비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지.”
탈라리스가 시론과 벗이 된 건 그 무렵이었다. 매번 비궁을 찾아오는 시론과 숱하게 검을 섞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네 아비도 정신을 좀 차려서, 가진 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 책임이란 것이, 흑해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건 시론에게 직접 들어라. 아직 네가 시론의 일에 대해 모른다면 그건 그에게 생각이 있어 그런 것일 테니.”
“알겠습니다.”
“진.”
“예, 탈라리스 님.”
“오늘부터는 이 봉인을 지키는 일에 너도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탈라리스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진은 외인입…… 아니, 설마. 진짜 사위라고 생각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
“으흥, 하여간 딸을 놀리는 건 아무리 해도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지. 농담이야. 나는 단지 진이 가진 능력이 이 봉인을 유지하는 것에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할 뿐이란다. 혼자서 감당키 버거운 때가 왔거든. 벌써 네게 만빙을 넘길 순 없고 말이야.”
시리스로서는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진에게 뭔가를 의지하려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만큼 자신이 어머니에게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마음에 속이 상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의 판단이 그렇다면 자신은 따라야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시리스가 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은 물끄러미 그 손을 쳐다보다 맞잡았다.
“이것이 비궁과 룬칸델의 동맹은 아니라는 걸 인지해줬으면 하는군. 이건 비궁과 진 룬칸델이라는 개인의 동맹이다.”
“저도 그쪽이 더욱 마음에 드는군요.”
사실 시리스 또한 비궁이 진과 가까이 지내는 게 싫지는 않았다.
비궁주의 외동딸로 살아온 그녀는 ‘친구’라는 관계에 익숙지 못했다. 그녀에게 또래의 친구 비슷한 사람은 오직 진 한 사람뿐이었다.
‘처음 인연이 닿았을 때 날 속여먹은 건 괘씸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긴 하지.’
첫 만남을 제외하면 시리스는 이후 쭉 진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침반 탈취 작전에도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 아주 보기 좋아. 두 사람. 딸, 어떻게. 어미가 자리 좀 비워줘? 둘만의 좋은 시간 좀 가져볼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
“응. 그럼 이따가 보자, 딸.”
보오옹!
모트가 백색의 차원문을 열었다.
탈라리스는 두 사람을 남긴 채 모트를 타고 바깥의 비궁으로 돌아가버렸다. 졸지에 진과 시리스는 둘만, 아니. 얼음 기둥 속 엘로나까지 셋이 남은 채 탈라리스가 떠난 자리를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머니가 좀 유별나신 편이니 이해해주면 고맙겠군, 진.”
“물론입니다. 제 아버지에 비하면 평범한 편이신 것 같기도 하고요.”
한 차례 대화가 오간 뒤 또 정적이 흘렀다.
‘불편하군.’
‘불편해.’
몇 초쯤 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시리스 님.”
“음.”
“먼저 이야기하십시오.”
진이 냉큼 뒷말을 이었다. 사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말이야.”
“예.”
“그 녀석들도 변신을 하나?”
“변신이라고요……? 그 녀석들이 누굽니까?”
“네가 데려온 수인들 말이야. 걔들도 나비 룬칸…… 아니, 네 흑룡처럼. 징그러운 인간으로 변신을 하냐는 말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시리스가 민망할 테니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아뇨, 그 친구들은 용이 아니라 정말로 수인입니다. 변신은 용밖에 하지 못하지요.”
“다행이군.”
“그들이 다 용이었다면 꽤나 든든했을 텐데요.”
“연회에서 본 그 귀여운 고양이가 그 시커먼 멀대라고 생각하면 아직도 가끔 소름이 끼쳐. 연회장에서 나한테 얼마나 아양을 부렸는데.”
“하하…….”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듯, 시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심지어 연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내 곁을 떠나지 않았지. 네가 부바르라는 작자와 결투하는 걸 구경 갈 때도 내 품에 안겨 있었고.”
-오! 이번 연회는 참석하길 정말 잘한 것 같군요.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비궁의 후계까지 만나 볼 수 있을 줄이야! 반갑습니다, 시리스 엔도르마 님 맞죠? 저는 베라딘 지…….
-저리 꺼져요.
-아, 옛.
-그나저나 그 고양이 조심하세요. 제 얼굴을 할퀸 적이 있는 놈입니다, 하하. 아주 사나운 녀석이죠.
시리스가 당시 베라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곤 진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베라딘,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들려오는 소식이 없으니 답답하긴 하군. 단테 녀석도 아직 전해들은 내용이 없는 것 같은데. 하이란의 연회에 초대할 것만 아니라, 지플 쪽 연회도 가보라고 해야겠어.’
여러 생각이 드는 와중, 시리스는 계속 룬칸델의 연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을 제외하면 알고 지내는 또래가 거의 없는 것처럼, 성장기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았다. 늘 수련과 임무로만 단련되어온 것이다.
그래서 시리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때의 연회는 그녀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은 상태였다.
불현듯 그 사실을 느낀 진이 시리스와 눈을 맞췄다.
그 역시 전생에선 아무런 추억 없이 유년기와 소년기를 모두 그냥 흘려보낸 것이다.
‘그때의 나와 달리, 시리스 님은 성장의 성취가 있긴 하지만. 분명 심심했을 테지.’
어쩌면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요. 시리스 님.”
“응.”
“티칸에 자주 놀러 오십시오. 이제 동맹이니, 시리스 님도 제 동료입니다.”
이전부터 시리스를 동료로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다만 그녀 또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 않아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놀러간다는 건 내게 익숙지 않은 일이야.”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논다, 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약간 들뜨는 느낌도 나고.”
시리스는 대부분의 상황에 차갑고 냉정한 편이지만, 솔직하지 않은 부류는 아니었다.
태어난 이후 비궁의 후계로서 늘 정진하는 삶만 살아왔으나 그녀 또한 사람이고,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녀였다.
당연히 다른 사람과 교감하고 싶을 때도, 마냥 생각 없이 놀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좋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슬슬 너도 말을 놓는 게 어때? 너만 계속 경어를 사용하니, 뭔가 이상하잖아.
시리스는 그 말을 삼켰다.
서로 말을 편히 하다 보면 자연스레 진과 더 가까워질 텐데, 그 속도가 빠르면 자신의 마음에 혼란이 일어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대체 언제 문을 열어주실지 모르겠군.”
“오늘 안엔 오시겠죠. 그때까지 수다나 좀 떨죠.”
“수다라,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좋아하는 편입니다.”
* * *
탈라리스가 문을 열어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시시콜콜하고 시답잖으나 즐거운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고만 느꼈다.
탈라리스는 그것만으론 다소 아쉽다는 눈치였지만, 둘은 즐거웠다는 마음이었다.
“나으리, 오셨습니까요!”
진은 비궁을 빠져나오자마자 티칸을 찾았다. 작은 수인들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티칸만 들렀다가 검의 정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연락을 받으셨습니까요? 집사 페트로는 나리께서 부재중이라 했고, 루카스는 나리가 비궁에 들어간 뒤 아직 나오시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내게 연락을 했었어? 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요.”
“손님?”
“그, 아리아 아울하트라는…….”
“어디에 있나?”
“라트리 님의 다과점에 있습니다요.”
다과점은 아침인데도 줄이 길었다.
진은 다과점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를 통해(손님이 너무 많아, 최근에 설치했다) 곧장 주방으로 들어섰고, 식탁 한쪽에 앉아있는 발레리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자마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금설족 제품들을 아주 잘 쓰고 있군.’
검게 염색된 머리와 다섯 살은 더 나이가 들어 보여 전혀 다른 사람 같은 화장이 몹시 자연스러웠다.
진이 발레리아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 필요 없을 것처럼 말하더니, 제품들을 잘 쓰는군.”
“나쁘지 않아. 돈 많이 벌겠던데. 두 번째 영기 구슬을 얻었다며?”
발레리아는 단 한 마디의 사담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진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고 말이다.
“그래.”
“한 번 보여줘. 어떤 물건인지 확인해보게.”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나? 자리를 옮기지.”
“여긴 주방에서만 보이는 자리야. 주방에 있는 진실의 용은 네 사람일 테니 상관없을 거고. 저 마법을 잃은 마법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네.”
발레리아가 자리를 옮기지 않으려는 것은, 이쪽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별걸 다 알고 있군. 베리스야 마력의 흐름을 읽어서 알았다고 해도, 라트리 님이 진실의 용인 건 극비인데.”
라트리에 대해선 기록을 확인해서 알아낸 것이었다.
“내 존재도 극비였어. 기록 장치나 한 번 보여줘. 확인해보게, 이번에도 고장 난 물건인지.”
진이 품속에서 조슈아의 별장을 습격할 때 얻은 영기 구슬을 꺼냈다.
발레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곧장 기록 마법을 펼쳤는데, 정말 그녀의 말대로 다과점 안에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른 마력이 구슬을 감쌌다.
잠시 후, 진은 또 한 번 발레리아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치우치는 오랜 습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슬 때문에 혼란스러운 건가? 뭐지?’
기록 마법의 푸른 마력이 사라졌다.
“어때? 이번에도 고장 난 상태인가?”
다음 순간 발레리아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그야말로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건 솔더렛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