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7화
163화. 가문 복귀(6)
그 역시 분명 예언자의 힘, 혼돈으로 빚어진 기사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기사들과 외형부터 차별된 모습이었다.
혼기 특유의 탁하고 검은 느낌 대신, 그의 온몸을 물들이고 있는 건 은은한 쪽빛이었다.
눈동자도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흉포한 기색을 전혀 품고 있지 않다. 절정에 다다른 무인의 깊고 묵직한 시선이 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하다.
검을 섞어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진은 찬찬히 그를 살피며 기억을 더듬었다. 폭풍성 서고에서 읽은 한 전대 가주에 관한 묘사가 떠올랐다.
맹수의 갈기처럼 사방으로 뻗은 장발, 때문에 ‘사자왕’이라 불렸다던 룬칸델의 전대 가주.
라이오넬 룬칸델, 그게 영묘에서 나온 사내의 이름이었다.
“룬칸델의 가장 나중에 난 자식이 가문의 6대 가주를 뵙습니다.”
진은 차분한 태도로 라이오넬에게 예를 갖췄다.
[호오, 나를 알아보는구나. 나에 대해 남겨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기특하군.]
그에 관한 기록은 폭풍성 서고에 남은 게 거의 전부였다.
그의 시대는 룬칸델이 지플에 패배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므로, 대부분의 기록이 말살된 것이다.
“기특하다 하셨으니, 그 상으로 제 질문을 하나 받아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선조께서는 다른 혼돈과 달리 이성과 의지가 분명하신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문의 풍경이 썩 아름답게 여겨지지는 않으실 터. 어느 쪽을 벌하기 위해 죽은 육신을 이끌고 오셨습니까?”
[크하하! 이 몸이 네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당장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구나.]
“대답해주십시오.”
[그저 나는 소환자에게 종속된 망령일 뿐.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너를 벌하는 것이다. 뻔한 걸 묻는구나. 뭐, 내 보기에 로사라는 아이의 판단이 그리 나쁘지도 않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라이오넬. 지금부터 후손의 검에 베이는 치욕을 당하더라도, 부디 겸허히 받아들이시길…….”
[아주 좋은 기백이다.]
진의 눈동자에 맺힌 청화가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라이오넬은 혼기로 형성한 장검으로 허공을 갈랐다.
스아아악……!
라이오넬이 가볍게 휘두른 일격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검도劍濤의 경지에 이른 검기를 쏟아냈다.
그의 검기가 자아내는 인력과 척력에 인근 혼돈의 기사들이 뭉텅이로 쓸려나갔다.
라이오넬은 그들의 안전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테마르를 제외하면 분명 역대 최강이라 평가받는 룬칸델의 현 가주. 시론을 가장 닮은 자식임이 분명한 후손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라이오넬의 검기가 진을 덮치는 사이.
스탐은 진의 후방을 노리며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등을 보인 진을 상대로도 함부로 검을 뻗을 수가 없었다. 달려들어도 결과는 무의미한 공방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불과 몇 년 전, 자신이 목숨을 구했던 가문의 12기수가 절대적인 무인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라이오넬의 검기를 ‘찢어발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검이 아닌, 맨손으로.
“선수를 내어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민망하군요.”
과시.
진은 보다 체구가 큰 라이오넬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라이오넬은 그 시선이 오히려 더 높은 곳에서 시작된 듯 느껴졌다.
[내 비록 평생을 오만 속에 살았으나, 너를 상대로 그런 걸 허락할 만큼 감이 없지는 않구나.]
라이오넬은 진의 손아귀 속으로 수렴되며 사라지는 자신의 검기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즉시 인정한 것이다. 진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잔챙이들은 물러나라. 서 있어 봤자 저놈에겐 공기만큼의 위협도 되지 않을 테니.]
란, 뷔고, 뮤, 앤.
그 네 사람이 라이오넬이 잔챙이라 지칭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혼돈의 기사들을 부리며 줄곧 진을 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이오넬 님. 어머니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로사가 너희더러 저 아이를 죽이라 하였을 리 없을 텐데.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군. 목숨이 여럿이라 아깝지 않다면 너희들 뜻대로 하거라.]
씨아악-!
이번에도 라이오넬이 먼저 거리를 좁혔다. 그가 쇄도하는 속도에 공기가 터지며 곳곳에 충격파를 일으켰고, 진은 그에 맞서 브라다만테를 휘둘렀다.
힘에서는 라이오넬이 우위였다. 진은 검이 부딪힌 순간 뒤쪽으로 튕겨졌는데, 그때서야 스탐은 처음으로 그를 파고들 수 있는 틈을 발견했다.
뮬타의 룬과 영갑의 흉부에 작은 균열이 번졌다. 피하지 못했다면 두 사람의 검은 그대로 갑옷을 뚫고 들어와 목과 심장을 터뜨렸을 것이다.
라이오넬의 가슴팍과 스탐의 갑옷에도 진의 검이 닿기는 했으나 초전의 구도는 분명 진이 밀리는 형상이었다.
일 초에도 수차례씩 부딪히는 세 자루의 검들은, 태산이나 성채 같은 게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진동을 울려댔다.
초인들의 전투에서 번진 여파에 정원에 꽂힌 가문 수호자들의 검이 지워지고 있었다.
역사와 긍지를 간직한, 녹슬고 빛나는 검들이 부러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슴 찢어지도록 괴로운 것은, 이 정원에 오직 진 한 사람뿐이었다.
[강하구나. 실로 놀랍도록 강하다! 지금이라도 네 어미의 편에 서서 싸울 수는 없는 것이냐? 너와 로사의 힘이라면 충분히 이 세상을 두 손에 거머쥐고도 남을 터!]
“라이오넬, 당신은 내게 그저 소환자에게 종속된 망령일 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진이 스탐을 밀어내며 라이오넬의 종베기를 받았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가문의 가치에 종속된 인간이기에. 얼마나 편한 길이 있든, 얼마나 달콤한 유혹이 있든. 도저히 그 가치를 외면할 수가 없을 뿐이죠…… 투쟁. 바로 그 지독한 것을.”
[너무 아까운 마음에 괜히 실없는 소리를 하였군. 그런데 말이다,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투쟁의 근본이다. 네 어미는 누구보다도 그걸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
“인정합니다. 로사 룬칸델이 룬칸델이 아니라 다른 가문에 속한 자였다면, 나는 그녀를 대단한 인물이라 평가했을 테니.”
프슷!
라이오넬의 오른쪽 뺨에서 창백한 핏줄기가 뿜어졌다.
그는 진의 검이 자신의 얼굴을 지나는 순간을 인지하지 못했다. 전투 중 상대의 검을 완전히 놓친 것은,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끝날 뻔했군.’
그러나 라이오넬은 그조차 그리 놀랍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에도 만나본 적 없는, 유례없이 강한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절감하게 되었을 뿐.
공포와 희열이 라이오넬의 등허리를 서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스탐 또한 그와 유사한 감각에 휩싸였다.
[내 시대였다면 분명 절대자였을 무력을 갖고도, 한낱 소년의 꿈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구나. 그게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죽는 이유일 것이다.]
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순수한 힘의 크기는 라이오넬과 스탐 쪽이 앞서고 있었다. 뮬타의 룬과 영갑에 생채기가 늘어나는 속도도 시간이 갈수록 빨라졌다.
호흡도 가빠지고 있었다.
반면 라이오넬과 스탐의 검은 점점 완벽한 합을 갖춰갔다.
라이오넬이 진입해 빈틈을 만들면 예외 없이 스탐의 검이 영갑을 찌르고 베었다.
투구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역시, 이 상태로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무리인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내내 여유를 잃지 않기는 했으나, 진은 분명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결전기를 난사하면서도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고, 스탐은 마치 요나와 루나의 특성을 합친 것처럼 전투의 흐름을 휘어잡았다.
빈틈을 찌를 때는 놀라울 만큼 고요했고, 압박을 더할 때는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다.
때문에 진은 라이오넬보다 오히려 스탐이 더 까다로운 상대로 다가왔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도 분명 아껴둔 수들이 있을 터.’
그건 진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진은 절대 감당할 수 없을 변수를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비장의 수들을 지금 꺼내기에는 아까운 것이다.
‘업화를 두들기는 혼돈의 기운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추세가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면, 내가 다른 패를 꺼내지 않고 버텨야 하는 시간은…….’
약 5분.
그것만 버티면, 탈출 중인 저항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업화의 힘을 회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진이 지금껏 라이오넬과 스탐에게 힘 싸움에서 진 이유였다.
‘그때까지 순수한 검술만으로 두 사람의 공세를 견딜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어렵…….’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진은 돌연 급격히 업화에 닿는 혼기가 미약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오러가 혼기를 본격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 것도.
조르덴 룬칸델.
그가 업화의 보호 속에서 비축한 힘을 방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아아악……!
상공에서 저항자들을 보호하던 테스도 포효를 내질렀다. 저항자들이 검의 정원을 빠져나가 칼론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진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됐군.’
검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업화의 불길이 일시에 사라졌다.
동시에, 라이오넬과 스탐은 거리를 벌렸다.
업화가 사라지자마자 진의 기운이 달라진 걸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업화는 사라진 게 아니라, 진에게로 돌아왔을 뿐이다.
진에게 귀결된 업화가 다시금 그를 푸르게 물들였다.
뮬타의 룬과 영갑이 해제되며 드러난 진의 육신은, 염제의 업화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지금껏 우릴 상대하며 펼친 업화가, 반쪽짜리였다는 말인가……!?’
라이오넬도, 스탐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업화가 저항자들을 보호하던 사실은 알았으나, 그것 때문에 온전한 위력을 내지 못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내 검의 정원 전체가 내뿜는 혼돈을 밀어내던 그 초월적인 불이, 반쪽에 불과한 힘이었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라이오넬, 끝내기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줘야 할 것 같군요.”
라이오넬의 부릅뜬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경외하고 있는 것이다. 염제, 사라 룬칸델의 전설을 직접 목도하게 된 축복을 누린 후손으로서.
“당신과 달리 사라 경은, 죽어서도 천 년 동안이나 룬칸델을 위해 싸웠습니다. 온몸이 부서지고, 내면은 그보다 더 황폐해졌음에도……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간직했던 천 년의 투쟁과 의지 역시, 한낱 소년의 꿈 같은 것이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 진의 뒷말에 라이오넬은 대답을 고를 수가 없었다.
“대답을 못 하는군요. 그게 오늘 당신이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입니다.”
브라다만테가 라이오넬과 스탐에게로 쇄도하고 있었다. 마치 배신자를 처단하는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