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8화
138화. 백야의 탑지기(4)
아니 이게 왜 지금 떨어져, 진도 그런 마음으로 열쇠에 시선을 빼앗길 뻔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함선 설계도가 이미 누군가에게 도난 되었다면 룬칸델은 지금까지 헛고생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마 조슈아가? 아니, 시간이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 열쇠를 넘겨줄 때도 나름대로 결단을 내린 눈치였고.’
그렇다면 남은 건 킨젤로였다.
‘애초에 이곳 2마탑에 망령대 네 사람만 남아있던 이유도, 나머지 병력은 모두 탈취 당한 설계도를 추적하러 나섰기 때문이었나!’
당장은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헤도의 목적은 여전히 미궁이었다.
-혹시 이곳에서 챙긴 것이 있다면, 놓고 가게. 그리하면 자네를 일단 살려주도록 하겠네.
상식적으로 그건 적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텅, 텅, 데구르르, 화르륵-!
떨어진 열쇠가 업화의 열풍에 휩쓸려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헤도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헛숨을 내쉬었는데, 오해를 사기에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었다.
헤도도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른 인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도 산드라에게 받은 똑같은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진 룬칸델이 금고 열쇠를?’
헤도가 알기로 열쇠는 단 하나였다. 적어도 방금까지는 그랬다.
“12기수, 그 열쇠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방금 한 말은 유효하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다는 듯, 헤도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열쇠를 복사한 것이든, 사실 여분이 있던 걸 자신은 몰랐고 룬칸델들이 그걸 탈취한 것이든, 다른 무엇이든. 설계도를 되찾고 진을 살려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지금 탑 옥상에선 산드라 지플이 한껏 꽃단장을 한 채 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한가운데엔 둘만의 만찬을 위한 식탁까지(일행을 찾아오기 직전까지 헤도가 직접 준비했다) 차려진 상태로, 산드라는 기다림과 설렘을 견디기 위해 소타 사막의 비밀 건조장이 펑펑 터지는 풍경을 안주 삼아 식전주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그 심란한 모습이 떠오르자 이마의 핏대가 굵어졌다.
-산드라 아가씨.
-아, 왜!
-보고하셔야 합니다.
-무슨 보고?
-건조장에 진 룬칸델이 왔다고, 가주께 보고를 올리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가씨는 지금 근무를 서고 계시는 것이니까요.
-헤도, 그러면 내 남편은 죽어. 아니면 더는 진 씨가 아니게 되거나.
-아마도 그렇겠지요. 뭐, 그간 12기수가 보여준 생존력을 보면 또 모르는 일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니 그런 개소리는 두 번 다시 지껄이지 마.
그 대화를 생각해서라도 어지간하면 진을 살려서 보내는 게 낫다는 마음이었다.
산드라를 일단 달래기 위해 식탁을 차려두기는 했지만, 저녁 식사까지는 무리일 테니 말이다.
“설계도는 내게 없소.”
“방금 열쇠를 떨구지 않았나.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지 말게. 웬만해서는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
“눈물 나게 감사한 이야기군. 하지만 없는 걸 어쩌란 말이오? 그리고 잊은 모양인데.”
우린 아직 싸우고 있소, 탑지기.
진이 뒷말을 잇기 무섭게, 업화가 한층 더 맹렬해졌다. 헤도의 몸에 들러붙은 불들은 폭발을 일으켰고, 사방에 퍼진 불길이 모여들어 그를 덮치기 시작한 것이다.
옛 룬칸델 십대기사, 그중 최강이라 칭송되던 사라 룬칸델의 비기다.
비록 아직 미완이라곤 하나, 그 검을 가볍게 받아낼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헤도가 짧은 신음을 토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펼쳐진 업화는 그의 예상을 한참 상회하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애당초 이 검을 전개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피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군. 진 룬칸델의 말대로 지나치게 안일했나. 이건 조금 피곤해질 수도 있겠어…….’
업화의 열기가 보호막과 육체를 뚫고 내부 장기로 침투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만한 고통을 느끼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기운을 방출해 밀어내도 이 사나운 열기가 잠잠해지는 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문제는 업화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룬칸델들도 바로 이런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잘했다, 막내!”
가장 먼저 후속타를 이은 것은 디푸스였다.
그가 펼친 두 번째 유성우가 물러선 헤도의 등 뒤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성우의 파괴력은 분명 결전기 중 최고 수준에 속하나, 그것만으로는 저 거인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디푸스는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검을 한 가지 더 준비했다.
룬칸델 제5 비기
광속 찌르기
메리와 함께 몇 번이나 한계를 뛰어넘으며 연마한 검.
번쩍!
눈부신 섬광이 유성우보다 먼저 헤도의 등으로 쇄도했다. 메리보다 한 단계 앞선, 극의에 다다른 광속 찌르기였다.
헤도는 디푸스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나아간 광속 찌르기가 태산 같은 그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헤도는 앞으로 밀려나며 피를 토했고, 광속 찌르기조차 그 어마어마한 육체를 관통하지는 못했으나 그를 타고 전방으로 퍼진 충격파에 탑 전체가 흔들렸다.
그런 섬광이 여섯 줄기나 이어지고 있었다.
반드시 역류에 빠질 테지만 어차피 뒤는 없었다. 디푸스는 이번이 전세를 엎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인식했다.
공격을 끝낸 디푸스는 연거푸 검은 핏덩이를 내뱉었다.
크아아아악-!
헤도가 괴성을 내질렀다.
비명인지 포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성우와 더불어 광속 찌르기를 여섯 번이나 적중 당하고도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헤도는 그 와중에도 장검 베일을 휘둘러 진을 견제하고, 다음에 찾아들 다른 검을 의식하고 있었다.
‘괴물……!’
그다음엔 조슈아와 제인이었다.
여섯 번의 광속 찌르기가 헤도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제인은 유성우에 섞여 헤도에게 접근해 광속 찌르기가 낸 상처 위로 검을 내리꽂았다.
손가락 한 마디.
딱 그 정도라고는 하나 제인의 칼날은 분명 헤도의 상처를 파고들어갔다. 피가 튀었고, 살점이 베였다.
“놈!”
헤도가 눈동자를 부라리며 제인을 밀어내고 검기를 뿌렸다. 헤도는 다섯 차례쯤 얕게 찔린 것에 반해, 제인은 벽까지 튕겨나가 손목이 바스라지고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제인은 실망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핏덩이가 치솟았지만, 마침내 저 괴물에게 자신도 유효한 타격을 입히며 빈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주 작은 빈틈을.
조슈아의 검이 그 틈을 찌르고 있었다.
“카아아아!”
처절하고 독기로 가득한 악, 전심전력.
조슈아를 순수 무력만으로 기수 최고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루나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졌고, 형제들 사이에서는 그가 검술보다 계략과 로사의 전폭적인 지지로 차기 가주가 되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룬칸델의 두 번째 기수였다. 또한 룬칸델 최강의 기수에게 그 누구보다도 많이 도전하고 패배한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조슈아에게도 저력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패배와 멸시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을 검에 녹여내는 법을 익혔다.
바로 이것이 그 결과였다.
흑검 카이너가 검은 기운으로 물들었다.
영기와 비슷한 형상이나 그만큼 진하지는 않았고, 오러 특유의 광채를 띠고 있는 기운이었다.
그건 루나가 이룬 심검처럼 조슈아만의 독자적인 영역은 아니나, 룬칸델로서 오의를 얻으려면 반드시 닿아야 하는 특수한 색의 검기였다.
룬칸델 제4 비기
검은 십자성
조슈아의 검이 십자를 그었다.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십자를 타고 검게 빛나는 검기가 번졌다.
검기의 교차점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헤도의 어깨였다.
본래 얼굴 한가운데를 노렸으나 그가 반응한 탓에 틀어진 것이다. 그러나 검은 십자성은, 조금 빗나가도 위력을 크게 잃는 검이 아니었다.
검은 십자성은 이름처럼 두 줄로 이루어진 검기가 아니다.
비기가 시작되자마자 조슈아의 흑검기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퍼져 사방에서 헤도를 조준하고 있었다.
쓰아아악, 씨잇-!
마치 포위를 끝낸 저격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듯, 십자 형태의 수많은 흑검기가 교차점으로 모여들며 헤도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조슈아 혼자 검은 십자성을 펼쳤다면 달리 제대로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과연 앞서 헤도를 두들긴 룬칸델의 검들은 헛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가 괴로운 듯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작긴 하지만 포효가 아닌 신음을 토해냈고, 검은 십자성의 수많은 흑검기 중 적어도 1할 정도는 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헤도 정도의 무인이 아니라면 그 1할만으로도 온몸이 수백 조각으로 찢겨 육편이 되었을 터.
“허억, 헉!”
조슈아는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빌어먹을, 부족했나……!’
검은 십자성을 걷어내기 시작한 헤도는 매초가 지날수록 다시 기력을 찾아가는 모양새였다.
피칠갑이 되기는 했으나 치명상을 입지는 않은 것이다.
“흑룡께서 무라칸은 무라칸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래도 룬칸델은 룬칸델이로군요. 조금 놀랐습니다.”
퉤, 헤도가 핏물을 뱉어내고 얼굴을 닦아내며 말했다.
[진절머리가 나는 놈이군.]
무라칸은 소용돌이로 업화의 잔불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때쯤 망령대들은 기진맥진한 채 간신히 서 있기만 한 모습이었다. 업화와 결전기, 비기가 난무하는 내내 그들은 결국 보호막만 치다가 마력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야, 꼬마. 아무래도 저거 안 되겠다. 답이 없어. 다른 놈들 챙겨서 튀어, 내가 저거 상대하다가 어떻게든 뒤따라가마.]
“나쁘지 않은 계획인 듯 보이나 안타깝게도 도와드릴 수 없군요, 무라칸 님. 룬칸델이 훔쳐 간 걸 끝내 내놓지 않겠다면, 저도 말을 번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뭐?]
“본가 지원을 요청하겠다는 뜻입니다. 더는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군요. 슬슬 인내심에 한계도 다가오고 말입니다.”
[안 그럴 것 같이 생겨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군. 자세 안 나오게 굴 거냐?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네놈도 슬슬 전투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두들겨 맞았으니.]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상황이 더 좋아지지는 않는다는 걸 흑룡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헹, 그리고 우리가 설계도를 훔쳐 갔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리냐. 우린 아직 여기 금고 못 털었다, 어? 이게 막 함부로 뒤집어씌우네.]
무라칸과 다른 룬칸델들은 열쇠가 업화에 타버린 순간을 보지 못했고, 그때 진과 헤도가 나눈 대화도 듣지 못했다.
헤도는 무라칸 대신 진과 대화하기로 했다.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12기수. 계속 고집을 부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 그전에 한 가지는 똑똑히 알아두게, 나는 자네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배려를 해…….”
거기까지 말한 순간.
헤도가 돌연 홱 몸을 돌려 뒤쪽으로 장검 베일을 휘둘렀다. 누군가 자신의 감각을 뚫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암살 시도였다.
그리고 헤도를 상대로 암살 시도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으며…… 그중 한 사람은, 검의 정원에서 태어난 희대의 암살자.
요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