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4화
109화. 오즈도크(1)
“어, 진짜로 곧장 반응하네?”
메리가 흥미로운 듯 눈웃음을 지었다.
진도 내심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다. 오즈도크라는 마물이 전성기에 비해 약해진 것은 둘째 치고, 천 년 동안 과연 흑해 지하에서 생존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쿠르르르…… 진동이 급격히 거세져 갔다.
깊고 깊은 지하에서부터 거대한 생명체가 용오름을 치듯 꿈틀대는 게 지면을 통해 생생히 전해졌다.
“오, 낚싯대에 고래라도 걸린 것 같은 느낌이군.”
입맛을 다시는 메리.
“놈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는 몰라도, 너희 둘 다 긴장은 좀 해야 될 거다.”
무라칸은 그런 메리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한창때의 오즈도크를 겪어보지 못했으니 저토록 자신감이 넘친다는 생각이었다.
파앗!
이내 오즈도크의 ‘팔’로 보이는 신체가 땅을 가르며 튀어 올랐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둥 같았다. 관절로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어서 유연한 움직임이 불가할 것 같았으나, 놈의 팔은 녹은 쇠처럼 부드러운 동작을 펼쳤다.
강철같이 단단한 질감과 물처럼 흐르는 성질을 동시에 갖춘 신체. 그걸 보자마자 베는 게 쉽지 않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오즈도크의 팔이 바닥에 떨어진 금을 찾아 흐느적였고, 메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만 있었다.
반면 진은 오즈도크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검을 뽑았다. 파직! 창백한 칼날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시퍼런 뇌기가 튀었다.
동시에 진에게서 일순 번쩍이는 빛이 번졌고, 다음 순간. 진은 (반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자신보다 큰 오즈도크의 팔을 베고 지나쳤다.
‘베이지 않았다.’
직감은 사실이 됐다.
마치 물을 벤 것 같은 감각이었다. 칼날이 닿은 순간 물렁하고 소름끼치는 감각만 있었을 뿐, 뼈와 살을 벨 때 특유의 묵직한 느낌이 없었다.
“야, 막내! 무슨 짓이야!”
메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오즈도크가 바닥에 놓인 금을 먹는 걸 기다려줄 계획이었다. 흥겨운 싸움을 위한 배려라는 차원에서.
“사냥감이 상할 뻔했잖아. 큰 타격은 없는 것 같군. 휴.”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닐 텐데요, 누님.”
“이 누이는 설레서 밤잠도 설쳤거든. 이미 약해지긴 했다지만, 조금이라도 저 마물의 컨디션을 올려준 다음에 싸우고 싶…….”
“그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저와 겨루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메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여유 부릴 새는 없을 것이란 뜻이죠. 제가 놈을 끝장내기 전에 누님도 뭔가 해야 할 겁니다.”
“하, 치사한 녀석.”
“혼자 은광갑 입고 최상급 마력 폭탄으로 밭을 만들었던 누님만 하겠습니까.”
“은근히 뒤끝도 있고.”
차르륵!
메리의 사슬검 독사의 이음새가 벌어졌다. 수십 개의 칼날이 순식간에 형형한 오러로 물들었고, 검을 뻗기 시작하자.
사방으로 날카로운 충격파가 튀었다. 슈리가 뱉은 금덩이들은 두부처럼 썰려나갔고, 오즈도크의 팔은 그야말로 난도질을 당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분쇄되었다.
그러나 베인 것은 아니었다.
오즈도크의 팔은 쾌검에 잠시 형체를 잃었을 뿐, 메리가 독사를 멈추자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곤 다시 바닥에 떨어진 황금을 찾아 꾸물거렸는데, 메리가 일으킨 충격파에 금괴 몇 덩이가 팔이 나온 구덩이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쩝-! 쩝-!
떨어진 금괴를 게걸스럽게 섭취하는 오즈도크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담긴 불쾌한 울림 속에 오즈도크가 지닌 어둡고 악랄한 기운이 잔뜩 묻어있었다.
구덩이로 떨어진 두 개의 금괴는, 기름바다에 닿은 불씨나 다름이 없었다.
[그, 워어어……!]
오즈도크의 포효에 다시 한 번 지진이 일었다. 놈이 처음으로 움직였을 때보다 몇 배는 강한 진동에 금방이라도 땅이 뒤집힐 것 같았다.
쿠아아아-!
오즈도크가 지상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놈이 내뿜는 기운에 지면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었고, 진과 메리는 파편을 쳐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쯤 무라칸은 슈리를 타고 저 멀리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피콘 놈 말이 사실이었군.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약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마와 저 녀석만으론 간당간당하겠어.’
아무래도 적당히 지켜보다 도와줘야 되겠어.
무라칸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천 년이나 봉인되어 쇠약해진 몸뚱어리임에도, 오즈도크가 내단 마물의 위용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오즈도크의 거대한 그림자가 대지를 어둡게 물들였다.
‘기괴하게도 생겼군.’
‘온다, 엄청나게 강할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이.’
진과 메리가 오즈도크를 올려다보았다.
몸이 전반적으로 각지고, 털이 없으며 성채만 한 원숭이가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이다.
가슴 한가운데서 뻗어 나오는 황금빛 기운이 도드라졌는데, 그게 오즈도크의 내단이었다.
[그워억. 커어어어.]
오즈도크는 지상에 발을 딛고도 한동안 괴상한 소리만 낼 뿐, 진과 메리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분위기였다.
애초에 진과 메리가 자신을 공격한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오즈도크는 얼굴 한가운데 박힌 붉고 커다란 외눈을 굴려 금을 찾는 데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오즈도크를 바라보는 메리의 눈동자는 마냥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어쩌면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공포에 질릴 수도 있었다. 아니, 대부분의 무인은 분명 오즈도크를 보며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이다.
메리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진에게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재생은 아닌 것 같고, 몸이 유령 같은 건가?’
진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메리는 이미 오즈도크를 향해 쇄도했다.
오즈도크는 바닥에 흩어진 금들에 길고 어두운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소멸할 때까지 베어주마, 오즈도크.”
샤악-!
그 혓바닥을 베는 것이. 아니, 베는 듯 보인 것이 시작이었다.
메리의 애검 독사가 난반사되는 빛처럼 무작위로 검기를 쏘았다.
진조차 눈으로 좇기 벅찰 만큼 빠른 속도에 겹친 잔상들이 남았고, 섬광이 그어질 때마다 오즈도크의 거대한 몸이 흐려졌다.
처음 몇 초간, 오즈도크는 계속해서 메리를 무시했다.
그러나 삼키려던 금괴가 메리의 기운에 갈려 가루가 되자 붉은 눈동자를 까뒤집으며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둔탁한 타격음.
오즈도크가 메리에게 시선을 옮긴 직후에 그런 소리가 들렸다.
단련된 무인의 주먹, 혹은 둔기로 사람을 타격할 때 나는 특유의 소리가 난 것이다.
“컥!”
동시에 메리가 튕겨지며 이를 악물었다.
오즈도크의 꼬리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결과였다.
다행히 공격이 닿기 직전에 방어한 덕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으나, 몸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내가 일격에 당할 뻔했어……?’
단 일격.
그것도 제대로 준비해서 한 공격이 아닌, 마치 파리를 쳐내는 무의식적인 손놀림 같은 공격에.
하마터면 전투 불능 상태가 될 뻔했다. 방어가 조금이라도 늦게 이뤄졌다면 갈빗대 한두 개 나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 광경을 지켜본 진도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몸집으로, 메리 누님이 반응하지 못하는 속도를 내?’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무라칸! 이거 약해진 상태 맞아?”
진이 소리쳐 묻자 무라칸이 양팔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정 힘들면 이 위대한 흑룡께서 도와줄 테니, 한 번 고생들 해봐. 크하하!”
메리는 다시 일어서서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렸고, 당혹과 분노가 급격히 차올랐다.
그녀는 그걸 그대로 표출하는 대신 냉정하기로 결정했다.
무인들의 세계에서 메리가 미친 싸움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계산 따윈 없이 무작정 치고받는 싸움을 최고로 좋아한다는 사실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무인들은 메리가 다혈질에 단순한 인물이라고만 생각했으나.
메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지금처럼 차가울 때 가장 무서워진다고 평했다.
‘막내랑 싸울 때도 그랬고, 망령대 놈들을 죽일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확실히 막내가 돌아온 이후부터 재밌는 싸움 천지로군. 자, 저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쩝, 쩝쩝! 바닥에 떨어진 금들이 오즈도크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습이 아주 효과가 없던 건 아니었다. 놈에게 부상을 입히진 못했으나, 유혹을 위해 챙겨온 금괴의 5할 이상이 두 사람의 공격에 유실되었다.
금괴는 오즈도크가 가진 힘의 원천인 만큼, 그걸 다 먹게 뒀다면 지금보다 원기를 두 배는 더 회복했을 것이다.
“막내.”
“예, 누님.”
“오즈도크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려면, 놈이 공격을 위해 몸을 단단하게 만들었을 때를 노려야 할 것 같다.”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엔 공기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군요. 뒤에 있는 저 망할 흑룡이 이런 부분을 조언해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무라칸은 슈리의 등에 누워 남매를 구경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심지어 미리 챙겨온 라트리의 쿠키까지 깨먹는 모습.
“그래도 항상 신체 전부가 공기 같은 상태는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저렇게 금덩이를 씹어 먹을 수도 없을 테니.”
“약점이 있을 거다?”
“예. 그리고 놈의 몸이 물리적 타격에 노출되도록 만드는 방법이 또 있을지도 모르고요.”
화륵, 츠그극!
진이 납검하며 동시 영창으로 양손에 하나씩 화염계와 빙결계의 마력을 띄웠다.
“전 마법과 권능으로 놈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사이 누님께선 약점을 찾아주십시오.”
“알았다.”
퉤!
메리가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며 오즈도크와 거리를 좁혔다.
이젠 오즈도크도 진과 메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처음엔 봉인에서 막 깨어나 오랜만에 맡는 금 냄새에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어느 정도는 지능이 회복된 것이다.
[거어어!]
사슬검이 다시 광휘에 물든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오즈도크는 이번에도 공격을 피하지 않고 간단하게 메리를 튕겨냈다.
메리는 몇 번이나 바닥에 처박히면서도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이 오즈도크를 향해 검을 뻗었는데, 고작 1분 남짓한 사이에 10회가 넘도록 튕겨 나가 땅바닥에 처박히는 걸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건 메리의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즈도크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에도 면역이 있는 것 같군.’
화염, 빙결, 바람, 대지, 전격. 모든 계열의 마법을 다 써보았으나 하나도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진이 추가적으로 한 가지 현상을 더 확인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물리적 타격과 마법 타격에 동시적으로 면역을 가질 수는 없군……!’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메리가 너무 밀리고 있으니 정확한 순간에 함께 공격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까.
돌파구를 발견한 셈.
‘이제 남은 것은…… 누님의 타이밍에 맞춰 마법 공격을 성공시키는 일인가?’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