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9화
150화. 대가를 받아야 할 때(2)
* * *
단테가 무명에 의뢰한 것은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수급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생포를 요구하고 싶었으나, 오울은 황제를 죽이는 암살자로 요나를 배정했다.
그녀보다 더 빨리 황제를 찾아 죽일 수 있는 암살자는 아무도 없고, 오울은 혹시라도 무명의 검이 닿기 전에 황실이 먼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할 일을 우려하고 있었다.
오울이 생포 요구를 거부한 이유였다. 요나는 자신조차 뛰어넘는 암살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녀가 황제를 직접 보고도 살려둘 리가 없는 것이다. 황제가 하이란을 친 것은 제국뿐만이 아니라 요나가 세상 무엇보다도 끔찍이 아끼는 동생, 진까지 위협한 일이 되었으니까.
아쉽긴 하지만, 단테로서도 오울과 같은 이유로 그 조건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원한이 크다 한들, 어차피 단테는 황제를 붙잡아 고문을 할 만한 성정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가장 확실하고 빠른 수단으로 황제의 목을 확보하고, 광장에 걸어 제국이 그의 통치를 벗어났음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요나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황제를 살려서 데려왔다. 진과 단테가 기다리고 있는, 제국 수도의 하이란 제2성으로.
“히, 막내야. 내가 이 비쩍 마른 고깃덩어리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너는 모를걸?”
그 모습에 가장 놀란 것은 오울이었다. 기절한 황제를 짐짝처럼 질질 끌어서 데려온 요나를 보며, 오울은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오, 요나야…… 어떻게 살려서 데려올 생각을 하였느냐?”
“나보다 막내가 이걸 더 처리하고 싶을 것 같아서요, 히히. 잘했죠?”
요나가 황제를 그들의 앞으로 가볍게 집어 던지며 말하자, 오울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너, 괜찮은 것이냐?”
글리엑의 혼돈이 인세를 덮친 이후.
최근 들어 제어가 가능했던 요나의 혼돈은 다시금 그녀를 이전처럼 괴롭히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 어두운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글리엑의 혼돈에 요나의 혼돈이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히.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아무나 다 죽이지는 않을 정도? 그리고 막내가 좋아한다면, 조금 참을 수 있는 정도!”
괜찮다고 하는 요나의 얼굴이 창백했다. 혼돈이 강제로 증폭시키고 있는 살의를 억누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혼돈에 물든 채 살인귀로 태어났으나, 그녀의 본질은 룬칸델답지 않을 정도로 착하고 순수한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비 기수 시절 진이 처음으로 요나의 그런 내면을 알아보았고, 그녀는 그 덕분에 혼돈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불안정해진 지금도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생포 임무를 맡기지 않으마.”
“고맙습니다, 누님. 그래도 앞으로는 항상 누님의 상태를 우선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막내가 날 걱정해주네.”
“당연하죠.”
“히히, 좋아, 좋아. 그럼, 난 잠깐 쉬어야겠어. 내일 저녁쯤이면 멀쩡해질 테니, 막내 너는 딱 기다리고 있어. 놀자!”
“물론입니다.”
요나가 창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사라지자 오울은 이마를 짚었다. 진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요나가 오기 전까지 나누던 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울 경, 정말 그렇게까지 안 좋았습니까?”
“그래. 그 글리엑이라는 놈이 깨어난 시점엔 아예 발작을 일으키며 폭주를 했었다. 마침 나와 모든 최고 살수들이 근처에 있었기에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싫군.”
진은 오울의 얼굴과 손에 난 상처들에 시선을 두었다. 폭주한 요나를 제압하며 생긴 상처였다.
‘최고 살수 10인이 함께 있었는데도 오울 경이 상처를 입을 정도였다는 말인가.’
글리엑이 깨어난 것이 요나의 폭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시 아멜라 경과 프로치 남매 역시 글리엑의 기운 때문에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었지. 하지만 누님은 전장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폭주를 했다.’
혼돈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상에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당장 글리엑을 직접 겪은 진도 근원석이라는 신들의 실수로 인해 혼돈의 왕들이 생겨났다는 사실과, 창성의 힘 없이는 그들에게 결코 맞설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태의 연결고리를 유추할 수는 있었다.
“지금 세상에 남은 글리엑의 잔재가 모든 혼돈 감염자에게 요나 누님과 같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멜라와 프로치 남매의 발작은, 바멀 연합이 룬칸델의 도움을 받아 전장을 벗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놈의 잔재만이 남은 지금은 사건 이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상태고 말이다.
“일정 이상의 혼돈에 감염된 자들에게만 벌어지는 현상일 것이다, 이 말인가?”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혹시 요나 누님이 가진 혼돈의 실체를 직접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았다.”
“아멜라 경도 혼돈 감염자입니다. 요나 누님이 그걸 알고 아멜라 경의 혼돈을 제압하러 온 적이 있는데, 누님과 아멜라 경의 혼돈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차이가 심했습니다.”
이어 진이 탁자에 놓여 있는 문서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문서들에 요나 누님 말고도 마성화와 폭주를 일으킨 사례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바멀 연합의 정보통들과 기자들이 알아온 것인데, 세계 각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 폭주자들 중 요나만큼 강대한 무력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물론 그들도 최소 7, 8성으로 이루어진 기사와 마법사들이 있어야 제압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요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정말 혼돈의 크기에 따라 글리엑의 기운에 대한 반응도가 좌우된다면, 요나의 혼돈은 그들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의미였다.
“후우.”
오울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서는 혼돈 감염자들의 폭주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울은, 요나를 자신의 후계 이상으로 여기며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답답하기는 진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계속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무명에서도 관련 정보가 나오는 대로 바멀 연합과 공유하도록 하겠다.”
오울은 이제 진을 단지 룬칸델의 기수가 아니라 바멀 연합의 총사령관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진을 높이 평가하고, 요나에 대한 고마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황성전으로 인해 세계의 판도가 바뀌었으니, 무명 또한 어쩌면 이제는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만 요나를 좀 지켜보러 가봐야겠군. 이로써 의뢰는 모두 완수되었다. 진, 그리고 단테 하이란.”
단테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계속 바닥에 엎어진 황제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예, 오울 경. 생포에 대한 추가 보수는 알려주시는 대로 지급을 하겠…….”
단테의 말에 오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따지고 보면 우리 무명도 론 경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닌가? 게다가, 론 경에겐 젊은 시절 빚을 진 적도 있거든.”
오울이 품에서 한 송이의 조화를 꺼냈다.
“지금은 검황성에 있다는 론 경의 빛에 바칠 수 없으니, 제국 내에 임시 위령비가 세워지면 내 대신 론 경께 올려주게.”
오울이 나서자 진과 단테가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찢어진 옷과 비루한 행색, 야윈 몸에서 그가 어떤 도피 생활을 해왔는지가 보였다.
“황실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모양이군.”
진의 말에 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이 황제를 보호하지 않은 이유가 ‘민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두 사람은 모르지 않았다.
‘마인화’를 비롯한 황실의 최중요 패들을, 더 이상 황제가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정오에 백성들에게 나의 섭정을 알려야겠소.”
짝, 짝!
단테가 황제의 뺨을 때리며 그를 일으켰다.
“큭, 으윽!”
“내란범죄자 아미르 비먼트.”
“단테…… 하이란?”
“두 시간 뒤 너는 네놈이 하이란을 역적이라 선동했던, 황궁 광장에 서게 될 것이다. 네 생사는 그곳에서 결정이 된다.”
황제는 이미 미련을 내려둔 듯 크게 당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황실이 자신을 버렸다는 걸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1차전 당시 지플조차 자신과의 약속을 깨뜨렸으니, 그에게는 정말 아무런 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푸흐흐…… 짐을 공개 처형하고 하이란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려는 것인가? 그 검으로 직접 내 목을 벨 건가?”
“아니, 널 죽이는 건 하이란의 복수심이 아니라…….”
차락! 단테가 커튼을 젖히며 중앙 창문을 열자, 저 멀리 구름처럼 모여 있는 군중들의 모습이 보였다.
백성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어서 찢어 죽일 아미르 비먼트를 이리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다.
“제국의 민심이다.”
담담하던 황제의 눈동자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미르 비먼트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이나 고문이 아니다. 황실로부터 버려지는 것도 아니었고, 황제의 지위를 잃는 것도 아니었다.
백성들의 원한 서린 목소리였다.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미르 비먼트는 잔혹하고 괴악한 인물이었으나, 황제로서 백성들을 사랑하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저들은 짐을 막을 힘이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짐보다 하이란을 좋아하면서도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나서지는 않지. 짐은 백성들의 그런 우매하고 짜증 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구나.
검황성전 직전에 황궁 광장에서 알톤 하이란에게 했던 말.
그때와 달리, 지금의 백성들은 정말로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황제를 죽이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오만과 독선, 그리고 자존심으로 이루어진 황제의 내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백성들과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평생을 잘못된 짝사랑으로 보낸, 한 비루한 인간은 이제 저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아미르 비먼트는 황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두 시간 뒤.
광장에 내던져진 황제는, 백성들에게 그 형체가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돌팔매질을 당했다.
백성들은 그가 서 있던 땅에 남은 것이 피와 살점, 뼈로 이루어진 얼룩이 전부가 된 다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저주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