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748화 (747/1,001)

제 748화

184화. 숙명을 넘어(20)

쩌엉-!

무라칸이 흉신을 향해 힘껏 주먹을 뻗었다.

주먹과 검이 맞닿으며 일어난 충격파에 세 사람을 감싼 거대한 혼기가 출렁였다.

무라칸은 진이나 명왕족들과 달리 혼기에 완전한 면역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본신의 힘이 지나치게 대단한 탓에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그를 감염시키는 게 불가능할 뿐.

완벽하게 회귀한 건 아니나, 그는 지난번 1차 총공세 때보다 더 전성기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흉신이 먼저 물러났다. 무라칸은 양손에 혼기 덩어리를 만들어 거리를 벌린 흉신을 향해 난사했다.

“크하하, 그때는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내가 네깟 것이 두렵겠느냐? 아, 거참. 겁나게 따갑긴 하구나!”

그렇게 말한 무라칸은 재빠르게 진을 향해 다시 속삭였다.

‘꼬마, 사실 이번에도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다. 알지?’

‘미샤 님이 그럴 거라고 했다.’

현재 무라칸의 부재는 곧 솔더렛의 부재와 같은 의미다.

그가 ‘신의 영역’에서 부재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림자에 관한 세상의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네가 회복할 시간만 좀 벌어주고 떠나면 너 혼자 끝낼 수 있을 것 같긴 하군. 이미 상당히 다쳤으니까. 고생했다, 저렇게 만들기까지.’

지금 무라칸에겐 솔더렛의 신격이 묻어 있다.

때문에 그에겐 필멸자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이 보이고 있었다.

진의 몸만 멀쩡하면, 지금의 흉신은 진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내가 아니라 반 형제가 한 거야. 우선 1분 정도만 날 보호해.’

‘오냐.’

후우웅……!

무라칸이 본모습으로 변신하며 날개를 펼쳤다.

흉신은 바짝 독기가 오른 채 무라칸에게 검기를 퍼부었다.

바깥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파들러는 이전과 달리 베일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새로이 등장한 혼돈의 군대는 규모가 너무 컸다.

무엇보다 혼기를 통한 정신 공격과 흑기사의 숫자가 문제였다.

동맹들로서는 흉신이 룬칸델의 역대 흑기사를 모조리 부활시킨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지경.

네 명의 전대 가주들은 그 모든 흑기사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과 무라칸이 바깥을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진이 품속에서 둥근 루비처럼 보이는 보석을 꺼냈다.

파장 추적 동기화 장치와 유사하게 생겼으나, 전혀 다른 용도와 이름을 가진 물건.

누메루스의 피.

결전을 대비해 미리 지플로부터 받은 신물이었다.

지금 진은 치명상에 빠진 것도, 죽음의 문턱에 선 것도 아니나 망설이지 않고 그 피를 입에 넣고 씹었다.

단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만전 상태로 흉신과 싸우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 싸움이었다. 피가 아니라, 설령 눈물이었다 할지라도.

와그작!

신의 피가 입속을 가득 채우자, 진은 탈력감이 급격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눈에는 생기가 돌고,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몸 구석구석으로 피를 보내고 있었다.

근육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단단하게 곤두섰고, 감각은 한없이 예리해졌다.

어두워진 광심장도 차츰 본래의 빛을 되찾아갔다.

정확히 1분이 지났을 때, 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다시 검을 쥘 수 있었다.

오러가 진의 몸을 휘감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다음엔 마력이 휘몰아치며 사방에 번졌고, 영기가 브라다만테를 감쌌다.

장막처럼 펼쳐진 마력을 통해, 소환문이 열리고 있었다.

[가아아악!]

흉신의 성이라는 죽은 세계는 이미 완벽하게 부서져 람의 부품이 되었으니, 테스가 다시 소환될 수 있는 것이다.

“아오, 깜짝이야! 이 양반 부를 땐 귀띔이라도 좀 해라!”

테스가 불을 뿜자 그에 맞춰 영기와 오러가 더해졌다.

업화.

그리고 영원화.

룬칸델의 마검을 상징하는 두 가지 불이 몰려드는 혼돈을 밀어내고 있었다.

무라칸은 미샤처럼 업화에 무영창 흑영을 합할 수 없으나, 그냥 막대한 영기를 더하며 업화를 강화시켰다.

지금 흉신을 찌르고 있는 건 그저 검이 아닐 것이다.

룬칸델의 역사 천 년을 이어온 불의 의지, 진은 흉신의 가슴팍을 꿰뚫은 검을 비틀며 이를 악물었다.

[커헉!]

“가문이, 나의 집이, 죽은 형제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네 손에 죽고 파괴되었다!”

진은 저도 모르게 악에 받쳐 소리치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강한 룬칸델? 그 무엇에도 위협받지 않는 가문? 네가 하려던 일은 아버지와 테마르, 그리고 투신조차 해내지 못한 일이다. 네가 주제를 모르고 날뛴 결과를 봐라! 검의 정원은 부서졌고, 기사들은, 가문은……!”

[닥쳐라! 그토록 가문이 소중했다면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너도, 시론도!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단 말이다!]

“죽어!”

진을 미치게 만드는 건, 흉신을 죽이더라도 이미 부서진 것들이 돌아올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싸울 수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이제 흉신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이 울분은 해소되지 않을 터였다.

이미 흉신의 마수에 당해 죽은 사람들의, 남겨진 이들의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스걱!

진이 꽂힌 검을 횡으로 베어냈다.

흉신은 즉시 회복하며 처음처럼 영원화를 흡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은 악독한 눈을 한 채 같은 자리에 한 번 더 칼날을 박고, 비틀고, 베었다.

흉신이 피하려 하면 무라칸이 그녀의 움직임을 강제했다.

진과 무라칸의 몸에도 하나둘씩 상처가 생겼다.

피와 영기, 혼기가 뒤섞여 허공을 물들이고 있었다.

업화가 계속 유지되는 와중 쉴 새 없이, 룬칸델의 결전기와 비기들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유성우와 검은 유성우가 동시에 내리쳤고,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서로의 목으로 날아드는 검기와 검은 검기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낙화와 낙화, 전광과 전광, 검은 십자성과 금환식, 쇄천과 쇄천…….

자칫하면 초인의 강체와 신의 육신조차 산산조각 바스라뜨릴 검들이 한때 모자였던 이들을 난타하고 있었다. 서로를 찌르고 베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목구멍은 계속 울컥대며 핏물을 올려보냈다.

삼십여 분간 혈투가 이어지는 동안, 흉신은 이십 회가 넘도록 육신을 잃었다.

목을 베어도, 몸통을 반으로 갈라도, 육편으로 흩어버려도, 흔적도 없이 불태워도.

흉신은 끝없이 재생하며 부활했다.

가문도 그렇게 끈질기게 재건되고 부활할 수 있을까.

이미 몇 사람 남지도 않은 이 룬칸델이라는 가문을, 이 싸움이 끝난 후엔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때때로 그런 의문이 들 때면 진의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반드시 그렇게 할 테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그리웠다.

전생의 자신은 설 곳이 없던, 그 어둑하고 차가웠던 검의 정원.

전생의 자신을 대하던, 그 냉정하고 모질던 사람들.

전생의 자신은 떠날 수밖에 없던, 그 잔인한 가문.

그 괴로운 기억들마저 그리워서 가슴이 썩어버릴 것 같았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회귀라는 특권을 빼앗아가고, 다시 룬칸델을 그 시절로 돌릴 수 있다면, 설령 그때 추방된 자신이 발레리아를 만나지 못해 어디선가 소리 없이 객사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할 수 있다면, 진은 반드시 고개를 끄덕일 터였다.

내가 그저 비참하고 초라하게 살다 사라져도 좋으니 가문을 되돌려달라고.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일은 없으니까. 나는 너를 죽이고 무거운 의무를 짊어져야겠다…… 룬칸델이라는 의무를. 세상에 룬칸델이 우뚝 설 땅을 다시 만드는 의무를.”

진은 흉신과 무라칸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누메루스의 피로 회복된 몸은 다시 물에 잠긴 듯 무거웠다.

흉신 역시 재생이 더뎌져 몸이 빠르게 형성되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도.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자식이고 싶지 않을 것이며, 이런 어머니로부터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미래를 원한 적이 없었다.

숙명,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귀착점이기에 맞서 싸우고 있을 뿐.

넘어서고 있을 뿐.

“크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브라다만테를 휘두르는 진.

업화는 사라졌고, 테스는 다시 화염계로 돌아갔다.

무라칸은 아직 남아서 진이 더 다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혼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스걱!

영기에 휘감긴 검은 칼날이 흉신의 가슴팍을 할퀴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흉신이 혼기가 아닌 시뻘건 핏물을 토했다. 마치 사람처럼 선혈을 내뱉은 것이다.

계속 흡수되던 영원화가 처음으로 흉신의 가슴팍에 흐릿하고 푸른 불씨를 남겼다.

흉신은 그 불을 움켜쥐었다.

[스하악, 헉……!]

흉신이 쇳소리 섞인 가쁜 호흡을 뱉었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흉신의 뿔과 두 날개가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몸을 휘감고 있는 혼기도 흉하게 까진 비늘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

끝내 흉신의 가슴팍을 불태운 영원화가 혼기를 걷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초가 지날수록, 흉신은 점점 더 인간 시절에 가까운 외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은 착잡한 마음을 굳이 억누르지 않으며 검을 겨눴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은 결국 반도, 무라칸도, 다른 동료들도 없이 온전히 흉신과 오롯이 혼자 싸워야 끝나게 될 것이라고.

[꼬마, 괜찮냐?]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을 휘감고 있는 혼기의 폭풍이 요동치는 모습이 이어졌다.

폭풍은 순식간에 세 사람을 옥죄었다.

[마지막 발악이로군. 저 상태로 이만한 혼기를 사용하면 다음은 없을걸. 아직 나한테도 시간이 좀 남았으니, 일단 뚫고 나갔다가 혼기가 가라앉으면 끝장을…….]

“아니, 무라칸. 너 먼저 나가라.”

[뭐? 왜?]

“바깥쪽 전장이 밀리고 있다. 가서 도와줘. 어차피 이 혼기는, 내게 피해를 입힐 수 없으니까.”

무라칸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 진이 혼기의 폭풍에 손을 집어넣는 걸 보고는 날개를 으쓱였다. 이전과 달리, 정말로 혼기의 폭풍은 진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마지막 일대일이다. 언제나처럼 이기고 올 테니,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넌 룬칸델의 수호신이잖아.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해야지.”

진은 그렇게 말하며 서서히 흉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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