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726화 (725/1,001)

제 726화

183화. 내면에서 시작된 전초전(1)

* * *

검의 무덤.

휴페스터는 검의 정원에 새로이 지어지기 시작한 성을 그렇게 명명했다.

휴페스터발 소식지들이 쉴 새 없이 성을 짓는 로사의 권능과 혼돈의 군세에 대한 찬양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임시 동맹은 연일 작전 회의를 진행하며 검의 무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오르갈이 강철문을 통해 검의 정원 인근을 매일 정찰한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벌써 완공이 된 듯 보인다고……? 그렇게 거대한 성이? 첫 보고가 들어온 게 불과 이틀 전이건만!”

“4기수에게 나눠준 힘을 회수하지 못하고도 그런 수준의 권능을 부릴 수 있다는 건가. 확실히 신은 신이로군.”

옥타비아와 베라딘이 말했다. 장내에 있는 다른 이들도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비먼트의 옛 황궁과 비교해도 훨씬 거대한 성이 겨우 며칠 만에 완성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기도 했다.

임시 동맹에게 이제 남은 문제는 형성이 중지된 함선 람과 상처 입은 로사뿐이었다.

인류사에 존재한 적조차 없는 규모의 초거대 성채 같은 건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한동안 성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도대체 로사가 왜 성을 지었는지, 그를 통해 얻으려는 바가 무엇인지, 혼기로 이루어진 그 성을 과연 임시 동맹의 전력이 돌파할 수 있을 것인지.

물론 무엇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로사가 성을 지은 ‘목적’에 대한 대세 여론은 있었다.

“내게는 4기수의 죽음으로 인한 타격을 회복하기 위한 방책인 듯 보이는군. 일종의 과시인 것이다. 여전히 자신에겐 이만한 힘이 있다는.”

카둔의 말에 로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성채는 그토록 빠르게 완성되었으나, 정작 진짜로 흉신의 권능과 힘을 상징하는 함선 람의 건조는 여전히 멈춘 상태니까요.”

“과시라…….”

이내 진이 입을 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진은 첫 회의 때와 달리 무척이나 초췌한 얼굴이었다. 눈 밑은 검고 머리칼은 푸석푸석하며 얼굴은 핼쑥한 모습.

악몽 때문이었다.

로사가 성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부터 진은 매일 극심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사가 나오는 악몽에 말이다.

심리적 압박이나 불안 따위에서 비롯된 악몽이 아니었다.

로사의 권능과 의지가 진의 내면으로 직접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얀 돌 속에 있던 글리엑이 단테의 내면을 황폐화했던 것처럼.

따라서 진은 잠들 때마다 로사의 의지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아니, 깨어 있을 때에도 한 순간도 빠짐없이 그녀의 영향력을 느끼고 있었다.

동맹과 동료들도 그 사실을 알았다. 결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말하자면 이미 진과 로사 사이엔 ‘내면의 전초전’이 시작된 셈이었다.

“로사에겐 그런 게 필요치 않아.”

묵직한 한마디였다.

첫 총공격 이후, 임시 동맹에서 로사의 힘을 ‘직접’ 느껴온 사람은 오직 진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진의 눈엔 과시 운운하는 카둔이 우습게 보였다.

“그렇다면 네 생각은 무엇이지? 12기수.”

“성의 이름 그대로, 그저 거창한 무덤을 만든 것 같군. 내가 묻힐 무덤을.”

십여 초쯤 정적이 흘렀다.

진은 찬찬히 동맹과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진은 로사의 유일한 대항마다.

그와 로사의 일대일 승부에 흉신전의 모든 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진이 싸우기도 전에 로사의 기운에 짓눌려 나날이 초췌해지고 있으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흉신이 그간 네게 보인 집착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군.]

오르갈이 입을 열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성의 구조를 분석하거나 내부 전력을 확인할 기회 따윈 없어. 한 번의 전투, 하나의 결과. 그것으로 우리의…… 아니, 세상의 존망이 결정되겠지.”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름 뒤.”

[보름?]

“그때 검의 정원을 친다. 나는 그때까지 로사의 악몽을 이겨내고 최고의 상태로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지. 임시 동맹들은 그사이 전투 준비를 끝내주면 될 것 같군.”

“만약 그때까지 네가 로사의 악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경우엔 날짜를 미뤄야겠지. 이 상태로 가서 싸워봐야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 뻔한 걸 묻는군, 베라딘. 반대로, 내가 그보다 먼저 로사의 기운을 밀어내고 본래 상태를 되찾는다면. 그 즉시 침공을 시작한다.”

“까딱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출격할 수 있다는 뜻이군. 알겠다, 준비해두지. 킨젤로는 동의하오?”

[동의한다.]

“앞으로 결전 전까지 이런 회의는 반드시 내가 직접 들어야 할 내용이 있을 때만 참여해도 되겠나?”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진이 회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악몽을 이겨내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좋을 대로. 세부 작전이야 어차피 계속 전달될 테니,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 * *

그날 이후 진은 비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로사의 기운에 맞서고 있는 내면의 전쟁을 끝내기에는 비궁보다 더 적절한 곳이 없었다.

함께 비궁으로 온 동료는 길리와 발레리아, 콰울이 전부였다. 고요하고 찬 공간 속에서, 진은 가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는 시간이 많았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진의 내면에선 매 순간 치열한 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을 뜨면 로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고, 눈을 감으면 로사의 검이 마음속으로 쇄도했다.

잠이 들면 로사가 진과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꿈을 꿨고, 진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를 처절하게 분간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진이 택한 방법은 수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명상하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로사의 정신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런 장난으로는 날 어쩔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꽤 수척해졌구나, 아들아.’

‘효과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이 싸움에서 내가 이기면, 당신도 잃는 게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글쎄…… 내게 잃을 것이 남았다면, 그건 너 하나뿐이로구나. 너는 내 마지막 남은 즐거움이다.’

진의 내면에서 이어지는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진은 답답해할 동료들을 위해 그 내용을 전달해주었다.

빼꼼.

한 무리의 작은 수인들이 수련장 입구에 머리를 들이밀며 진을 바라보았다.

금팽이 상단의 행수들과 물꼬리족 일원들이었다.

“보인다, 힘들어, 진. 죽는다, 안 돼.”

“아, 죽긴 또 뭘 죽어! 흠,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기는 하네. 몸에 수분도 없어 보이는데 땀은 또 왜 저렇게 흘려. 계속 앓는 소리도 내고, 속상하구만.”

어둠불꽃과 팽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뭐 보약이라도 하나 달여 먹어야 하는 것 아니야?”

“있다, 우리, 장어포. 줄까? 진. 힘 난다, 먹으면.”

“그거 갖고 되겠냐고, 어? 에잉, 비궁에 널린 게 영약이라던데. 소궁주는 그런 거 얼른 안 꺼내주고 뭐 하는 거야. 설마 이 판국에 아끼고 있는 건가!?”

“아니, 영약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어서 그래.”

느닷없이 들려온 시리스의 목소리에 팽이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시리스도 작은 수인들처럼 진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으, 깜짝이야. 내가 뒷담화 한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니지? 소궁주. 그냥 진이 걱정돼서 한 말이라구. 하하.”

“맞다, 팽이가, 뒷담화, 했다.”

“하여간 저건 꼭 이럴 때만 말을 똑바로 하네!”

시리스는 작은 수인들의 머리를 헝클며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진의 명상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매일이 그런 식이었다. 진은 명상하고, 동료들은 눈치를 살피며 그를 멀리서 지켜보고. 마치 큰 시험을 앞둔 사람을 두고 온 가족이 행동을 조심하는 것과 같았다.

하루는 시리스가 먼저 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 어머니의 폐관 수련장을 내어줄 수도 있는데. 왜 공개 훈련장을 고집하는 거야?”

“가까운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쪽이 조금 더 낫기 때문입니다.”

시리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흠칫하며 진과 눈을 맞췄다.

“흉신의 정신 공격에 저항하는 일에?”

“그렇습니다. 근처에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이정표가 되어주죠. 로사의 정신 공격에 대응하느라 자아가 매몰되어 가다가, 불현듯 동료의 목소리나 발소리, 기침 같은 게 들려오면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적당한 수준의 친근한 소음이 필요하다는 뜻이로군.”

“정확합니다, 시리스 님. 지나치게 시끄러운 상태라면 오히려 정신 공격에 집중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단지 정신 공격만으로 너처럼 강한 사람을 이토록 야위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가 어렵군.”

“그냥…… 손발이 묶인 채 심해에 빠진 것 같은, 그런 와중에 더 깊이 내려갈수록 아끼는 사람들의 시체가 보이는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될 것 같군요. 현실과 정신 공격의 경계 속에서 그런 공포가 24시간 지속되는 겁니다.”

“……심각하게 절망적이군.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는 건가?”

시리스가 한 번 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진의 얼굴은 처음 비궁에 온 날보다 훨씬 나빠져 있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신 공격을 완전히 끝장내야 하는 시점이 오면, 그때는 폐관 수련장이 필요할 겁니다.”

“결국 오롯이 혼자 싸워야 하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군.”

“예. 직감이긴 하지만, 분명 그럴 겁니다.”

시리스를 비롯한 동료들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 동맹이 총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 혼자 먼저 어렵고 고독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료들은 어렴풋이 진이 겪고 있는 싸움을 상상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이 비궁에 오고 나흘이 지난 날부터.

동료들, 그리고 임시 동맹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로사의 정신 공격이 번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진과 같은 종류의 악몽을 꾼 건 바로 시리스였다.

“아아아악!”

“소궁주님!”

“대장!”

시리스의 비명이 들리자 비궁 7검과 호위들이 급히 비궁주의 침소로 들어섰다.

그들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리스를 보았다.

그렇게까지 공포에 질린 시리스의 모습을 보는 건 그들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년기에 악몽을 꾸다가 깨도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다시 눈을 감는 게 시리스였고, 소궁주로서 혹독한 수련을 할 때도 괴로운 내색 한 번 하지 않은 게 시리스였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허억, 헉…… 진, 진은.”

“소궁주님?”

“이런 걸…… 매일 견디고 있었다는 말이야?”

시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동안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사라는 흉신의 공포가 사지를 마비시키는 와중, 견딜 수 없이 진이 안쓰러운 마음이 치솟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