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4화
166화. 칼드란 설원의 흔적(1)
동부 5지역, 칼드란 설원.
이 시기의 칼드란 설원은 숙련된 모험가나 단련된 무인도 길을 잃고 동사하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지금 설원에 온 파티가 동사 따위를 할 일은 없으나, 로닐이 건네준 지도만으로 길을 찾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슈리가 없었다면 말이다. 슈리는 이번에도 일행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꺄하핫! 이리 와, 슈리. 이 누나랑 뽀뽀 한 번 하자. 우리 슈리는 어쩜 이렇게 똑똑하지? 주인을 닮아서일까?”
[먀아악.]
슈리가 슬쩍 산드라를 밀어내자 제피린이 코웃음을 쳤다.
“누나? 우스운 소릴 하는군요, 생체 골렘 아가씨. 진 룬칸델의 적옥묘는 최소 천 살이 넘은 영물이랍니다.”
“어머, 이 거지 같은 건 왜 또 시비지?”
“시비를 걸다니요? 난 그저 당신이 우스웠을 뿐인데.”
“헤도, 저거 입 좀 십자로 찢어버려.”
“아까부터 육체미 집사를 믿고 못 하는 소리가 없군요. 이 세상엔 당신 생각보다 괴물이 더 많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요.”
“흥,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한번 먼저 쳐보시지? 장담하는데, 네가 내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순간 헤도는 반드시 검을 뽑아. 그럼 당연히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우게 될 거고, 난 어느 쪽이 이길지 알 것 같은데.”
“아, 정말. 어쩌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내 주인의 명령만 아니었…….”
“소타 사막에선 진 씨가 탈취한 물건들 때문에 못 덤볐고, 이번엔 주인의 명령 때문이고. 마계의 대공작이라는 직책이 괜찮긴 하네. 항상 져도 핑곗거리가 산더미잖아.”
“하, 알았어요. 그럼 생체 골렘, 당신이 날 먼저 쳐요. 반드시 죽여줄 테니까.”
산드라는 제피린과 달리 대번에 주먹을 휘두르려 했으나 헤도가 잡아당겨 제피린에게 닿지 못했다.
헤도는 손아귀에서 바동거리는 산드라를 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여정이 시작된 이후 산드라와 제피린은 쉴 새 없이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들은 소타 사막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적지에서 긴장감이 너무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나.”
진이 말했다.
“하지만 진 씨, 저게 자꾸 내 신경을 건드려요. 방금도 봤죠? 먼저 시비 거는 거.”
“당신이 걷는 내내 일부러 내 뒤꿈치를 밟은 건 진 경에게 비밀인 건가요?”
“두 사람 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아무 데나 버려두고 혼자 가도록 하겠어. 내가 없어도 칼드란 설원을 탈출하는 일에 다들 무리는 없겠지?”
산드라와 제피린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박력, 좋아!’
‘빌어먹을, 주인한테 생체 골렘하고 싸우다가 쫓겨났다고 하면 이것보다도 더 안 좋은 취급을 받게 되겠죠…….’
산드라는 그냥 진의 말이기 때문이고, 제피린은 저게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헤도는 이제야 중재를 한 진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일행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느린 속도였다. 지난번 로닐이 설원에 다녀간 이후, 이곳엔 계속 혼돈에 물든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발각되는 순간 검의 정원에서 본대를 보낼 터. 최악의 경우, 로사가 직접 찾아올지도 모른다.
검의 정원에서 칼드란 설원까지 그녀가 직접 추적을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혼돈룡, 혹은 소타 사막에서 사용했던 예언자의 굴 같은 걸 이용하는 경우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울 님이 있었다면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답답하긴 하군.’
오울은 현재 요나의 행방을 추적하느라 진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글리엑 토벌전 이후 지난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요나의 폭주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던 것이다.
요나를 떠올리니 가슴이 아팠다.
‘어서 누님에게도 정화기를 사용해야 한다……. 잠식이 끝나기 전에는, 반드시 찾아야 해.’
오울이 며칠 전 티칸에 보낸 소식에 의하면 아직 완전 잠식 단계는 아니었다.
바멀 연합이 무명보다 그녀를 더 잘 찾을 수는 없다.
진은 이토록 큰 힘을 얻고도 가문을, 가족을 완벽하게 지켜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이, 조금 씁쓸했다.
그래서 아버지, 시론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상념을 지워가며 사흘을 걸었다. 다행히 일행은 정찰을 도는 기사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눈 덮인 돌산들을 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동 도중 발레리아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더 얻지는 못했다. 온통 눈과 바위, 밤낮 구분 없이 창백하고 어두운 하늘뿐이었다.
“……거의 다 온 모양이군.”
저 멀리 설산의 심부를 가르는 막다른 절벽이 보였다.
슈리가 절벽 한쪽을 앞발로 가리켰는데, 아직 일행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쪽이 동굴의 위치였다.
진은 슈리를 적옥으로 돌려보냈다.
혼기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흘간 계속 그래왔으나, 동굴 근처에서부터는 특히 짙은 혼기가 퍼져 있었다.
“흐음, 이럴 줄 알았어요. 설원 전역을 촘촘하게 감시하는 건 어려워도, 역시 히스터가 사라진 동굴 인근은 확실하게 지키고 있군요.”
“계속 진입할 생각이라면, 여기서부터는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군. 12기수.”
제피린과 헤도가 말했다.
“어차피 예상한 문제지 않소, 들어갈 것이오.”
“여기서부터는 변수가 아주 많다는 걸 잘 알고 있겠죠? 난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히스터 생존자가 이만한 위험을 감수하고 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말이죠.”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닐 텐데, 제피린.”
“폭군이 따로 없네요. 물론, 히스터가 저 동굴 안에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솔직히 진 경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야! 우리 자기의 동료가 저기서 사라졌다잖아. 가능성이 있든 없든, 가보는 게 도리 아니야? 마족 나부랭이들은 동료애가 전혀 없는 거냐?”
“어디서 뭐가 짖나 보네요. 진 경, 내 말은 차라리 설원 말고 다른 곳을 찾아보자는 뜻이랍니다. 로닐 경은 놓쳤고, 내가 볼 땐 룬칸델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잡았다면, 벌써 협상이나 협박을 시도했겠죠.”
제피린의 말대로 발레리아가 저 동굴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테마르의 무덤은 언제나 ‘아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드 대평원의 바올라이에서도, 슈체론 왕국의 해안에서도, 묘인족의 세계에서도, 완타라모 숲에서도.
로닐은 바로 저 동굴에서 발레리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만약 저 동굴 안에 테마르의 무덤으로 통하는 아공간이 존재한다면…….’
발레리아는 테마르의 다섯 번째 무덤에 도달했고, 그곳으로 피신했다는 뜻이 된다.
혹은 피신이 아니라 우연히 어떤 조건이 달성되어 강제적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아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 제피린. 내가 지금까지 겪은 테마르의 무덤은 모두 그런 식이었지.”
“히스터 생존자가 거길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이제 조금 이해가 되네요. 당신이 희망을 놓지 않고 있던 이유가.”
“설원 데이트에 이어 아공간 데이트를 할 수도 있다니! 낭만, 또 낭만이군요!”
“그리고 처음부터 이해가 안 가던 게 있는데, 이 생체 골렘은 대체 왜 데려온 거예요? 전력감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실없는 소리나 해대고 말이죠.”
제피린은 진이 아니라 헤도에게 묻고 있었다.
헤도는 대답하지 않고 안경에 낀 서리를 닦아냈다.
“……12기수, 그럼 진입은 결정이 된 건데. 어떤 식으로 할 생각인가?”
“제피린이 먼저 기사들을 전부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혼기가 짙지만 진은 제피린이라면 얼마든지 동굴 근처의 기사를 모조리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늘 진에게 어떤 식으로든 패하거나 골탕을 먹어왔으나, 그녀는 분명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그다음은 뻔하겠네요. 본격적인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선을 끌어라, 맞죠?”
“지나치게 단순한 방법이로군.”
“그것밖에는 달리 수가 없소. 저 많은 인원을 모두 흔적도 없이 암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이지?”
“동굴 안에서 아공간의 흔적을 찾는 동안, 나를 엄호해주시오.”
“뭐, 나는 마음에 들어요. 안 그래도 어떤 생체 골렘 때문에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거든요.”
“제피린.”
“왜요?”
“부탁을 하나 하고 싶군.”
진이 제피린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제피린은 그의 눈빛에 하마터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낼 뻔했다. 이 악마가 자신에게 이토록 정중한 태도로 말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부탁……?”
“가능하다면, 기사들을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끝내줬으면 한다.”
-지금 검의 정원에 남은 기사들 대부분은, 자의가 아니라 혼돈에 잠식되어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자의인 이들이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네 말대로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어떤 미친 기사가 그런 괴물의 밑에서 싸우고 싶겠나? 그 괴물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말이다. 룬칸델을 이루는 기사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긍지가 높은 이들이다.
진은 조르덴에게 가문의 검들을 전수 받으며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칼드란 설원에 있는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혼돈의 괴물이 된 이들이 대부분일 터였다.
그들 모두를 정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혼기의 크기를 미루어보아, 거의 완전 잠식이 끝난 이들이었다.
제피린이 무언가 대답하려는 찰나, 진은 그녀에게 한 차례 고개를 숙였다.
이내 제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도록 하죠. 당신을 위해서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그쪽이 좀 더 품위 있는 일인 것 같군요.”
“고맙군. 빚은 갚도록 하지.”
“바로 시작하면 되겠죠?”
“그래.”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 신호를 주도록 하죠. 내가 세 번 연속으로 포효를 터뜨리면 즉시 동굴 바깥으로 나와 탈출을 준비하도록 하세요.”
“가서 죽어버려. 아니! 죽으면 안 되겠다. 우리 여기서 다 나갈 때까지는 꼭 살아, 악마룡! 진 씨랑 약속한 거 꼭 지키고. 알았지?”
제피린은 본모습으로 변하며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혼자만의 우울한 데이트나 잘 하도록 하세요, 생체 골렘. 제 오랜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아무래도 진 경이 구하려는 히스터 생존자는 단순한 동료 이상인 것 같으니 말이죠…… 후훗.]
“뭐, 뭐라고!”
제피린을 감지한 설원의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혼기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산드라는 날아오른 제피린의 뒷모습에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