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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막내아들-704화 (703/1,001)

제 704화

179화. 피할 수 없는 함정(3)

별안간 베라딘이 손을 흔들자 허공에 녹색 창이 떠올랐다.

그 녹색 창은 기록 마법과 너무나도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플이 ‘성지’라 부르는 태양신의 잔존 기운이 남은 땅에서 본 것과 똑같은 느낌의 기운. 진은 그것이 성지에서 발레리아를 구한 대가라는 걸 알아보았다.

“……기록 마법?”

“원본을 자주 접했을 텐데, 흉내를 보고 그렇게 놀란 기색을 드러내면 내가 민망하지 않겠나?”

하지만 진보다 오히려 집무실을 따라 들어온 원로들이 더욱 놀란 듯했다.

“소, 소가주. 마침내 그 마법을 얻은 것이오!?”

“어찌 우리에겐 말하지 않으셨소, 이런 경사를!”

원로들은 연방이 겪고 있는 비극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베라딘은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진은 그 웃음에 담긴 어둠을 읽어내고는 직감적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깨달았다.

그건, 숙청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원로 여러분. 늙고 쓸모없는 자들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읍!”

“소가주, 꺽, 소가, 웁, 우웁……!”

대답하려던 원로들이 별안간 목을 부여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베라딘의 녹색 창에는 어떤 문자 같은 것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다만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가는 길에 보여준 겁니다. 어때요, 내 말대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죠?”

로닐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평소처럼 담담하게 서 있었고, 베라딘은 거품을 물며 쓰러진 원로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중 한 원로가 한 번씩 숨을 토하며 베라딘의 마법에 저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간신히 일어나서는 베라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에서 변형된 화염구가 튀어나왔는데, 베라딘은 발검해서 가볍게 베어냈다.

화염구가 흩어지자 원로의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아, 당신은 살려둘걸…….”

그게 유일하게 마법에 한순간이나마 저항했던 원로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집무실에는 살아 있는 원로가 남아 있지 않았다.

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고 있었다. 베라딘이 보여준 권능에 가까운 마법이나, 결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검술 때문이 아니었다.

친구가 변했다는 걸 다시 한번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도, 형제도. 모두 괴물이 되어 있었다.

“원래는 네가 떠난 다음에 처리할 생각이었다만, 이것도 나쁘지 않군. 아무튼,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아, 절망의 크기를 우리가 확인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군. 이걸 한번 살펴봐라.”

베라딘의 녹색 창이 집무실을 가득 채울 만큼 넓게 퍼졌다.

그 속에 세상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온갖 지역에 꾸물거리는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특히 휴페스터는 투명한 부분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고, 나머지 대륙은 그보다 옅거나 같은 얼룩으로 가득했다.

“이 지도에 표시된 검은 부분들이 흉신에게 수확되고 있는 절망이다. 대략 지금 흉신은 5할 정도 완성된 상태다.”

“5할이란 추정의 근거는?”

“함선 람이 형성되는 속도. 검은 반점이 늘어날 때마다 람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너보다 먼저 오르갈이 다녀갔는데, 그는 람과 흉신의 완성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더군.”

베라딘이 손가락으로 드락카와 자치구들, 그리고 밀쿤 왕국의 반점을 가리켰다.

“이 반점들은 연방이 디푸스 룬칸델에게 공격 당해 밀쿤 왕국의 양민들이 몰살당하고, 인질이 잡혀감과 동시에 형성되었다. 지금도 계속 진해지면서 커지고 있지. 연방만큼은, 특히 우리 본가가 있는 드락카만큼은 안전하리라고 생각한 민간인들의 믿음이 깨졌기 때문일 거다.”

그 말대로 그쪽에서 꾸물거리는 반점은 조금씩, 그러나 쉴 새 없이 커지고 있었다.

휴페스터 전체에 비하면 분명 작지만, 다른 곳들에 비하면 매우 큰 편이기도 했다.

가만히 반점을 살펴보던 진의 시선이 티칸 왕국 쪽에 닿았다.

티칸에도 검은 반점이 있었다. 크기는 말 그대로 점에 불과한 수준이나, 유독 짙어서 눈에 띄었다.

‘메리 누님…… 혹은 유리아가 가진 절망인가.’

곧장 두 사람이 떠올랐다.

“7기수와 4기수의 관계에 대해선 나도 들은 바가 있다. 게다가 아즈 밀의 계약자도 어떤 끔찍한 미래를 봐서 괴로울 수 있겠지.”

베라딘이 진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했다. 진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반점을 살펴보았다.

휴페스터 쪽의 반점,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변화하고 있는 땅이 하나 있었다.

리칼튼.

과거 예언자가 인간 제물을 모으던 땅.

진은 과거 흑기사 독스에게 그곳을 조사하라고 부탁했었다. 독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는 중이고 말이다.

“리칼튼을 유심히 살피는 걸 보니 너도 눈치를 챈 모양이군. 우린 4기수가 모든 인질을 저곳으로 이송하는 중이라 확신하고 있다. 연방이 공격 당한 이후 가장 활발하게 절망을 키우고 있는 곳이 리칼튼이니까.”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리칼튼을 치고, 인질들을 구출하는 것.

이전처럼 소규모로 펼치는 작전은 적합하지 않았다. 일만이 넘는 인질이 모두 다 살아 있을 리는 없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그중 천 명만 구한다고 해도 일단 함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인간이 신과 싸운다는 게, 새삼 부조리한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나? 절망이라는 요소가 없다면, 이런 상황에 양민을 구하겠다고 세계의 최고의 전력들이 나설 이유는 없었을 텐데.”

“뭐라고?”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끔찍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민간인 일만을 구하려다가 혼돈 면역자인 네가 다친다면? 그밖에 다른 최고급 전력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온다면? 있어선 안 될 일이지.”

진은 베라딘이 아니라 인간 시절의 로사가 하는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제 베라딘의 세계에 평범한 사람은 그저 무의미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말은 접어두도록 하지. 듣기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어쨌거나 오르갈도 다녀갔다면, 이 상황을 숙지하고 있을 테니. 우리가 정해야 하는 건 리칼튼을 공격하는 날짜와 동원 병력 정도겠군.”

“그래,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4기수와 혼돈의 병력이 가진 기동성엔 분명 제약이 있을 테지만, 그 부분은 전혀 추정이 안 돼. 히스터도 마찬가지인가?”

애초에 발레리아가 가진 지금의 기록 마법으로는 지금 베라딘이 형성한 지도를 만들 수도 없었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라딘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군……. 원본을 아직 그 정도로밖에 다루지 못하다니. 그렇게 쓸 거면 차라리 우리 쪽에 넘겨주는 게 나을 텐데.”

“또 헛소리를 하는군. 작전을 빨리 개시해야 한다는 건 동의한다. 4기수가 다시 어딘가를 습격하기 전에…….”

진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갑자기 지도에 새로운 반점이 형성되는 모습이 보였다.

베라딘도 흠칫하며 지도를 살폈다. 새로이 절망의 반점이 형성된 곳은, 제국이었다.

그중에서도 수도, 단테가 직접 지키고 있는 땅이었다.

시간상 지금 제국 수도엔 단테뿐만이 아니라 시리스와 카시미르를 비롯한 동료들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네가 말하기 무섭게 움직이는군, 4기수가 아닐 수도 있지만.”

“당장 가봐야겠다. 남은 이야기는 다녀와서 하자.”

진이 뒤돌아 나가려 하자 베라딘이 그 뒤를 따랐다.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진은 잠시 베라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제국 수도.

“추격조는 현 시간부로 해산해서 백성들의 안위를 챙기도록 하라. 가주께서 명을 내리셨다!”

“예!”

한 지휘관의 외침에 기사들이 대열을 정비하며 멈췄다. 그들 주변에 온통 혼기와 시체가 가득했다. 기사들이 섞여 있으나 대부분 양민이었다.

기사들이 흩어져서 곳곳에 쓰러진 백성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마다 민간인이 깔려 있었다.

약 30분 전, 난데없이 수도 한가운데 시커먼 차원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 쏟아진 혼돈룡과 흑선들은 순식간에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었고, 단테는 거의 동시에 대응을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카시미르와 시리스가 막 도착한 덕분이었다. 모트를 탈 수 없었다면, 아무리 빠르게 대응했어도 지금보다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단테가 현장에 도착해서 혼돈룡과 흑선의 8할 이상을 없애기까지는 겨우 15분이 걸렸다. 그런데도 그사이 몇 천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한 건,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단테는 추격조와 수비대에겐 백성 구조를, 용기사단을 비롯한 가문의 기사들에겐 잔당 소탕을 명한 채 도주 중인 적의 지휘관을 쫓고 있었다.

‘네놈은 내 반드시 찾아서 찢어 죽일 것이다……!’

분노에 찬 단테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전방을 훑었다. 놈은 벌써 수도 외곽으로 빠져나갔는데, 계속 도주를 위한 차원문을 형성하다 단테에게 꼬리가 잡혀 실패하는 상황이었다.

모트가 지쳤기 때문에 더 이상 순간 이동을 사용할 수 없으니, 한 번이라도 시야에서 놈을 놓치는 순간 끝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하다고 해서 놈을 놓칠 단테가 아니었다. 하물며 이곳은 자신이 수호하는 땅의 중심이었다.

스악-!

라시드가 광휘를 뿜자, 외곽 숲의 일부가 퍼즐 조각처럼 잘려나갔다.

단테는 잘려나간 숲의 사방으로 새로운 검기를 쏘아 그 안에 있을 지휘관을 가로막았다.

놈은 무리하게 단테의 검기를 뚫으려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추태를 보였고, 단테는 그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 개자식!”

칼자루로 투구를 후려치니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조슈아 룬칸델이었다.

“조슈아 룬칸델, 네놈이었나……!”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베일에게 당했을 때보다도 더욱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창백한 얼굴에선 쉴 새 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서 제국을 치도록 하세요. 본래 4기수가 맡기로 한 일이지만, 내가 당신을 위해 그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4기수 대신 테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나 가주의 도움 없이 돌아오면, 분명 당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내리실 겁니다.

제국을 치기 전에 조슈아는 일리나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붙잡힌 탓에 도움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고, 테러는 예언자가 기대한 바에 전혀 미치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조슈아는 실패한 셈이었다.

게다가 조슈아를 더 절망하게 만들고 있는 건.

단테의 얼굴 뒤로 보이는 저 먼 하늘로부터, 자신과 관계없는 또 다른 차원문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속에선 디푸스의 군대가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조슈아의 절망은 한 번 더 로사를 위해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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