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576화 (575/1,001)

제 576화

149화. 하이란의 빛, 혹은(1)

1800년 5월 10일.

전쟁이 끝나고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검황성전과 글리엑 토벌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이들도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황제가 제국의 기둥을 역적으로 몰아붙였었다는 사실과 하얀 돌의 정체, 그 모든 일의 결과를 아직도 각 세력의 소식지들이 쉴 새 없이 기사로 내보내는 중이었다.

론 하이란은 결국 혼돈의 마지막 폭발을 홀로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글리엑과 전투를 치를 때 이미 그의 수호벽을 뚫고 빠져나간 혼돈과 자폭의 여파까지 온전히 처리하는 일은, 창성에 오른 그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장에 있던 이들 모두가 우려했듯.

수호벽을 벗어난 혼돈은 세상 곳곳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미친, 끝이 없네. 이게 정말, 그 혼돈의 왕인지 뭔지 하는 괴물의 잔재에 불과하단 말이야?”

데이토나와 헤이토나.

두 사람은 현재 델키 왕국 인근에 떨어진 ‘혼돈의 잔재’를 진압하러 임무를 나온 상태였다.

형제와 그들이 이끌고 온 수호기사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철야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혼돈의 잔재라고 명명된 괴물들은, 글리엑의 혼돈이 투하된 전 세계의 땅에서 생성되고 있었다.

델키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오염 지역’은 약 오십여 곳에 달했는데,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오염 지역이 몇 군데나 될지는 알 수 없다.

만일 론이 글리엑의 자폭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가 수호가 아닌 다른 특성의 창성을 이뤘다면.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막내는, 그 전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 어떤 괴물과 싸운 거지?”

“우리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을 만큼 끔찍한 놈이었겠지. 그 잔재에 불과한 괴물이 이 정도니까.”

헤이토나가 괴물의 몸통을 조각내며 답했다.

오염 지역의 괴물들은 세간에 알려진 어떤 마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몸을 찢으면 찢어진 숫자대로 증식했는데, 거의 콩알만 한 살점이 될 때까지 분해해야 멈추었다.

개중엔 증식이 아니라 초재생 능력을 갖춘 개체도 있었다. 놈들은 특별히 강한 축에 속했는데, 이런 식으로 오염 지역의 괴물들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강한 개체는 흑기사급의 무력이 있어야 토벌이 가능한 수준으로 알려졌고 말이다.

놈들은 일반적인 마물과 습성 또한 전혀 달랐다. 놈들은 전투가 아니라 기생에 특화되었으며,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숙주로 삼았다.

그리고 숙주가 된 생명체는 전염성을 띠었으며, 그런 개체에게 공격당한 인간은 혼돈에 잠식되어 폭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간 전체가 전염에 취약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단련된 무인이나 마법사들은 상당한 수준의 면역을 보였는데, 그조차 없었다면 어땠을지 토나 형제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마법학회는 그것을 ‘전염성 혼돈’이라 명명했다.

이를테면 세계는, 대재앙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간 헬루람이 벌여왔다고 알려진 가장 거대한 재앙들에 비견되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토나 형제뿐만이 아니라 지플을 비롯한 각 세력의 일원들 모두가 전 세계에서 혼돈을 진압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끔찍한데, 우리 가문에선 디푸스 형님이, 지플에선 화룡 카둔이 발 빠르게 초기 진압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더욱 난리가 났을 것이란 말이지. 젠장, 소름 돋는다. 그런데도 가문이 이렇게까지 큰 타격을 받은 건 오백 년 전 성국수호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니.”

“우리 가문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처음이고, 지플도 그만한 피해를 입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인 건가…….”

룬칸델과 지플.

제국을 제외하면,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단연 그 두 가문이었다.

룬칸델은 흑기사 다섯을 포함해 약 삼백에 가까운 최정예 기사들이 전사했고 로사가 중상을 입었다.

지플도 켈리악이 중상에 빠졌고 코젝을 포함한 제1, 2함대 전체를 잃었으며 서른 이상의 용, 오백 이상의 마법사를 잃었다.

특히 마지막 폭발의 여파가 문제였다.

글리엑의 자폭은 무려 사흘 동안 이어졌다. 각 세력의 병력은 역사상 유례없는 폭발이 시작되고 이틀이 지난 후에야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현재 남은 두 세력의 전력은 불과 한 달 전의 한 가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로사와 켈리악이 당한 부상은 일반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했다. 그들을 중상에 빠뜨린 게 혼돈의 힘이기 때문이었다.

“10기수, 11기수. 방금 본가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한 수호기사가 토나 형제에게 다가왔다.

“보고해.”

수호기사의 보고를 들은 토나 형제의 눈동자가 커졌다.

“……결국 그렇게 결정된 건가.”

“날짜를 맞추려면 더 서둘러야겠군.”

몸에 묻은 괴물들의 살점을 털어낼 여유도 없이, 형제는 다시 오염 지역의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자신들에게 생기기 시작한, 묘한 힘을 느끼면서 말이다.

* * *

“지플과의 휴전이 결정되었다.”

로사의 목소리에 디푸스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로사의 팔목에 검은 반점이 보였다. 디푸스의 시선이 닿자 로사는 자연스럽게 팔목을 가렸다.

“킨젤로 때문이로군요.”

“그래. 놈들은 이번 전쟁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지. 그리고 아마 처음부터 우리와 지플의 세력이 약화되길 기대하며 이 전쟁을 방관했을 거고, 결과는 그들이 원한 대로다.”

기침을 억누르는 로사는, 전쟁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 무시무시한 폭발에 가문의 기사들과 지플의 마법사들이 쓸려나가던 모습과…… 지플의 마신석이 부서지던 순간을.

‘마신석이 파괴되었으니 지플도 단기간 내에 전력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시론이 만약 가문에 있었다면, 지금이 바로 천 년의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 흑해로 보낸 흑기사들은 결국 시론과 연락이 닿지 못한 채 가문으로 복귀했다.

때문에 반대로 지플 역시 지금이야말로 룬칸델을 칠 최고의 적기였으나, 킨젤로라는 공공의 적을 앞에 두고 모험을 벌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지플은 마신석을 복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급했다. 전력 회복을 위해서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머니. 아시겠지만, 최근 저를 비롯한 순혈들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디푸스가 말하는 이상한 일은, 바로 토나 형제가 느낀 힘에 관한 것이었다.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마력.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진을 제외한 룬칸델의 순혈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로사는 그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나, 자식들이 갖게 된 마력이 아직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마신석이 부서지고 지플이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결과.

이야기의 힘, 역사를 조작하는 지플의 마법이 약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룬칸델을 억누르고 있던 천 년 전의 맹약과 저주 또한 불안정해진 것이다.

켈리악이 이토록 급히 휴전을 제의한 건 그 이유였다. 로사로서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응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함구하고 경계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디푸스가 흠칫하며 로사와 눈을 맞췄다.

“뭘 그리 놀라느냐? 본래 우리 가문이 마검의 힘을 갖고 있던 것은 이미 막내가 일원 모두에게 알린 사실이다. 지금의 현상은 지플의 세력이 약해지며, 그들이 가문에 건 저주가 옅어진 결과일 터.”

“놈들이 전력을 회복하면 다시 원점이겠군요.”

“마력을 다룰 수 있다 하여 모두가 막내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플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그 힘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무를 테지.”

로사는 미약한 마력을 당장 활용할 방법을 찾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다.

지플을 끝장내고, 가문의 저주가 정말로 끝나야지만 다시 마검가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혼돈이 충분히 진압될 때까지는 기수들이 개인 수련 따위를 할 시간도 없을 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염 지역 정리에 임하도록.”

디푸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12기수는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이냐?”

“예.”

글리엑의 자폭이 사흘 동안 이어질 때, 진과 단테는 그 혼돈의 폭풍 속에서도 아무런 추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론의 의지가 집중적으로 두 사람을 수호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검황성이 있던 땅은, 혼돈의 파편이 튄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다.

지난 한 달 동안 각 세력의 혼돈 진압 임무를 맡은 이들도 아직 검황성의 정화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진을 친 채 영지 내부에서 아직도 일렁이는 혼돈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묶어두고 있을 뿐이었다.

로사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한 수호기사가 다급히 그들이 있는 집무실을 찾았다.

“가주 대행! 두 시간 전에, 12기수가 검황성 영지 내부로 진입했다는 보고입니다……!”

“뭐라고!?”

디푸스가 소리쳤다.

로사나 켈리악과 마찬가지로, 진 또한 아직 혼돈의 잠식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혼돈에 잠식된 이들은 더 큰 혼돈에 반응하며 마성화를 진행시킨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으니, 검황성의 영지로 들어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 제가 직접 가보겠…….”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로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 자신을 지켜주리라는 확신이 있으니 그런 것일 테지. 막내가 마성화에 빠져 영지로 들어선 것이라면, 다른 특이 사항이 더 보고되었을 것이다. 아군을 공격했다거나 하는.”

대체 무엇이 막내를 보호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로사의 씁쓸한 눈빛에 디푸스는 그 말을 묻지 못했다.

* * *

그 시각에 검황성의 영지로 들어선 것은 진 혼자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혼돈의 지옥이 된 영지로 들어선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로사의 예상대로 어떤 힘의 도움을 받아 오염된 땅을 걸었다.

두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가호를 받으며 말이다.

“단테.”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

단테는 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은 단테의 옆에 앉아, 그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영지 전체를 온통 휘감고 있는 혼돈의 광풍 사이로, 두 사람이 올려다보고 있는 한 지점만이 환한 빛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한 덩이의 빛이.

한 사람이었던 빛이, 오염된 땅의 혼돈으로부터 두 사람을 지켜준 것이다.

“이것이 너와 나의 끝은 아니다, 그러니 슬픔에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지 말라던, 조부님의 말씀이 이런 의미였어…….”

진은 단테의 우는 모습을 보지 않은 채, 그의 등을 오랫동안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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