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4화
144화. 친구를 위해(2)
* * *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제국 전역에 감도는 짙은 전운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의 검이 겨누고 있는 것은 외세가 아니라, 바로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던 하이란이라는 사실도 모두가 알았다.
“짐은! 오랜 시간 제국제일의 검가가 황실과 백성을 위해 싸워온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황궁 앞 광장.
제국의 황제, 아미르 비먼트가 거대한 황금 가마에 서서 군중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가마는 약 이백 명의 대역 죄인들이 붉은색 수의를 입은 채 받쳤다.
군중들은 난데없는 황제의 발표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감히 표하지 못했다.
황제는 숙청의 명분을 반역과 내란이라 말했다.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검황성주가 구체적으로 무슨 반역을 저질렀는지. 또한 싫을 것이다, 짐은 그대들이 나보다 론 하이란을 더 좋아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황제가 천천히 백성들을 내려다보았다.
“하나 짐 역시 제국의 지존으로서 가장 충실했던 신하, 론 하이란을 신임하였다.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니, 원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구나. 그러나 검황성주 론 하이란은 짐의 명령은 물론이고, 간곡한 부탁마저 무시하며 제국을 테러와 전쟁, 멸망의 위협에 빠뜨렸다.”
황제가 손짓하자 가마의 좌우에 꽂힌 깃대에서 찢어지고 검게 탄 두 개의 기旗가 펼쳐졌다. 제국과 하이란의 깃발이었다.
“모두 검황성에 변고가 벌어진 날을 기억할 것이다. 이 깃발들은 그날 망가진 것으로, 짐은 지금부터 온 백성에게 그날 벌어진 테러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리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란이 가진 하나의 물건 때문이다.”
처음으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그러자 황제가 옆으로 눈짓을 주었고, 하이란의 갑옷을 입은 무인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론 하이란의 둘째 아들이자, 하이란의 기수였던 ‘티온 하이란’이었다.
검황성 테러 이후 하이란 내부에서는 배신자들이 속출했었다. 모두 단테에게 밀려 론 하이란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론의 위엄에 짓눌려 배신을 상상하지 못했으나, 검황성이 유례없는 타격을 입은 데다 황실이 뒷배까지 자처하니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다.
티온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그리고 주도적으로 하이란을 배신한 자였다.
“……나의 가문에는 가주로부터 가주에게만 전승되는 하얀 돌이 존재하오.”
본래 티온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나, 황제가 이 자리를 위해 알려주었다. 그간 가주 전승으로 세상에 위협하는 비밀을 지켜온 하이란과 달리, 황제는 하얀 돌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티온을 보는 군중들의 눈초리가 경멸로 물들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곧 단테에게 넘어갈 하이란의 권력을 탐해 가문을 배신하고, 이 자리에 섰다는 걸 모를 수는 없었다.
“믿기 어려울 테지만, 그 하얀 돌은 제련하여 사용할 수만 있다면 제국의 모든 마법 장비를 지탱하고도 남으며 단숨에 제국을 몇 배는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소.”
군중들의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허황되고 분노가 치솟는 이야기였다.
우우우우-!
결국 군중들이 티온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앞서 황제가 말했듯, 하이란은 황실보다도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가문이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당장이라도 그를 돌로 쳐 죽이고 싶었다.
“폐하.”
황실친위대장, ‘알톤 하이란’이 황제와 눈을 맞췄다. 명령만 내리면 즉시 소요를 진압하겠다는 의미.
그러나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가만히 내버려두라 명했다.
“그래봤자 겨우 싫은 소리를 조금 내는 것이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화풀이를 하게 그냥 두어라.”
“예, 폐하.”
황제는 하이란을 숙청하는 일에 여론이 두렵거나, 민중들이 하이란을 편들며 봉기를 할까 봐 걱정되어 연설을 하는 게 아니었다.
첫째는 하이란의 비밀을 까발려 압박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그저 그만의 방식으로,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목소리도 내고, 싫은 기색도 드러내며 화를 해소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저들은 짐을 막을 힘이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짐보다 하이란을 좋아하면서도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나서지는 않지. 짐은 백성들의 그런 우매하고 짜증 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구나.”
황제는 진심으로 백성들이 어여쁘다는 듯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하여, 폐하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우리 가문에 그 하얀 돌을 황실로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반환이라는 표현은, 애초에 그 돌은 선대 황제께서 하이란에 맡기신 물건이기 때문이오.”
물론 황실은 하이란에게 하얀 돌을 맡긴 적이 없었다. 어차피 대중들은 진실을 알 수 없기에 하는 이야기일 뿐.
“개소리!”
야유는 점점 격앙되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검황성주, 론 하이란은 폐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소. 돌을 노리는 적들이 검황성, 제국의 땅에 테러를 저지르기까지 했는데 말이오.”
“꺼져라! 더러운 배신자 새끼!”
“생체 골렘과 알 수 없는 거대 마물들이 제국을 위협했소. 돌 때문에! 그런데도 하이란은 욕심을 버리지 않고 황실에 돌을 반환하지 않고 있지. 검황성주가 그 힘을 이용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걸, 나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짝!
황제가 손뼉을 치자 성난 군중들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티온 하이란의 증언이 석연찮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테니 받아들이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의 백성들은 들으라. 짐은 지금이라도 하이란이 돌을 반환한다면 그들의 내란 조장과 반역을 용서할 마음이 있다.”
연설이 여기까지 오니, 군중들의 마음속엔 분노와 더불어 궁금증도 함께 형성되고 있었다.
그 하얀 돌이라는 건 대체 뭐지? 정말 존재하는 물건인가? 있다면, 왜 하이란은 황실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지?
그런 의문을 갖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제국의 황제, 아미르 비먼트. 짐은 선포한다. 하이란이 돌을 반환하는 즉시 숙청을 멈추겠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검황성은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 * *
황제가 연설에서 말한 내용은 순식간에 검황성으로 전해졌다.
“황제, 이 개자식이……! 어찌 하이란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하얀 돌? 웃기지도 않는군! 명분이 없으니 그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 그러고도 제국의 지존이란 말인가!”
“그 미친놈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황제랍시고 떠받들어주니 하이란이 정말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던 것인 줄 아는 모양이군.”
“옥좌는 놈의 피로 물들 것이오. 그 자리에 앉아 마땅한 것은, 비먼트가가 아니라 애초부터 하이란이었소. 하이란이 아니었다면 제국은 존재할 수도 없었단 말이오!”
회의실에 모인 무인들은 저마다 분노에 차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대부분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쳐들어가 싸울 것만 같은 기세였으나.
무인들의 마음속엔 분명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이미 황제가 연설을 하기 전부터 시작된 불안이었다.
“이렇게 모여만 있을 게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칩시다! 검황의 위엄이 무엇인지,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애송이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놈이 반역이라며 누명을 씌우고 있는데, 차라리 진짜 반역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하오. 배신자 몇 놈이 넘어갔고, 황제가 병력을 일으켰다고 하나. 론 경이 있는 한 놈들은 결국 우리 검 앞에 엎드려 빌게 될 것이오!”
그들은 모두, 상석에 앉은 한 사람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하이란의 소가주, 단테 하이란이었다.
단테는 간신히 지친 기색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와 메마른 입술은 감출 수 없었다.
“어서 론 경을……!”
“론 경께서는……!”
무인들의 불안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 어떤 행동도 없이 단지 위엄만으로 무인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 모은 장본인, 론 하이란 때문이었다.
무인들이 모이고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론은 아직 단 한 번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것이다.
‘조부님…….’
이제는 단테도 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론의 병세가 감출 수 없을 만큼 급격히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론은 현재 의식이 없다.
단테는 그를 대신해 검황성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모여든 무인들도 의심을 하고 있었다. 검황이 정말로 건재한 것인지를.
그 의심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론의 부재는 곧 하이란 전체의 부재와 같았다. 론을 제외하면 하이란에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빠진 상태로 전쟁을 치르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압박감과 무력감에 구토감이 치솟았다.
며칠째 잠을 못 자 현기증이 났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몸 곳곳에서 경련이 일었다.
‘나약한 몸뚱어리는 이럴 때조차 나를 힘들게 하는군…….’
단테가 이를 악물며 무인들과 눈을 맞췄다.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조부께서는 현재, 병환이 깊어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단테의 말에 무인들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미 눈치를 채고 있던 이들은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으나, 몰랐던 이들은 청천벽력에 맞은 기분이었다.
“론 경이…… 의식이 없다, 이 말이오? 설마, 그날 얻은 부상이 깊어진 것인가?”
“어, 어째서 그걸 지금 알려주는 것이오?”
“론 경이 없다면 전쟁은……!”
단테가 대답하려는 찰나, 한 노기사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론 경이 없다면, 그대들은 하이란과 함께 싸우지 않을 것인가? 부끄러운 소리들을 하고 있군. 론 경을 빼면 나머지는 기사가 아니라 쭉정이인가? 우리는 황제의 횡행에 맞서 싸우고자, 하이란과의 우정을 지키고자 온 것이지, 론 경을 필두로 제국을 뒤엎으러 온 게 아니오.”
그의 이름은 슈라스 헬터, 헬터가의 가주였다.
슈라스의 말에 불편한 대답을 피했으나, 론이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않는 한 단테는 그들의 불안감을 지워줄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단단히 결속하더라도 감당키 어려운 적들이 다가오고 있건만, 상당수의 무인들은 론의 부재가 만드는 균열에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론 경이 없다면 전쟁은 필패다.’
‘황제와의 싸움에서 지면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라, 혈육과 권속 모두가 처참히 살해당할 것이야…….’
또한 론이 병환 중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그들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황제가 말한 하얀 돌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황제의 연설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돌을 돌려주고 사태를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다. 그 허황된 이야기가 진짜이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가……!’
정적이 흘렀다.
이내 누군가 황제의 연설이 사실이냐는 질문을 꺼내려는 찰나,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지휘관들이 뛰어오는 소리였다.
“소가주! 황제의 병력 이동이 확인되었습니다. 선봉군은 세 시간 내로 검황성에 도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