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0화
110화. 새로운 브라다만테(2)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이게 쓸데없이 놀라게 만들고 있어.”
무라칸이 붙잡고 있던 피콘의 멱살을 놓았다. 피콘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이제 예전에 쓰던 화로가 없으니, 혼자서는 브라다만테를 만질 만한 불을 쓸 수가 없거든. 그래서 마검 비기의 힘이 필요한 거라고.]
“시끄럽고, 빨리 만들기나 해. 하여간 이건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이야. 오즈도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아?”
[내단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긴 하는군…….]
피콘이 탐욕에 젖은 눈으로 내단을 바라보았다.
그건 브라다만테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눈빛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피콘이 꼭 타락한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번에도 네놈 말 믿고 애들끼리만 보냈다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정도였다. 아오,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이걸 확.”
[흐흐흐. 다들 따라와. 바로 작업을 끝내러 가보자고!]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로 내려가는 피콘.
무라칸은 그 뒷모습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고, 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 시절엔 자존심 강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누가 찾아와도 맨날 꽥꽥 소리만 지르던 놈이거든, 저게. 차라리 그 시절이 덜 고약했던 것 같단 말이지. 신이 되더니 애가 좀 이상해졌어.”
“뭐, 그래도 피콘 님 덕에 테마르의 무덤을 찾기 시작하게 됐잖아. 장난기만 좀 있을 뿐, 좋은 분이지.”
“헹, 그 녀석의 무덤을 찾기 시작한 게 왜 저 민머리 덕이야. 솔더렛 덕이지.”
두 사람도 피콘을 따라 지하로 내려섰다. 지하엔 진이 지어준 비밀 대장간이 있었는데, 지상으로 도드라진 집보다도 훨씬 규모가 거대했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모루에 시선이 갔다. 모루 위에 브라다만테가 번쩍번쩍 광을 내뿜고 있었다.
애검, 혹은 동반자.
생도 시절 얻은 이후 브라다만테는 진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는 검이었다.
‘벌써 몇 달이나 녀석을 휘두르지 못했다. 기대되긴 하는군…….’
피콘이 내단을 브라다만테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다 쓸 필요 없다는 듯, 손칼로 3할 정도를 도려냈다. 꽤나 단단한 내단이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야야, 너 그거 챙길 생각 마라.”
[누가 도둑인 줄 아나. 그럴 생각 없거든? 그리고 나 아직 수호룡 없다고. 진, 이거 남은 건 어디에 쓸 거냐? 저놈 심장을 복구하는 일에 쓸 건가?]
마물의 내단은 용에게 엄청난 영약으로 작용한다. 특히 오즈도크쯤 되는 마물의 내단이라면, 파괴된 용의 심장을 되돌리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라칸은 코웃음을 쳤다.
“뭘 잘 모르니 저런 말을 하지. 민머리, 이 몸의 심장은 그깟 내단 따위로 어쩔 수가 없다. 고작 그 정도로 심장을 고칠 수 있었으면, 꼬마랑 진작부터 내단 마물을 찾아다녔겠지.”
[그럼?]
“나 말고 필요한 용이 하나 있어. 그놈 먹일 거다.”
뇌룡 칼토르, 율리안의 수호룡.
진은 남은 내단을 그를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쩝.
피콘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만일 진이 남은 내단을 자신에게 준다면 다른 무구를 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가 조금 있던 것이다.
물론 피콘은 단지 대장장이로서 ‘제작’이라는 행위 자체에 욕망이 있을 뿐, 그로 인한 개인적 이득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앞으로도 내단 마물의 소식이 들리는 대로 내단을 구할까 합니다. 그때마다 급하게 사용할 일이 없다면 지원해드릴 테니,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이 그 마음을 읽으며 말하자, 피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예. 내단이 대장술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동료들과 제 기사들을 위한 무구들을 제작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좋아, 좋아. 신이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 이제 작업을 시작하자고.]
피콘이 호다닥 진의 등 뒤로 숨으며 말했다.
[브라다만테에 업화를 펼쳐!]
“……여기서요?”
[무슨 문제라도?]
“업화의 기운에 지하실이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내가 도와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펼쳐봐. 최대한 브라다만테라는 한 점으로 수렴하게 말이야. 대신, 내 힘이 개입되는 게 느껴져도 밀어내면 안 돼.]
“알겠습니다.”
화르륵-!
힘을 끌어올리자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진의 두 눈동자가 화염으로 물들었고, 진의 온몸에 새겨진 룬 문자를 타고 마력과 오러가 흐르기 시작했다.
무라칸조차 움찔할 만큼 거대한 화염의 기운이 순식간에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진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대단한 화염을 브라다만테라는 작은 사물에 모조리 집중시킬 수는 없었다.
‘까딱하면 지하실뿐만이 아니라 근방 영지가 다 불에 탈 수도 있겠는데.’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든 찰나.
푸우우우-!
피콘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업화의 불길 한가운데에 또 다른 ‘불’을 토했다.
대장술엔 철과 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불 또한 대장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 따라서 대장장이의 신은 화염을 다루는 능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피콘의 불이 업화에 섞여 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진은 훨씬 더 수월하게 업화의 불길이 브라다만테로 수렴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으음, 아직 부족해!]
피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화염 사이로 청화가 도드라졌다. 가아악! 소환된 테스가 숨결을 더하자, 피콘이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거지!]
그렇게 한참 동안, 오러와 마력이 바닥날 때까지 화염을 쏟았다.
진은 이미 검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화염이 나선을 그리며 브라다만테로 향했다. 녹아내린 내단 때문에 브라다만테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수고했다. 이제 조금 쉬고 있으면 금방 완성해주마.]
지이익! 별안간 피콘의 앞에 차원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웬만한 장정보다도 거대한 한 자루의 망치였다.
그것을 힘껏 들어 올려 망치질을 시작하는 피콘.
깡, 콰앙-! 거대 망치가 브라다만테를 때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고.
진은 갑자기 온몸에서 쭈욱 힘이 빠지는 감각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 * *
1799년 9월 4일.
망치질이 시작되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일어났냐? 저건 또 하루 종일 걸렸어. 조금이라더니, 또 거짓말이야 하여간.”
무라칸은 구시렁대듯 말했으나, 끝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수고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작업을 끝낸 피콘의 얼굴이 무척 퀭했다.
문자 그대로 단 1초도 쉰 적 없이 그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댔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수척한 얼굴과 달리 성취감에 젖은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꼬마, 꽤 피곤했나 보다? 그렇게 갑자기 잠이 들고. 오즈도크 녀석과의 싸움이 생각보다 힘들었나?”
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업화를 펼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피곤하진 않았거든.”
“보약이라도 해먹어야겠군.”
갑자기 잠든 것에 의문이 생겼으나, 당장은 완성된 브라다만테를 만져보고 싶었다.
진에게 브라다만테를 내미는 피콘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후후, 바리사다 이후 최고의 검이다…….]
검을 쥐자 아직 가시지 않은 온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휘둘러보기도 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브라다만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고.
[어떠냐?]
“검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군요.”
[발동어는 갑옷 개방이다. 네놈이 뮬타의 룬을 갖고 있으니, 발동어와 외형 모두 그것과 짝을 맞췄지.]
갑옷 개방.
뮬타의 룬처럼, 속으로 발동어를 외자 즉시 갑옷이 형성되었다. 브라다만테로부터 흘러나온 영기가 온몸을 감싼 것이다.
후우웅……!
채 1초가 지나기 전에 전신에 갑옷이 형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날렵한 외형이었는데, 강철로 빚은 것이 아닌 만큼 광이 나는 대신 영기 특유의 일렁임이 도드라졌다.
브라다만테가 형성한 갑옷엔 이음새 같은 틈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절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고, 사각이 없는 완전무결한 검은 갑옷. 과연 대장장이의 신이 역작이라 부를 만한 위용이 느껴졌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휘날리는 망토가 인상적이었다.
[망토는 차후 네 녀석의 위엄을 생각해서 넣었어. 물론, 아무런 기능이 없는 건 아니고…… 마법을 막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망토는 탈착이 가능하니, 타인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주 유용할 것이야. 마음에 드냐?]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피콘 님.”
[흐흐, 네놈이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는 건 또 처음인 것 같군. 공격 쪽 성능까지 확인하면 아주 입이 찢어지겠어.]
그 말대로, 새로 영기를 주입하자마자 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르다……!’
이전까지 브라다만테에 영기를 주입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 전해졌다. 그저 영기를 주입하기만 했을 뿐임에도 마치 검을 개방했을 때처럼 강렬한 기운이 용솟음을 치는 것이다.
[본래 공격 쪽은 더 좋게 만들 수 없었지만 말이야, 네 불사조. 테스의 불꽃 덕에 나도 모르는 새에 새로운 힘이 깃들었어. 중압이라고 부르지, 아마?]
검게 물든 칼날 사이로 은은한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청화의 기운이었다. 그 힘은 중압의 힘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는데, 테스가 검을 벼리는 동안 화염계 본신의 힘 일부를 영구적으로 불어넣은 결과물이었다.
‘아, 그래서 잠든 것이군.’
오즈도크와의 싸움에 이어 업화를 펼친 것은 물론 진에게도 다소 무리가 가는 일이었으나.
진이 그토록 갑자기 잠든 것은, 테스가 진의 기운을 빌어 한계까지 이 세계에 간섭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계약자가 사용할 검에 중압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말이다.
테스는 진이 어떤 상황에서도, 말하자면. 마력이 바닥나서 자신을 소환할 수 없을 때에도 중압의 힘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테스가 화염계의 신으로서 어마어마한 권능을 지녔다 할지라도. 평범한 대장장이가 평범한 무구를 제작할 때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피콘쯤 되는 대장장이의 신이 브라다만테라는 신검을 만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아무런 제약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화염계로 이어지는 차원문이 열리지 않아……?’
감사를 전하기 위해 테스를 소환하려고 했으나, 술식을 맺어도 차원문이 열리지 않았다. 허공에 차원문을 열기 위한 푸른 불꽃만이 번질 뿐이었다.
대신, 검에 깃든 청화의 힘 때문일까.
진은 브라다만테를 타고 전해지는 테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당분간 본신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