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1화
198화. 밑지는 거래(1)
“히, 그 미친 고깃덩어리 놈 감이 좋더라. 내가 너무 가까이에서 관찰하긴 했는데, 바로 알아보더라고.”
룬칸델, 검의 정원.
요나가 몸짓으로 대투왕 라키만의 모습을 묘사하며 말했다. 진을 포함한 룬칸델의 수뇌부 전원이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하루, 아니……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킨젤로의 주요 지부 하나를 끝장내다니.”
토나 형제의 말에 수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들의 땅은 킨젤로의 전 본회가 있는 땅. 검황성전 이후 주요 전력과 간부 대부분의 거처가 지금의 신본부로 옮겨졌다고는 하나, 파괴된 지부는 분명 킨젤로 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였다.
당연히 킨젤로 내 상급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심지어 적명족이 습격한 당시엔 베락트와 바드레이까지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도 단 한 무리의 적명족에게 일방적으로 전멸한 것이다. 베락트와 바드레이만 간신히 도주하고.
“날 알아본 것도 모자라 너한테 얘기를 전하라고 까불기까지 해서 확 죽여버릴까 했는데, 피곤해질 것 같아서 참았어.”
“엇, 그, 대투왕이란 놈은 누님이 죽일 수 있는 정도였어요?”
“히히, 그렇게 겁먹지 않고 물어봐도 돼, 헤이토나. 막내가 최고이긴 한데 요즘 지켜보니 너네도 좀 귀여운 것 같아.”
“감사합니다, 누님!”
“감사할 건 없어, 아주 조금 귀여울 뿐이니까.”
“옙.”
“히, 그 고기를 죽이자면 죽일 수는 있었을 거야. 붉은 고기는 척 보기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거든. 그런데 뭔가 느낌이 나쁘더라고. 분명 나보다 약한 상태인데, 싸우면 나도 크게 다칠 것 같은 그런?”
[그건 라키만이 가진 대투왕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요나.]
“히? 대투왕의 기운?”
[그래, 넌 감이 뛰어나니 라키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무의식중에 경계한 거다. 적명족 대투왕들은 청명족의 투왕들과 달리 본인의 능력만으로 강해진 놈들이 아니야.]
아메리스에 의하면 적명족의 대투왕들은 ‘성채’와 융합된 존재들이었다.
[적명족의 계급은 평전사와 2, 1급 투왕, 대투왕, 투신으로 나뉘지. 그리고 1급 투왕 중 융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한 놈들이 대투왕으로 선정된다.]
“적명족의 성채와 융합된 대투왕에겐 어떤 능력이 생깁니까?”
[성채마다 다르지만, 소환과 성채화라는 변신은 모든 대투왕 공동이다. 소환은 말 그대로 성채 내의 병력을 소환하는 능력이고, 성채화는 전투형 변신이다. 이름만 성채화일 뿐 그냥 짐승 형태지. 아마 요나가 느낀 위협은 성채화일 거다. 소환을 사용하기엔 아직 회복이 부족할 테니.]
“히이, 고기가 더 큰 고기가 된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베락트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 건 이상하군요. 그는 과거 린파 형제에게 맞선 적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공포에 잠식되지는 않았습니다. 무인으로서의 긍지를 보여줬죠.”
[그건 아마 라키만의 성채가 가진 고유 능력 때문일 거다. 내 기억에 의하면 놈이 가진 무력은 대투왕 중 3, 4위 정도인데, 그 시절의 청명족 평전사들조차 라키만만 만나면 정신을 못 차렸었어. 더 강한 대투왕을 만나도 기죽지 않고 잘 싸우던 이들이 말이다.]
즉, 라키만은 대투왕 중에서도 다른 수인들에게 특별히 더 큰 공포를 줄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적명족들이 그 고유 능력을 짐승 도살자라 부른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베락트와 바드레이라는 수인들이 그때보다 위축된 건 그 때문일 게다. 청명족 투왕급은 되어야 완벽하게 이겨낼 수 있지. 베락트와 바드레이가 그나마 싸울 수 있던 건 그들도 근접한 수준은 되기 때문일 거고.]
“뭔가 약자를 학살하기에 특화된 능력 같네. 약간 저나 헤이토나랑 비슷한데요? 잡배나 수준 이하의 적들은 아마 우리를 진보다 무서워할 겁니다.”
[또 그러는군요, 10기수. 진이 아니라 소가주라고 부르셔야지요. 여기가 지금 형제끼리 노는 자리일까요, 검의 정원 회의장일까요?]
“헛. 죄송합니다, 집사장님! 이런 멍청한 실수를.”
[회의 끝나면 시말서 올리도록 하세요. 옛날 같았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르엣의 한마디에 진을 제외한 수뇌들의 얼굴에 한층 더 긴장감이 서렸다. 그 호탕한 발카스조차 헛기침을 하며 한번 슬쩍 눈치를 볼 지경이었다.
“넵.”
[뭐, 청명족 평전사를 결코 약자라 볼 수는 없지만 데이토나의 말과 비슷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 애초에 적명족 자체가 내 시대엔 그런 인상이었다. 평균 무력은 분명 청명족보다 약한데, 다들 더 두려워했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하고 난폭했으니까. 대투왕부터는 청명족 동급보다 약하다고 할 수도 없었고.]
킨젤로의 입장에서 대투왕 중 라키만이 가장 먼저 깨어난 건 그야말로 악몽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부터 라키만이 어느 지부를 가든 수인들만으로는 상대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라키만이 직접 갈 것도 없이, 베락트와 바드레이 없이는 평전사들조차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당장은 네 예상대로 적명족들이 킨젤로 위주로 사냥을 시작했으나, 걱정이 되는구나. 라키만 호그가 설마 이렇게까지 빠르게 활동할 수 있을 줄은 이 몸도 예상치 못했다. 다른 성채가 더 남아 있다면, 놈은 순식간에 사냥감을 채워 동포들을 깨울 것이야.]
앞으로 적명족이 킨젤로만 계속 위협할 리는 없다.
그들이 가장 큰 원한을 품은 건 진과 아메리스였다. 권세가 충분히 돌아오면 적명족은 가장 먼저 바멀 연합을 노릴 터.
“놈들이 다른 적명족들을 깨우는 것도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를 것이라 상정하고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킨젤로가 감추고 있던 마족들의 힘이 드러나기 시작할 겁니다.”
진이 말했다. 수인은 아무리 많아도 적명족을 똑바로 상대할 수 없을 테니 마족의 힘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나 누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베락트와 바드레이는 킨젤로 내 마족의 권세가 강해지는 걸 우려하는 눈치였다고 했죠. 게다가 주요 지부가 박살이 났는데도 오르갈과 제피린은 직접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네. 소가주의 말대로 그 둘이 움직이지 않는 건 이상하군요. 라키만이 베락트에게 소가주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으니,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즉시 찾아왔어야 하는데.”
메리가 말하자 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왠지, 킨젤로가 곧 우리를 찾아와 거래를 요청할 것 같은 직감이 오는군요. 놈들에게 뭘 받아먹을지 고민하면서 잠깐만 기다리도록 합시다.”
* * *
킨젤로 신본부.
치료실에서 조가 빠져나오자 기다리던 간부들이 일어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조, 어떻게 됐나.”
비슈켈이 말하자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드레이 님의 팔은 회복이 불가하오, 부단장. 그러나 나와 부바르의 능력으로 명인의 팔을 붙일 수 있을 것 같군.”
“불행 중 다행이로군. 베락트 님은…… 아직 충격에 빠져 계시나?”
베락트에 관한 걸 묻자 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는 베락트가 잘못되면 기쁜 마음이 들 줄 알았다. 매번 자신에게 쓸데없이 면박을 주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게 베락트니까.
그러나 왜인지 베락트가 이상한 놈들한테 깨지고 돌아와서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니 예상치 못한 복수심이 치밀었다.
“그렇소.”
“흥, 킨젤로의 총사령관이라며 그렇게 고개가 빳빳하더니, 패배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라. 단장님이 깨어나시면 지휘권을 마족들에게 넘겨달라는 청을 올려야겠군. 애초에 하등한 짐승 따위가 우리 마족들을 부리는 게 말이 안 됐어.”
“닥치시오, 브라켄 바흐마. 샤갈 공도 가만히 계시는데 당신 따위가 뭐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브라켄이라 불린 마족은 어이가 없었다.
“이봐, 조. 너 베락트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
“브라켄, 누가 뭐래도 단장께서 정한 킨젤로의 총사령관은 베락트 님이오. 지금은 단지 오랜만의 패배에 싸움을 복기하고 계실 뿐. 곧 다시 일어서서 놈들을 쳐죽일 것이외다!”
“하여간 인간이란 종족은 알 수가 없네. 아무튼 난 단장님께 건의할 거다. 적호왕이니 대전사니, 이름값도 못하는 놈들을 어떻게 믿고 싸우란 말이냐?”
“썩 꺼지시오.”
“어, 간다. 가. 그런데 네놈도 앞으로 베락트가 아니라 마족들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다. 맨날 욕이나 먹고 벌레처럼 무시나 당하면서 왜 베락트를 챙겨주는 건지 모르겠네.”
조는 도끼눈을 뜬 채 브라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지켜보던 다른 간부들도 조의 모습이 의외라는 듯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와, 조 아저씨! 멋있었어요. 이 마르지엘라는 감동하고 말았네요.”
“흥…… 마족 놈들이 우릴 재끼고 득세하려는 꼴을 보기 어려웠을 뿐이야.”
“제 생각에도 베락트 아저씨는 이번 패배를 빌미로 벽을 하나 넘으실 것 같아요. 제 눈에는 다 보이거든요, 헤헤.”
“오, 마르지엘라 양이 보기에 정말 그럴 것 같나?”
간부들은 최근 마르지엘라의 ‘능력’이 강해진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네, 지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건 슬픈 일이지만…… 베락트 아저씨와 바드레이 아저씨의 각성 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그래도 죽은 단원들에겐 미안한 소리니까, 오늘부터 열심히 제사를 지내줘야겠어요.”
“나도 그 적명족이라는 놈들의 기술을 분석해서 우리 킨젤로를 더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좋아요, 좋아!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망하지 않으려면,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마, 망한다고?”
“네, 제가 보기에 우린 지금 진짜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랍니다. 단장님과 대공이 깨어나기 전까지 버틸 힘이 필요해요. 물론 망한다는 건 수인 병력 한정이지만…… 수인이 다 죽으면 추후 하비에르 님을 깨울 수 없겠죠?”
“지금 대기 중인 마족들만으로는 부족한 건가?”
“환마장과 그의 군대가 오기 전까지는 부족할 것 같군. 그러나 환마장은 언제 올지 모르고, 적명족이라는 놈들은 내일 당장이라도 우릴 또 칠 수 있다.”
비슈켈이 마르지엘라를 대신해 대답했다.
“부단장, 어찌하면 좋겠소?”
“마르지엘라의 말대로 힘이 필요해. 적명족이 언제 나타나든 대응할 수 있는 기동력과 무력을 갖춘 지원군이.”
“그런 지원군이 누가…… 아, 설마?”
조의 물음에 비슈켈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답했다.
“룬칸델의 소가주. 그와 거래를 진행한다.”