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4화
161화. 복귀(1)
1803년 1월 30일.
투신전 본당 재건이 시작되고 어느덧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진이 라프라로사에 들어선 후 2년 반이 흐른 시점이기도 했다.
로사가 허락한 3년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진은, 슬슬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왕대전이 끝난 후, 진은 매일 본당 재건과 더불어 수련을 해왔다.
대련은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진짜 목숨을 건 실전이 아니라면 딱히 자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반은 명상과 그를 통한 깨달음을 위주로 진을 성장시켰다.
반이 던져주는 무에 대한 화두를 푸느라 하루가 갈 때도, 한 달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모든 화두를 다 돌파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투왕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경지 또한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반과 바바 두 사람을 제외하면, 명왕족의 그 누구도 진을 꺾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투왕제이검이 된 기분은 어떠냐, 십삼투왕 형제.”
오투왕, 보라스가 진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진은 투신전 외벽에 앉아 형제들이 본당을 재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이검이라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투왕 형제.”
“껄껄! 아직 자신의 힘을 잘 모르니 그런 대답을 하는 것이지.”
10성,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확실하나 보라스의 말대로 진은 자신의 정확한 무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라프라로사에 입성하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느낌만이 있을 뿐.
“본당 재건이 시작되고 형제가 치른 대련은 구투왕 형제와 맞붙은 세 번뿐이지. 그리고 형제는 그중 한 번을 승리했다.”
“대련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맞아. 실전이었다면 형제는 세 번을 싸워 세 번을 죽었을 게야. 그런데, 그거 아나? 투왕 형제들 중, 바바 형제와 대련에서라도 1승을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그렇게 걱정되는 얼굴을 하고 있지 말게. 내일이면 떠날 텐데,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다른 형제들이 얼마나 속상하겠나.”
“제가 걱정되는 건, 수행이 부족한 채로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위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성장했죠.”
“그럼 본당 재건이 아직 안 끝나서 그런가?”
“그것도 남은 공사를 모두 형제들에게 맡겨야 하니 미안하기는 하지만, 링링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만약 이번 대전에서 바바 형제가 진을 죽이더라도, 라프라로사의 시간이 완전히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본래 진의 혼돈이었기 때문인지. 링링, 이 아이가 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더군.
제65대전이 시작되기에 앞서 반이 했던 말은 당연히 사실이었다.
이전까지 라프라로사의 시간은 오로지 진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때만 흘렀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반은 진이 의식을 잃거나 빈사 상태가 될 때마다 라프라로사의 시간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걸 확인해왔었다.
하지만 링링이 생긴 후에는 그 현상이 사라졌다.
라프라로사의 시간을 흐르게 만드는 진의 힘이 모종의 이유로 옅어질 때마다 그 자리를 링링의 기운이 대신하는 걸 느낀 것이다.
반은 진이 떠나더라도 라프라로사가 멈추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진은 덕분에 이곳에 남을 형제들에게 덜 미안했고 말이다.
“아, 그럼 역시 그것 때문이로군…….”
보라스가 미안한 듯 흠흠 헛기침을 했다.
“보라스 형제가 미안할 일이 아닙니다. 형제는 최선을 다해 저를 도왔지 않았습니까.”
진이 라프라로사를 찾은 이유는 수련만이 아니다.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다는 것이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인세를 떠나는 건,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명왕족의 도움을 받으면 확실히 완성할 수 있느냐?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직이다, 모른다, 장담할 수 없다. 계속 너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하는군. 그러라고 네게 자율권을 허한 것이 아니다.
-가주 대행께서 제가 아니라 예언자와 협상하는 게 나을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을 유예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가주 대행께서는 검황성전에서 예언자의 유혹을 이미 한 차례 뿌리쳤을 것 같군요.
시공간 장치의 완성과 혼돈 정화 수단의 확보.
-예언자는 이미 네가 하려는 모든 걸 당장 실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내가 네게 기회를 주려는 건, 시론이 너를 믿기 때문이고…… 네가 나를 조금은 감화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라프라로사에 와서 기대한 것 이상의 무위를 얻었다.
하지만 시공간 장치와 혼돈 정화에 대해선 ‘확실하다’라고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시공간 장치는 콰울 님과 동료들이 계속 분석하고 있었을 테니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나가서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만, 동료들이 시공간 장치를 완벽하게 분석한 경우는 배제했다.
지플의 기술력이 없는 대신 발레리아의 기록 마법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그 거만한 콰울조차 3년 안에 시공간 장치를 완성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으니 말이다.
혼돈 정화 수단은, 보라스를 통해 만들어둔 상태다.
보라스가 진으로부터 링링을 빼낼 때 사용한 ‘혼돈 추출 보조기’를 개량해서 혼돈 정화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보라스가 미안한 듯 행동하는 건 그 물건이 가진 한계 때문이었다.
“바깥에 있는 진 형제의 적들이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나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돼. 형제의 가문에 있다는 예언자와 지플이라는 놈들은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그들의 물건이 당장은 보라스 형제의 것보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라스 형제의 정화기처럼 근본적인 치유를 해내지는 못할 겁니다.”
예언자는 혼돈을 증폭하고 통제해서 오히려 강화 수단으로 이용할 것이며, 지플은 혼돈의 마성화를 유예하는 쪽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킨젤로는 애초에 오래전부터 혼돈을 이용해왔고.
진은 ‘혼돈’을 대하는 각 세력의 구도가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이 원하는 건 근본적인 정화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역겨운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잠식을 완전히 해제하는 방법을 원했다.
보라스의 결과물은 그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는 물건이었다.
다만 정화기를 통한 치유 기간이 너무 길고, 정화의 매개로 투신혈이 사용된다는 문제가 존재했다.
아마도 예언자는 다룰 수 있으리라 추정되는 ‘최초의 혼돈’을 대상으로는 전혀 효과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보라스 형제가 만든 정화기가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쩝…… 바깥의 기술과 접목해서 개량하고 양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나도 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는 할 테지만, 투신 형제의 피를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는 현재로서는 그저 요원할 뿐이군.”
“혹은 시공간 장치를 완성해 형제들을 바깥으로 빼낼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투신 형제께는 혼돈을 정화기 없이도 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진의 경우는 최초의 혼돈인지라 보조기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그녀로서도 이후의 부작용을 확신할 수 없었으나.
일반적인, 그리고 그리 거대하지 않은 혼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추출 보조기가 있다면 반은 본인의 능력만으로 혼돈을 큰 부작용 없이 추출할 수 있었다.
보라스가 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여하튼, 형제가 이룩한 것들을 형제의 가문이 감히 미흡하다 평가한다면. 그때는 맞서 싸워서 이기면 돼. 형제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
단지 무위만을 뜻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로사가 진의 성과들을 부족하다 여긴다면 그녀와 전쟁을 시작하는 건 필연이다.
‘바깥으로 나간 후, 남은 6개월 안에 모든 면에서 어머니를 완벽하게 납득시킬 만한 성과를 만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어머니는 결국 예언자와 손을 잡겠지.’
로사 룬칸델.
일생의 강적이 바깥에서 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지플과 킨젤로 그리고 황실 또한 힘을 비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스럽기는 해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형제와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들이 강해질수록, 진과 동료들 또한 강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바깥으로 나가면 콰울이라는 제 동료가 얼마나 좋아할지 궁금하군요. 분명 역사상 최강이 될 비행 함대를 제작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테니.”
비행 함대.
투신전의 본당이 부유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명왕족은 이미 반만년 전에 비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광심장, 명왕족의 심장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동력원이 된다.
명왕족은 죽은 형제들의 심장을 통해 투신전 본당 같은 부유물을 만들었고, 비행 함선 또한 개발했었다.
그 비행 함선은 신들과의 최종 결전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었고, 패배 후 모조리 부서졌다.
셀 수 없이 많은 광심장들과 함께.
그 함대의 이름은 황금.
지금 진이 품에서 꺼낸 한 뭉치의 종이가 바로 반이 내어준 황금함대의 설계도였다.
설계도엔 신들과 치른 치열한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실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콰울이라는 형제의 동료라면 왠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군.”
“그 모습을 꼭 형제들에게 보여줄 겁니다.”
“껄껄껄, 우리에겐 멸망과 패배의 상징이었으나…… 그게 다시 진 형제를 통해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 된다면. 죽은 형제들에게도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야. 그들을 잊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도.”
보라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농땡이는 여기까지만 하고. 형제들 작업이나 마저 돕도록 하지. 얼른 오늘 할당량을 끝내야 형제의 송별회를 열지.”
진이 떠나기 전날임에도, 본당 재건은 언제나처럼 자정이 될 무렵까지 이어졌다.
평소라면 명왕족들은 떠나는 진과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자 하루쯤은 재건을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평소와 달랐다.
진이 떠나더라도 멈추지 않을 시간 속에서, 형제들은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진과 자신들을 위해서.
술자리는 밤새 이어졌다.
진은 그와 링링의 업적을 먹겠다며 사방으로 입을 뻐끔거리는 형제들을 보며, 라프라로사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에서 만나세, 형제여.”
[흥, 어서 꺼져.]
링링은 마지막까지 진에게 메롱 혀를 내밀었으나, 슈리를 안을 땐 펑펑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도 아닌데 뭘 그리 서럽게 우냐, 링링. 너도 바깥에서 보자. 그때는 말도 좀 더 예쁘게 하길 바란다.”
[또 등신처럼 어디서 얻어터지지나 마라! 에베베, 에베!]
그 말에 반은 또 링링의 머리를 쥐어박았고, 진은 피식 웃으며 형제들과 눈을 맞췄다.
“바깥에서 봅시다, 형제들. 그래도 떠나려니 이렇게 말하고 싶기는 하군요. 라프라로사는 내게도 고향이니 말이죠.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