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4화
169화. 원수의 성지로(2)
“지플의 성지……?”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래, 지플의 성지. 개방이 거의 완료된 완전마력체들은,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한 반 불사나 다름이 없다. 성지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처를 회복할 수 있지.]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물론이고, 완전마력체가 그곳에서 그런 거짓말 같은 재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듣는군.”
[거짓말, 컥, 같다는 이야기인가?]
“아직은 그렇군.”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진 룬칸델. 그러나 웁, 으윽…… 그게 아니라면 누메루스의 눈물을 얻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린 누메루스의 눈물을 가지고 있지 않아. 유리아를 통해 확인해봐도 좋다.]
“아직은, 이라고 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신뢰도가 생길 것 같은데.”
[기껏 아픈 몸을 우우읍, 이끌고 찾아와 방법을 알려줬더니, 시작부터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내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 말에 진은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오르갈. 알 만한 사람들끼리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나? 네가 그런 만신창이 같은 꼴로 날 찾아온 게, 정말 바멀 연합만을 위해서일 리가 없는데 말이야.”
오르갈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휴지통에 버리는 진.
“너도 히스터가 죽으면 곤란하니까 이토록 급하게 찾아온 것이겠지. 마수왕 오르갈, 조작된 네 역사를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선 반드시 히스터의 힘이 필요할 테니. 내 말이 틀렸나?”
오르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해본 말에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군. 그래, 맞다. 내 역사는 제쳐두더라도, 애초에 히스터의 능력은 흉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면 잡설은 집어치우고 마저 이야기해봐.”
스으응-!
별안간 병실 한가운데 작은 강철문이 형성되었다.
그 문은 사용자와 대상을 차원 이동 시키던 평소와 달리 어떤 녹빛의 한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색으로 빛나는 바다……? 사막 같기도 하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
“저 풍경이 네가 말한 지플의 성지인가?”
[그래, 현재의 모습은 아니다. 내 기억을 네게 공유하는 것이지. 몇백 년쯤 전이긴 한데,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런 빛깔의 마력은 처음 보는 것 같군.”
[마력이 아니다. 딱히 이름이 없는 힘이지, 나는 잔존 기운이라고 부른다.]
“잔존 기운? 저번에 네가 말한 신 이상의 존재가 남긴 힘이라는 뜻인가.”
오르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완전마력체와 무슨 관련이 있지?”
[완전마력체는 인간 중 유일하게 잔존 기운에 반응 현상을 보인다. 그 어떤 질병, 상처, 흉터까지도. 육체적 손상은 무엇이든 잔존 기운이 스며들어 완벽하게 회복을 시키지. 반드시 완전마력체가 일정 수준 이상 개방되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고.]
“완전마력체만 잔존 기운에 반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글쎄, 나도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존재의 어떤 의지가 완전마력체의 소유자들 사이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 어쩌면 완전마력체란 애초에 그 의지가 스민 존재들에게만 허락된 축복일 수도 있겠지.]
그의 설명에 의하면 ‘잔존 기운’은 노화와 정신적 충격을 제외하면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완전마력체의 소유자에 한해서는 말이다.
이어 강철문 속 풍경에 한 흐릿한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팔 하나가 없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저 기억은 흐릿해서 공유가 똑바로 되지 않는군. 아마 히스터 같은 완전마력체일 거다.]
풍경 속 인물이 성지 한가운데 몸을 눕혔다.
‘미친…….’
얼마 후부터, 진은 그의 잘린 팔이 새로 돋아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지의 잔존 기운과 화면 속 인물의 마력이 뒤섞이며 오색찬란한 빛과 거품이 피어났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로군. 왜, 이 풍경을 내가 거짓으로 조작해서 보여주는 것 같나?]
진은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간 오르갈이 보여준 권능들이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은 오르갈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일 경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오르갈이 지금 거짓을 고할 이유도 딱히 없고.
그럼에도 진이 잠시 고민에 빠진 건, 다른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완전마력체뿐만이 아니라 너 역시 저곳에 가면 회복을 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리고 너는, 현재 지플 성지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에 히스터를 살리는 걸 빌미로, 내가 성지의 위치를 알아오길 기대하고 있어. 내 말이 틀렸나?”
오르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가끔은 너와 내가 말이 아주 잘 통할 때도 있군. 정확하다, 컥컥.]
“말이 잘 통한다고 나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당신에게 공유할 생각이 없는데, 오르갈. 네가 모든 힘을 되찾는 건, 나나 세상 사람들에겐 또 다른 흉신이 깨어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날 그렇게까지 생각하다니, 서운할 지경이로군. 어쨌거나 네가 위치를 알아내기만 하면, 언젠가 나에 대한 네 인식이 바뀌거나, 내가 네가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갖게 되었을 때 우린 거래를 할 수 있게 되겠지.]
“꽤 께름칙한 미래인데.”
[지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지의 위치로는 나와 거래하지 않아. 본래라면, 너도 마찬가지일 테지.]
“이번엔 히스터의 목숨이 걸렸으니 거래를 받을 수밖에 없을 거다, 이건가?”
[그래. 지금 히스터를 가장 살리고 싶은 건, 오히려 너보다도 지플일 것이다. 어때, 이만하면 꽤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지 않나?]
“모든 게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아주 구미가 당기지. 하지만 지플이 맨입으로 성지를 공개할 것 같지는 않군.”
[협박과 회유, 갈취는 내가 아니라 네가 더 전문적이다. 게다가 히스터라는, 지플의 최대 약점 하나까지 쥐고 있으니 유리한 조건을 따내는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뭐, 그래도 더 도움을 주자면.]
진이 오르갈과 시선을 맞췄다.
[잔존 기운이 완전마력체 소유자에게 반응할 때 일어나는 무지갯빛과 거품. 그것으로 거래를 하면 된다.]
“그걸로 지플이 무언가 연구를 할 수 있는 모양이군.”
[역시 바로 말귀를 알아듣는군. 그래, 그것만으로도 지플에겐 상당한 보상이 된다. 물론, 반드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겠지만. 커헉! 네가 거부하면 놓치기 아까울 것이다.]
진은 휴지통에 버렸던 손수건을 다시 꺼내려다, 서랍에서 새 손수건을 꺼내 그의 피를 닦아주었다.
“당신도 원하는 바가 있어 정보를 내어준 것이지만, 감사하다는 말 정도는 하도록 하지.”
[크흑, 그래, 참, 컥, 고마워 보이는군.]
이후 두 사람은 한동안 지플이 왔을 때의 대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가 끝날 때쯤, 제트가 병실을 찾았다.
“나리! 지플에서도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요. 함선 코젝이 입국했습니다.”
“알았다, 제트. 곧 나갈게.”
“예이!”
티칸을 찾아온 지플 측 수뇌들은 옥타비아와 로닐, 그리고 카둔이었다. 헤도와 산드라는 보이지 않았다.
카둔은 인간 형태로 변신한 채였고,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검의 정원 총공격 당시 얻은 부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쉽게 나을 상처가 아니었다. 그는 로사와 람이 내뿜는 혼기를 가장 많이 직격당한 데다, 이번 칼드란 설원에서도 또 중상을 입었으니 사실 지금 거동을 하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진은 담담한 얼굴로 그들을 마주했으나, 카둔의 상태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혼돈 정화기의 도움이 아주 절실한 상황인 것 같군.’
그런 진과 달리, 카둔은 티칸궁에 입성하면서부터 대놓고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카시미르가 동료들과 함께 그들을 직접 맞이하며 말했다.
“오셨냐고? 그래, 왔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불과 며칠 전 동맹을 결성해놓고. 칼드란 설원에서 우리만 쏙 빼놓고 튀어? 아무리 임시라고는 해도, 너무 양아치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던가?”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카둔.”
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카둔은 거의 눈깔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의 몸에 감긴 붕대가 활활 타오르며 환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12기수……!”
“그런데, 피차일반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지 않겠나?”
“뭐?”
“로사가 숨겨온 힘이 밝혀진 날, 너희와 킨젤로는 왜 룬칸델에 총공세를 퍼부었지? 맞춰보도록 하지. 그건 내가 반드시 검의 정원 전체를 상대로 결전을 치르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를 엿봐 나와 검의 정원을 공멸시키려고 한 것이지.”
“하, 그때는 네놈과 우리가 임시 동맹이 아니었다. 적이었다는 말이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나?”
“인정한다, 그래서 난 그 양아치 같은 짓을 용서하고 너흴 동맹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 찾아와서는 앞뒤 사정도 묻지 않고 행패부터 부리는 꼬락서니가 썩 보기 좋지 않거든. 우리가 일부러 너흴 버렸다고 생각하나 본데, 저길 봐라.”
“대체 뭘 보라는…….”
진의 손가락을 따라 티칸궁 안채 입구를 본 카둔은 말문을 닫았다. 그곳엔 제피린에게 부축을 받으며 쉴 새 없이 한 움큼씩 핏덩이를 내뱉고 있는 오르갈의 모습이 보였다.
[와…… 왔나…… 카둔, 컥. 컥컥!]
“우린 당시 오르갈의 강철문으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저런 상태로 어떻게 지플까지 데리고 탈출하라는 것이지? 심지어 네가 상대한 옛 십대기사 파들러 룬칸델은, 우리 바로 앞에 소환되고 있었단 말이다.”
[미안……하게…… 컥, 됐군. 카둔…….]
“당시 상황은 정말로 급박했다. 원한다면 여기 아즈 밀의 계약자가 있으니 확인해봐도 좋다.”
카둔은 계속 쓰러졌다 킨젤로 단원들에 의해 일으켜지기를 반복하는 오르갈을 보며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카둔 역시 바보가 아닌지라 어느 정도는 상황이 급박했으리라 예상은 했으나, 오르갈이 저 지경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지플 측이 피해를 입긴 했지만 중요 인물 중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으며, 임시 동맹들은 목표했던 바를 완수했다. 히스터를 구했고, 내가 생환했지. 이만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결과가 맞지 않나?”
카둔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로닐이 앞으로 나서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감정적인 부분이 있으니 카둔 님께서 노여워하신 걸 진 경도 조금만 이해해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히스터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킨젤로 측에 언질을 받긴 했습니다만,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숨만 붙어 있는 상태요. 오르갈은, 당신들의 성지로 가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더군.”
로닐은 몇 초쯤 눈동자만 끔뻑였다. 어떻게 네가 그걸 알고 있냐는 듯이.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