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3화
144화. 친구를 위해(1)
제국의 모든 이동 관문이 폐쇄되고 있었다.
제후국들의 군대가 제국으로 향하는 모습이 육로와 해로 곳곳에서 포착되기도 했다.
더 의심할 바 없이 명백히, 제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이란과의 전쟁을.
보오옹-!
티칸 앞마당에 새하얀 차원문이 형성되며 눈두꺼비 모트가 나타났다.
탈라리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파악하자마자 검황성을 찾은 것이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차원 이동을 한 탓에 모트는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탈라리스 님!”
진과 동료들이 다가오자 탈라리스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단단히 미쳤더구나. 정말로 검황성을 칠 분위기다.”
“론 경은 만나보셨습니까?”
“자리에 없다더구나. 그 밖에 자세한 사항은 나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검황성도 완전히 독이 올랐더군…… 전쟁은 피할 수 없다. 론을 따르는 무가들도 모두 검황성으로 집결하는 중이더구나.”
하이란과 제국 전체의 전쟁.
본래라면 탈라리스는 론이 있는 한 그 전쟁의 결과는 반드시 하이란의 승리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검황성에 다녀온 지금은,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론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이란을 돕기로 한 가문이 이상하리만치 적어. 황실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론이 인망을 잃은 건지는 모르겠군.”
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탈라리스 님.”
“왜?”
“탈라리스 님은 제게 검황성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반드시 알리라고 하셨죠. 혹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제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궁은 언제나 중립을 취해왔으나, 이제는 사실 진의 아군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하지만 하이란과의 관계는 확실치 않았다.
사실, 비궁은 하이란이 멸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나서지 않아야 했다. 괜히 제국을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그녀가 검황성을 돕겠다는 입장을 보인 다음이어야 했다.
탈라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진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잠깐 나가봐, 사위만 들어야 하거든.”
동료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위.”
“예.”
“지난번에, 비궁의 의무에 대해 말해준 것을 기억할 테지?”
-비궁은 대부분의 세월 동안 중립을 지켜왔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 또한 1대 비궁주께서 처음으로 신검 만빙과 모트의 선택을 받았을 때, 한 가지 서약을 맺었었다.
-우리 엔도르마 혈족이 얻은 만빙의 힘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갖기엔 지나친 힘을 얻은 대신, 세계의 이상 현상을 해결하는 일에 일조하라는 사명을 얻었지.
진이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비궁주들께선 하이란이 세상에 위협이 될 만한 한 가지 물건을 갖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얀 돌.
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건 오직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하이란 최고의 비밀이나, 비궁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우리 비궁은 하이란이 가진 그 물건이 마녀 헬루람의 물건이리라 추정하고 있지.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듯이, 헬루람이 몰고 오는 재앙을 막는 건 비궁의 대표적인 의무 중 하나다.”
“그렇다면 탈라리스 님은 이번 일에서 비궁주로서 하이란이 품고 있는 위험을 막는 게 가장 큰 목적이시겠군요.”
“그렇다.”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탈라리스.
비궁의 의무를 지키겠다는 그녀의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탈라리스 님께서 하얀 돌을 처리하는 일이 하이란보다 우선이라는 이야기는 지극히 타당하지만, 그 이야기는 달리 생각하면…… 하얀 돌이 위험성을 드러내는 순간, 탈라리스 님은 오히려 하이란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얀 돌이 어떤 상태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또한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하이란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친구인 단테는 믿지만, 하이란의 수장은 단테가 아니라 론이었다.
만일 이번 전쟁에서 하이란이 최악의 상황에 처할 경우.
사랑하는 손자를 지킬 수만 있다면, 론은 하얀 돌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황실이 단지 그게 전부인 물건을 그렇게까지 탐낼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오.
-대충 알겠어. 그 돌은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될 만큼 위험한 물건일 거다. 그래서 처음 그 물건을 습득한 하이란의 가주는 그것을 베어 없애려 했고, 실패했을 테지. 이후 후대 가주들이 욕심을 품지 않도록 물건의 정체를 알리지 않은 채 파괴하라는 명령만 남긴 거고.
-내 짧은 설명만 듣고 그걸 다 유추했단 말이오? 충격적이군.
-지금껏 하이란의 역대 모든 가주들은 물론이고, 론 경조차 그 돌을 베지 못했다는 사실이 훨씬 충격적이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돌이야?
단테와 하얀 돌에 대해 나눈 대화.
그 대화에서 이미 하얀 돌은 위험성이 드러났다.
황제가 하이란을 포기하면서까지 돌을 얻으려고 행동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돌이 세상을 위협하는 일이 벌어지고, 탈라리스 님이 하이란을 저지하는 쪽에 선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진은 탈라리스에게 론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기가 망설여졌다.
진이 한동안 말없이 있자 탈라리스는 그 속을 다 알겠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위.”
“예.”
“네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구나. 넌 은근히 생각을 읽기가 쉽다는 말이지.”
“예, 걱정됩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친구로서 단테를 도울 겁니다.”
“그 과정에 나와 부딪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예.”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놓였다.
“……론, 그 멍청이라면 손자를 구하기 위해 헬루람의 물건을 사용할 수도 있지. 그에게는 손자보다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진. 단테 하이란이 네게 친구이듯이, 론 하이란은 나의 벗이다.”
시론과 론, 그리고 탈라리스.
그 세 사람에게, 친구나 벗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절대자들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더 높은 곳에 서게 될수록, 더 강한 힘을 얻을수록, 더 깊은 영역에 들어설수록.
사람은 고독해진다. 그들은 가장 깊은 고독에 빠지는 대가로 절대적인 힘을 얻었다.
오직 그 땅에 들어선 사람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별과 별이 너무 가까이 닿으면 충돌해 사라지듯이, 그들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셋 중 누군가 한 사람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애틋한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시론은 더 높고 외로운 영역에 올라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잃어 갔고, 그때부터 세 사람은 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여전히 벗이라는 마음은 있다.
그렇기에 탈라리스는 부디 자신이 의무를 행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고, 가능하다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만들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조금 더 솔직하게,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 우린 지금 최악의 상황을 얘기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가정이지 않느냐. 우리에겐 힘이 있다. 최악을 배제할 수 있는 힘이.”
진심이 느껴졌다.
또한 현실적으로, 최대한 빨리 하이란을 돕기 위해서는 탈라리스의 능력이 필요했다.
모든 이동 관문이 폐쇄되었다는 건 곧 육로와 해로도 봉쇄되었다는 의미다.
진은 제국군과 전투를 치르며 육로와 해로를 통해 검황성에 접근할 각오가 되어 있고, 어렵지 않게 뚫어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는 건 너무 늦다.
그때까지 하이란이 버티지 못하면 친구를 돕기는커녕 제국을 적대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신속하게 가서 함께 싸우는 것 역시 제국과 척을 지는 일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진은 룬칸델의 기수다.
이번 지원은 기수로서 가주 대행, 로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어쩌면, 너와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하이란과 함께하는 무가의 깃발이 내 생각보다 적었다고는 하나, 론이라면…….”
“론 경은…… 검황성 테러 당시 입은 내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탈라리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라고?”
“킨젤로 단장과 싸워 내상을 입은 후, 론 경의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자세한 상황은 모르나, 어쩌면 그때보다도 심각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건 저와 탈라리스 님, 그리고 론 경의 측근 다섯 사람이 전부입니다.”
“하, 검황성 테러 이후 론이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은 나도 인지하던 바인데…… 설마 그 이유 때문이었다는 말이냐?”
“황제가 숙청을 감행하는 것도, 하이란과 함께하는 무가가 적은 것도 모두 그 이유일 겁니다. 아마 제국 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론 경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론은 보기와 달리 술수에 능하니 어쩌면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아픈 척을 하며 이참에 하이란의 적들을 뿌리 뽑고, 어쩌면 황제까지 처리하려는 의도일 수도…… 젠장, 그렇게 생각하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군. 론이 억지로 싸움을 만들면서까지 권력을 탐하는 부류도 아니고.”
후우, 탈라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론의 상태를 들으니 그녀로서는 더욱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건재하다는 가정하에서도 하얀 돌의 위험성을 걱정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론이 나를 만나주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는군. 벗이라곤 하나 근본적으로 나는 하이란의 외인이니, 상태를 알려줄 수 없었을 테지.”
그보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거동조차 못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탈라리스 님.”
“말하라.”
“저와 동료들이 모트를 타고 검황성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 하지만 지금 바로는 불가하다. 방금 너무 먼 거리를 다녀온 탓에, 모트가 지쳤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도 조금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동료와 부하를 모두 소집해야 하고, 전력이 모두 빠진 동안 티칸을 보호할 수단도 만들어야 합니다.”
진은 하이란에 자신의 총력을 다 쏟을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