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5화
190화. 말리엣 히스터의 전승지(5)
눈을 뜨니 영상이 꺼진 채 푸르게 빛나는 기록창들이 보였다.
발레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별을 보듯 기록창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떠셨, 습니까. 주인님의, 세계.]
“무척 아름다웠어.”
골렘의 물음에 발레리아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레리아의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뻗었다.
진의 단단한 굳은살들이 발레리아의 손등을 긁으며 포개졌고, 그녀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스승의 손이 이렇게 작았었나.’
전생에서 발레리아와 손을 잡던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건 진이 그때보다 더 큰 사람이 된 까닭이었다. 전생엔 진이 주로 발레리아에게 기댔지만, 이제는 반대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삶을 삭막하고 황폐한 어딘가로 밀어 넣지 마라.
말리엣이 남긴 유언은 발레리아의 내면에 그간 그녀가 품어본 적 없는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이를테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나면서부터 모진 운명을 짊어지고, 함께 걷던 사람들을 잃고, 아득하기만 한 복수를 허상처럼 좇는 날이 계속되더라도.
그래도 때로는 삶에 빛나는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마음이,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말리엣으로부터 발레리아에게 전승되고 있었다.
진도 말리엣의 위대한 삶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말리엣의 말처럼, 세상엔 싸움에 내몰리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었다.
“발레리아.”
“응.”
“네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좋다.”
그건 진이 전생에 발레리아에게 종종 듣던 말이었다. 진이 폐인 같은 상태를 벗어날 때마다 발레리아는 그를 칭찬해줬었다.
[오, 뭐야. 그림 좋은데. 우우우.]
[크하하, 그렇게 연애질이나 할 때가 아닐 텐데?]
삼류 악당처럼 말하며 등장한 건 젠과 테벤이었다. 진과 발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연스레 맞잡은 손을 풀었다.
[그래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대시험을 치를 수 있겠어?]
진과 발레리아가 말리엣의 삶을 보는 동안 바깥은 다섯 시간이 흘렀다.
젠과 테벤은 그동안 심사숙고하여 통신 장치를 주기 위한 시험을 준비해두었다.
골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젠, 테벤. 정말로, 시험, 불합격하면, 통신 장치, 안 줄, 기세. 자기들이, 후손, 주려고, 만들었으면서, 이게, 무슨 이상한 행위.]
[흥! 말리엣이 함정을 남겼듯 우리도 시험을 치를 뿐!]
[암! 날로 먹는 건 안 되지.]
테벤과 젠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눈동자를 희번덕(유령임에도)댔다.
전승지에선 이미 충분한 성과와 감동이 있었으나, 본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초장거리 통신 장치를 놓치고 돌아가는 건 안 될 일.
전승지의 함정들처럼 무력을 요구하는 시험이라면 긴장 따윈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전투를 요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시험이지?’
‘마법이나 마법 공학에 관한 내용일 것 같기는 한데.’
관련 문제를 푸는 시험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있기는 했다.
진과 발레리아는 당장 비먼트나 지플의 아카데미 최고 등급 시험을 보더라도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실력자들이니까.
약간의 긴장감과 궁금증이 올라오는 찰나 테벤이 앞으로 나섰다.
[캬캬! 이제야 상황이 파악되나 보군. 왜, 시험이 어려울까 봐 두렵나?]
[세상에 쉬운 건 없어!]
“선조님, 그리고 젠 박사님. 준비하신 시험이 무엇입니까?”
[그건 말이다!]
[바로!]
[바로 바로!]
[가위!]
[바위!]
[보!]
[다!]
요상한 자세를 취하며 번갈아 말하는 젠과 테벤의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가위바위보라고요?”
“두 분과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되는 겁니까?”
[캬캬캬! 그래, 가위바위보! 이거라면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답이 없을 것이야.]
[음! 이 공정하고 완벽한 시험을 생각해냈더니 내 연구 인생이 풍족해졌다.]
[히스터의 이름을 걸고 말한다, 가위바위보로 우릴 이기지 못하면 통신 장치는 없어!]
무려 다섯 시간을 열렬히 고민한 시험의 내용이 가위바위보라니…….
진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혔으나, 발레리아는 다소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발레리아가 생각하기에 가위바위보는 순전히 운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까딱하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우린 지난 삼백오십 년 동안 둘이서 가위바위보를 수련했다.]
[테벤 녀석과 나는 거의 가위바위보의 대마왕이나 다름이 없지. 아니, 대마왕이 확실해.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우릴 이길 수 있을까?]
“선조님, 방금 분명 공정한 시험이라고 하셨습니다만.”
[누가 먼저 나올 테냐? 룰은 간단해. 먼저 20판을 이기는 쪽이 승리다! 한 사람당 목숨은 열. 열 번을 지면 퇴장. 반대로 말하면 열 번을 지기 전까지는 계속 상대와 싸울 수 있다.]
[선봉을 정해라. 우린 테벤 히스터가 먼저 나설 것이다. 최강자는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니 내가 테벤의 다음 차례일 수밖에 없지.]
[그건 무슨 소리지? 젠. 분명 방금은 내가 너보다 더 강력하니까 선봉에 서서 기를 죽이라고…….]
[흠흠, 어디 모기가 있나 보군. 누가 먼저 나올 테냐?]
진과 발레리아가 난처한 듯 잠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발레리아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지금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는 건 진이니까.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선조님.”
[그래, 히스터와 히스터의 대결이 보기에도 더 좋지. 큭큭큭, 시작이다! 가위, 바위, 보!]
갑작스레 테벤이 가위바위보를 소리치며 손을 뻗자 발레리아는 얼결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는 테벤 보, 발레리아 바위.
“윽.”
[캬캬캬캬, 이것이 선조의 관록이라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는 사실 심리전이야, 난 통달한 반면 넌 초보자일 뿐……. 사람은 대부분 당황하면 일단 바위를 내게 되어있단다. 그래서 네가 진 거지! 가위바위보!]
“앗.”
[가위? 난 바위! 또 나의 승리로구나. 좋아, 다음에 나는 보를 낼 것이다. 넌 가위를 내면 승리인 거다. 후후후, 가위를 낼 수 있겠나? 어렵지 않은 일이지. 가위바위보! 오 이런, 가위가 아니라 보를 내다니? 안타깝군.]
발레리아는 테벤이 바위를 낼 걸 대비해 보를 냈으나, 테벤은 그것까지 예상해서 가위를 냈다.
“분명 보를 낸다고 하셨…….”
[승부의 세계는 냉혹해. 이 선조를 믿지 못한 죗값을 받는구나! 내 말대로 가위를 냈다면 무승부라도 챙겼을 텐데. 큭큭, 이래서 애송이들이란. 가위바위보!]
놀랍게도 350년 동안 가위바위보를 수련했다는 테벤의 말은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테벤은 쉴 새 없이 심리적으로 발레리아를 흔들고 압박하며 수를 읽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틀렸군, 스승이 완전히 말렸어.’
발레리아는 이례적으로 당황한 채 계속 가위바위보를 이어갔다.
승부가 모두 끝났을 때, 테벤과 발레리아의 점수는 9:1이었다. 발레리아는 골렘이 칠판에 적은 점수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가위바위보에서 이렇게 무자비한 패배를 맞이할 줄이야.
[잘했어, 테벤. 한 판을 져주는 여유까지 부렸군. 후손이라 자비를 베푼 건가?]
[케케케케. 젠, 보아하니 자네는 나설 기회도 없겠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저 녀석은 아직 냉정을 잃지 않고 있다.]
[너는 내 후손도 아니니 전승으로 이겨주마…….]
이제 진이 혼자 둘을 모두 처리해야만 했다.
“진, 조심해. 진짜 고수셨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가위바위보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는 진.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휑한 바람이 진과 테벤 사이를 지나쳤다.
[룬칸델 애송이, 난 바위를 낼 거다.]
“그러십시오.”
[오? 센 척을 하는구나, 큭큭. 어디 네 담대함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지 보자고. 가위바위보!]
테벤은 바위를, 진은 보를 냈다.
[호오? 넌 좀 더 고단의 심리를 사용해서 요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군.]
“전 보를 내겠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이 몸을 도발하기까지? 예절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가위바위보!]
이번엔 진은 가위를, 테벤은 보를 냈다.
[……가위? 여기선 가위를 낼 이유가 없는데?]
“그렇습니까? 그냥 바꿔봤습니다만.”
[너, 고수로구나……. 아니면 그저 운이 좋은 건가?]
“가위바위보. 바위시군요, 보시다시피 전 보를 냈습니다.”
[뭣? 내가 또 졌다고?]
진은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테벤의 기세를 죽였다.
테벤은 남은 아홉 개의 목숨 중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발레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과 테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럴 수는 없어! 뭔가 조작을 한 거야!]
[조작, 없음. 확률상, 희박하나,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물러나라, 테벤. 네 상대가 아니었군.]
젠이 거물처럼 말하며 앞으로 나서자 테벤은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젠, 자꾸 나보다 강한 것처럼 말하지 마!]
[흥, 실력으로 진 것을 조작 운운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다니. 실망스럽구나, 테벤. 그것밖에 안 되는 남자였나?]
[진짜 저 자식이! 아, 말리지 마!]
골렘과 발레리아가 테벤을 붙잡자 젠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거, 오랜만에 적수를 만났다는 기분에 온몸이 전율하는구나……. 진 룬칸델. 이 젠 루트베르마저 꺾는다면 통신 장치를 내어주겠다.]
“준비됐으면 시작하시죠.”
잠시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사실, 흥분하고 긴장한 건 젠 혼자였다. 진은 열 번이 아니라 백 번, 천 번을 해도 모든 판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가위바위보여서 다행이군. 동전 던지기 같은 걸 했으면 진짜로 위험했겠어.’
가위바위보는, 사실 초인 수준의 ‘안력’을 갖춘 무인에겐 절대로 공정할 수가 없는 경기였다.
10성 기사의 혼이 담긴 쾌검조차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 진이, 가위바위보의 손 모양이 바뀌는 순간을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선 테벤과 마찬가지로 젠 역시 그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가위바위보!]
“바위, 제가 이겼습니다.”
[으윽!]
“이번엔 제가 졌군요.”
[가위바위보! 2연승이로군!]
진은 일부러 치열한 승부를 연출했다. 괜히 의심을 받는 것보다 젠이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려준 후,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판단이었다.
[보!]
“가위!”
[결과, 십 대 팔, 진, 룬칸델, 승리입니다.]
진과 발레리아는 손뼉을 맞추며 웃었고, 젠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결과에 승복했다.
[그냥 처음 마음먹은 대로 묵을 낼 걸 그랬군……. 좋은 승부였다, 진 룬칸델.]
[젠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을 테지……. 후후, 한 수 잘 배웠다, 진 룬칸델. 통신 장치를 가져와라, 젠. 승자 독식의 시간이다.]
이번엔 테벤이 젠보다 거물인 척을 했다.
[건방 떨지 마라! 가위바위보는 분명 내가 너보다 위야!]
[그 잘난 가위바위보 했다가 지금 결과가 어떤데? 그러게 내가 동전 던지기로 하자니까.]
두 사람은 잠시 티격태격하다가 함께 통신 장치를 가져왔다.
다소 험한 말들이 오갔으나 진짜로 감정이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드디어 나도 의무에서 자유로워지겠군, 이겨줘서 고맙다. 우리 후손과 진 룬칸델.]
[축하, 합니다, 새로운, 전승자들.]
골렘이 손뼉을 치며 진과 발레리아를 축하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