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1화
147화. 흑해의 왕, 글리엑(5)
마신석의 힘을 이용해 론을 다시 싸우게 만든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고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던지라, 스탐은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적이었던 자를, 그것도 지플의 수장을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고 판단을 내리는 건 차분히 사고할 수 있을 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검을 움켜쥔 진의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두려움이나 역류 반응 때문에 떨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느라 떨리는 것이다.
마신석이 어떤 물건인가.
글리엑이 깨어나기 전까지, 하이란과 바멀 연합은 그것으로부터 목숨 걸고 검황성을 지켰으며 그 중심에는 론과 진이 있었다.
그리고 진은 이제 그 물건으로 론을 살려서 다시 싸우게 만들 것이라 말했다.
그 누구보다도 하기 싫었을 결정을, 대체 어떤 심정으로 택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12기수에게 큰 실수를 범했군.’
부끄러웠다. 또한 스탐은 그간 시론이 진에게 왜 그리 관심을 두었는지를 다시 한번 알아볼 수 있었다.
쩌엉-!
스탐과 흑기사들이 진에게 내리꽂히는 검과 창들을 쳐냈다.
“방금 저지른 결례에 대해선 추후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하겠소, 12기수.”
진은 론을 업은 채 떨어지는 수백 개의 검과 창 사이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면 안 됩니다, 론 경!’
등에서부터 들려오는 론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전장의 어떤 굉음보다도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저 안에 나의 손자가 있다.
희미한 이정표와도 같은 그 말이 진의 심장을 두들기고 있었다.
단테의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과 론이 당하기 직전에 놈의 검이 머뭇거린 것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테의 의식 일부만이 남아 있는 상태라면.
글리엑을 죽인 후, 그다음은? 놈이 끝장나면 남아 있는 단테의 의식 또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가?
단테는 돌아올 수 있는 건가?
그런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테스의 불꽃이 사라졌고, 론은 전투 불능에 빠졌으며 흑해화가 진행되고 있다.
글리엑의 공격이 점점 더 사납게 일행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전히 글리엑의 신경이 진 쪽과 후방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탈라리스와 바멀 연합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글리엑의 공격을 거의 당하지 않았다.
서서히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켈리악의 화염이 혼돈을 뚫고 글리엑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혼돈을 밀어내며 진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밖에서는 내부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테스의 청화마저 사라졌으니 속이 타서 미칠 노릇이었다.
글리엑의 어그러진 사지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놈의 검과 창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스탐과 흑기사들의 방어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퍼억-!
진의 등 뒤에서 혼돈의 기운이 폭발을 일으켰다. 다급히 보법을 밟기는 했으나, 등에 업힌 론이 받는 충격까지 완전히 피하는 건 무리였다.
론이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라시드가 쩔그럭대며 바닥을 굴렀다.
검을 찾으러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켈리악의 열기 쪽으로 내달리려는 찰나.
“이젠 검도 놓칠 정도가 된 거냐, 이 미련한 인간아.”
돌연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한기가 진과 론을 감쌌다.
비궁주 탈라리스 엔도르마, 그녀가 마침내 회복을 끝내고 다시 전장에 합류한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물기가 묻어났다.
[만빙의…… 선택을 받은 인간도 있었군.]
글리엑이 탈라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로나 지플을 봉인하던 힘을 일부 끌어온 그녀는 이전과 전혀 다른 수준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이미 오의 백을 펼치며 내상을 입었고, 이 상황에 엘로나 지플이 깨어나는 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공격이 멈추었다. 글리엑이 탈라리스를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탐과 흑기사들은 숨을 골랐고, 탈라리스는 라시드를 주워 진과 론에게 다가왔다.
그녀 역시 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가 그리 예뻐하는 손자도 아직 저놈과 외롭게 싸우고 있다. 론, 네놈도 아직 멈출 때가 아니야…….”
탈라리스는 단테가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글리엑을 억제하던 봉인이 완전히 깨졌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내성 근처에 있던 이들은 모두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끈질기구나.]
글리엑은 그 표현을 론에게만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자신의 완전한 부상浮上을 저지하고 있는 단테에게도 한 말이었다.
치이이잉…….
만빙이 공명음을 일으키며 사방에 한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그 기운에 땅이 얼어붙으며 흑해화가 눈에 띄게 더뎌졌으나, 글리엑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진은 솔더렛이 아니라 그림자의 가호 아래 놓인 계약자라는 사실을.
그렇다고 놈의 살의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글리엑은 이제부터 더 신중하고 여유롭게 전투를 치를 것이다.
상대가 솔더렛이 아니라 계약자라면, 두려워하며 조급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글리엑은 이성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솔더렛이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을 두려워했었다.
글리엑이 입을 날카롭게 찢으며 웃음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마치 장난을 치듯이, 진의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검과 창을 내질렀다.
놈의 공격은 바멀 연합을 덮치기 전에 탈라리스가 형성한 거대한 얼음벽에 가로막혔고, 글리엑은 그조차 재밌다는 듯 그 위를 계속 내리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하하하……!]
글리엑이 웃을 때마다 전장을 가득 채운 혼돈의 기운이 사납게 들썩였다.
탈라리스는 놈의 여유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힘.
비궁에는 창성의 영역에 닿은 존재가 아니고서는, 결코 혼돈의 왕을 벨 수 없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깊고 거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흑해의 왕들에게 근본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창성의 검과 마법뿐이라고.
그간 하이란의 가주들이 하얀 돌을 베지 못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하이란에서는 단 한 번도 창성기사가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조류에 휩쓸리듯, 역사의 어느 시점에 하얀 돌에 대한 정보가 사라져버리지 않았다면. 하이란은 룬칸델과 지플의 창성에 다다른 인간들에게 하얀 돌을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으며 글리엑이 오늘 이 땅에 깨어난 것은 이미 정해진 일.
운명이었다.
“진.”
“예, 탈라리스 님.”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네 아비가 올 때까지 저것을 저지하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아는 기록이 잘못되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
탈라리스가 뒷말을 삼키며 축 늘어진 론의 오른손에 라시드를 쥐여주었다.
감각을 모두 잃은 와중에도 론은 다시 손에 닿은 칼자루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글리엑에게 단테의 의식이 남아 있는 것에 아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가 운명에 반하는 힘을 갖고 있을 리 없으니, 소멸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번다, 시론이 올 때까지.
시론을 제외한 최강의 인간들이 한자리에 있고, 룬칸델과 지플의 최정예들이 거의 모였건만.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것이라는 사실이 참담할 뿐이었다.
만빙의 기운이 흑해화를 저지하고 있다지만 멈춘 것은 아니다. 땅이 검게 변할수록 놈의 몸집도 점점 더 커졌다.
텅 비어 있던 눈구멍에선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한 자줏빛이 돌았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귀가 터질 것 같은 이명과 더불어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키아아아악!
글리엑이 완전해질수록 마신석도 더욱 격렬하게 공포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켈리악 지플이 혼돈의 벽을 뚫고 내부로 들어섰다. 후방이 열리며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추락하듯 급격히 하강하고 있는 코젝의 선두였다.
쿠웅, 크그그극……!
코젝이 검게 변한 땅을 긁으며 착지했다. 선두에 마법진을 펼치고 서 있던 켈리악은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진을 찾기 위해서였다. 곧 진이 생존한 사실을 깨닫자마자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살아 있다!’
태양과도 같은 화염구가 켈리악의 등 뒤로 떠오르고 있었다.
[네놈이 저 흉측한 모조품의 주인인가.]
“켈리악!”
탈라리스가 소리쳤다.
켈리악 또한 탈라리스와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론이 이미 전사했거나 전투가 불가한 상태에 빠졌다면 마신석의 힘으로 재생시켜서 다시 싸우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켈리악의 화염구에는 마신석의 기운이 섞였을 때 특유의 검은 기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마신석은 여전히 켈리악에게 힘을 제대로 내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힘은 켈리악의 지팡이, 흐로티에 숨어 있듯 맺혀 있었다.
흐로티 속에 맺힌 마신석의 힘이 방출되지 않았다.
진과 탈라리스, 흑기사들은 그 모습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당황하고 있는 것은 켈리악 본인이었다. 마신석이 움츠러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래서는…… 불가하다!’
마신석은 미완이다. 그 속에 갇힌 신들의 힘은 아직 완벽하게 켈리악의 통제에 놓여 있지 않았다.
낭패.
켈리악과 탈라리스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론이 다시 싸우지 못하면, 룬칸델이 오더라도 저걸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서른이 넘는 신의 의지조차 흑해의 왕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이냐!’
그런데 그 순간.
돌연 론이 진의 등에서 내려서서 성큼성큼 켈리악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얼거림은 멎은 채였다.
죽은 것이다.
론은, 목숨이 끊긴 채로 걷고 있었다. 일순 시간이 멈춘 듯, 사람들은 모두 굳어버린 채 론이 켈리악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라시드는 론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론이 켈리악에게 가까워질수록 마신석의 공포에 질린 비명이 잦아들고 있었다.
‘마신석이…… 내가 아니라 죽은 론에게 반응하고 있다……!’
론이 검을 땅에 꽂으며 흐로티의 검은 기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도를 하는 것처럼.
그러자 마신석은 침묵에 잠겼고, 켈리악은 느낄 수 있었다.
겁에 질려 있던 신들이 그에게 힘을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